허응당 보우(普雨, 1507 또는 1509?~1565)는 중종 2~4년부터 명종 20년 무렵, 조선중기에 조정과 유림이 강력하게 추진한 법난(法難)으로 불교계가 존폐의 기로에 서 있을 때, 혜성처럼 등장하여 꺼져가던 조선불교의 법등을 밝히고 비참하게 죽음을 당한 순교자였다. 그는 명종 6년(1551)에 선종판사(禪宗判事)로 임명된 후 명종 20년(1565) 제주도에서 순교하기까지 불과 15년 동안 불교계의 전면에서 활동하였다. 그렇지만 청평사에서 은거했던 시기를 제외하면 제대로 활동한 기간은 겨우 7~8년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불교계에 남긴 공적은 어느 승려보다 탁월했고, 그의 저술은 종교적, 문학적인 측면에서 뛰어난 위상을 갖춘 역작이었다.

 

 

유불.종파 뛰어넘어 포용의 ‘不二思想’구현

 폐불정책에 항거…세상 등지고 피안의 길로

‘權僧’ 폄훼 잘못…조선불교 살린 고승

 

보우가 활약했던 시대는 조선왕조의 숭유억불 정책이 확고하게 정착되면서 성리학이 극성했던 시기였다. 이때는 조광조, 이황, 이이와 같은 조선을 대표하는 유학자들이 활동했던 시기였다. 이러한 성리학 극성기에 명종의 모후인 문정대비(文定大妃)의 도움으로 오래전에 폐지된 불교의 제도를 부활하려는 보우를 유자들은 ‘요승’, ‘권승’이라며 철저하게 폄하했지만, 보우는 조선불교를 중흥시킨 뛰어난 고승이었다.

유가의 강력한 반대 속에서 불교부흥을 위해 매진했던 보우의 삶과 행적은 승려 한 개인이 전체 유림을 대상으로 싸운 한 판의 처절한 전투였다. 보우는 이 전투에서 비참하게 죽음을 당했지만, 선교양종과 승과를 복구하고, 도승제(度僧制)를 부활하는 등의 탁월한 업적을 이룩하였다.

<사진> 조선 왕조의 폐불정책에 항거해 불법을 계승한 허응당 보우스님 진영.

그의 법명은 보우(普雨)이고 법호는 나암(懶庵)이며 당호는 허응당(虛應堂)이다. 일찍이 부모를 여윈 후 용문사에서 행자 시절을 보냈고, 15세 때 금강산 마하연(摩訶衍)에서 머리를 깎았다. 이후 용문사 등에서 수행하다가 23세 때 금강산에 들어가 6년 동안 여러 사찰에서 강학과 수행에 매진하였다. 또한 불법을 세속에 전하기 위해 하산하여 사방을 유력하다가 중종이 시행한 폐불(廢佛)정책을 직접 목격하였다.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지 않은 사찰은 모두 허물어 버리는 전격적인 척불정치와 죄 없는 수많은 승려들을 무차별적으로 하옥하고 처벌하는 처절한 법난을 지켜보았다. 이에 보우는 “차라리 주리고 얼어 죽더라도/ 다시는 세상에 대한 꿈을 꾸지 않겠다”며 금강산으로 돌아가서 더욱 수행 정진한 관계로 도력과 명성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금강산에서 10년 수행을 마친 보우는 함흥의 국계암(溪庵) 등을 거쳐서 회암사에서 요양하던 중 문정대비에게 발탁되어 명종 3년에 봉은사 주지로 내정되었다. 이때부터 보우는 불교계의 전면에 나서서 불교 부흥을 위해서 노력하였다. 유가의 집단적인 협박과 위협 속에서 문정왕후가 선교양종과 승과를 복구하고, 도승제를 시행하자 보우는 모든 실무를 맡아 보았다.

이후 보우는 명종 10년 선종판사와 봉은사 주지직을 사임하고 춘천의 청평사에 은거했다가 명종 17년 중종의 능을 성종의 능인 선릉(宣陵)을 동쪽으로 옮기는 대역사를 맡게 되었다. 이에 보우는 팔도의 승려들을 모아 힘겹게 대업을 완수했지만 그에 대한 조정의 공격은 계속되었고, 또한 명종 20년 봄 문정대비의 외호로 회암사를 중창하고 무차대회를 열어 왕실의 안녕과 불법의 홍포를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지만 문정대비의 죽음으로 인해 그의 불교부흥의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다.

문정대비의 죽음을 계기로 조정과 유림들은 집단적으로 보우를 죽이라는 수백 건의 상소를 올리고, 성균관 유생들은 동맹 휴학을 하면서 보우를 죽이라고 명종을 압박하였다. 이로 인해 보우는 제주도에 유배되어 제주부사 변협에 의해 비참하게 죽음을 당했다. 보우가 순교한 다음 해인 명종 21년 4월에는 선교양종과 승과가 폐지되었다. 보우가 목숨 받쳐 이룩했던 업적들이 모두 사라진 것이다. “가령 나암이 지금 세상에 없었다면/ 후세에 영원히 선이 없어질 줄 어찌 알겠는가”라는 시구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보우는 불교 부흥의 한 가지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기꺼이 희생하였다.

