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하고 또 성찰하면 무언가 보일게야”

“일체불성 깨치고 자아성찰하는 정진이 불교 핵심” 강조
70년 수행 일념…정각사 창건해 근기에 맞는 계층포교

긴 생머리를 갈래머리로 땋아 내린 열네살 소녀는 중학교 진학을 앞두고 책봇짐을 싸 짊어지고 집 근처 사찰을 찾았다. 모자란 공부를 사찰서 마음먹고 해보라는 어머니의 권유에서다. 철부지 소녀는 절에 오자마자 보따리는 내팽개치고 선원서 참선하는 수좌스님들을 구경하는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대웅전서 스님들이 염불하는 소리는 쏙쏙 들어와 며칠 지나고 나니 줄줄줄 욀 정도였다. 그로부터 70여년이 흘렀다. 그 날 그곳에서 출가한 소녀는 한국불교사상 최초로 비구니 최고 법계인 명사(明師)가 되었다. 조계종 명사 광