보우의 저술에는 <허응당집(虛應堂集)>상하 2권, <나암잡저(懶庵雜著)>, <수월도량공화불사여환빈주몽중문답(水月道場空華佛事如幻賓主夢中問答)>, <권념요록(勸念要錄)> 각 1권이 전해진다. <허응당집>은 보우가 23세 때 금강산에서 수행을 시작할 때부터 시대순으로 임종 때까지의 시를 엮은 것인데, 보우의 문학과 사상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자료이다. 이 책에는 620여 편의 시가 실려 있고, 보우가 순교한 지 8년이 되는 선조 6년(1573)에 문인 태균(太均)이 편집하고 직지사 주지 사명(四溟) 유정(惟政)이 교정하고 발문을 썼다. 이 책은 일본 나고야시 봉좌문고(蓬左文庫) 소장본이 유일본이다. <나암잡저>는 <허응당집>과 같은 시기에 출판되었는데 대중들에게 준 법어, 어록, 축문 등 잡문 30편이 실려 있다.

이 책에는 제자들에게 불법의 진수를 전한 ‘시소사법어(示小師法語)’와 보우의 사상적 특징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일정(一正)’ 등이 실려 있다. <권념요록>에는 불교계 서사문학인 ‘왕랑반혼전(王郞返魂傳)’, ‘원공결사전(遠公結社傳)’ 등 한문과 국문이 함께 기록된 11편의 전기문이 실려 있다. 이 전기문들은 독실한 수행과 정진으로 정토에 왕생한 신자들의 신행사례를 모은 것이고, ‘왕랑반혼전’은 주인공 왕랑이 이승에서 불교를 배척한 죄로 저승에서 심판받게 되었으나, 먼저 죽은 부인 송씨가 비방을 알려주어 위기를 모면하였고, 이후 왕랑 부부는 환생하여 불공을 닦고 극락세계에 태어나게 된다는 불교소설이다. 이 작품의 저자가 보우냐 아니냐 하는 점에서는 논란이 많다. <수월도량공화불사여환빈주몽중문답>은 사찰의 도량의식(道場儀式)의 요점을 문답 형식으로 서술한 책이다.

보우의 사승 관계는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용문사에서 행자 생활을 했고, 그곳에서 지행(智行)스님을 은사로 모셨다는 주장도 있지만 그의 사승 관계에 대한 자료는 전혀 남아 있지 않다.

보우의 가장 특징적이며 포괄적인 사상체계는

불이사상(不二思想)이다. 그의 불이사상은 불교에

적대적인 유자의 횡포와 부당한 압박을 불교의 자비와

인욕으로 감싸고, 불교에 적대적인 유자들 앞에서도

선종이냐 교종이냐를 두고 분열하고 대립하던 불교의

각 종파를 수습하기 위한 방편으로 내세운 지극히

포괄적이고 현실적인 사상이다.                             

<사진> 보우스님이 주석했던 서울 봉은사 전경. 불교신문 자료사진

보우의 가장 특징적이며 포괄적인 사상체계는 불이사상(不二思想)이다. 그의 불이사상은 불교에 적대적인 유자의 횡포와 부당한 압박을 불교의 자비와 인욕으로 감싸고, 불교에 적대적인 유자들 앞에서도 선종이냐 교종이냐를 두고 분열하고 대립하던 불교의 각 종파를 수습하기 위한 방편으로 내세운 지극히 포괄적이고 현실적인 사상이다. 따라서 그의 불이사상은 단순히 유불일치론(儒佛一致論)이나 선교일치론(禪敎一致論)에 그치지 않고 ‘염정일치(染淨一致)’, ‘물아일치(物我一致)’,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제사상과도 관련이 깊고, 노장사상 등의 여러 학설까지 두루 포용하는 거대한 사상체계이다. 그의 불이사상은 극단적으로 분열된 세상을 통합하고 폭력적인 차별과 고착된 서열의 세계를 불교적인 관점에서 아울러서 모두가 공존하게 하려는 보우식의 화쟁(和諍) 논리이다. 구체적인 보우의 화쟁 논리는 그의 산문인 ‘일정(一正)’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의 ‘일정’론은 천인합일과 이기설을 주장하는 유학사상을 아우르고, 동시에 염정일치(染淨一致) 등을 주장하는 불교의 선사상과 중중무진(重重無盡)과 이사무애(理事無碍)를 주장하는 화엄사상을 수용하고, <유마경>의 불이사상까지를 두루 포괄한다. ‘일정’론은 원효의 일심(一心)사상에서 영향을 받았지만, 당시대의 극단적인 분열과 대립을 불교적인 방법으로 치유하기 위해 노심초사했던 보우식의 독특한 불이사상이다.

보우는 참살된 이후 조선시대 내내 금고에 처해졌던 인물이었다. 유자에게 보우는 “같은 하늘을 함께 이고 살 수 없는 원수”였다. 따라서 그는 역사의 전면에 절대로 드러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보우는 불교계에 엄청난 영향력을 끼쳤다.

연산군에서 중종으로 이어지던 강력한 폐불정치로 인해 조선의 불교계는 초토화되었다.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에서 보우는 선교양종을 복구했고, 5번의 승과를 통해 150여명의 승려들을 선발했으며, 약 5000명의 승려들에게 도첩을 주는 일을 관장하였다.

이러한 제도 정비와 인재 선발로 인해 지리멸렬했던 불교계는 소생할 수 있는 기반을 갖게 되었고, 승과에서 급제한 서산(西山), 사명(四溟) 등과 같은 우수한 승려들이 차세대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었다.

강 석 근

동국대학교 강의전담 교수

 

[불교신문 2377호/ 11월1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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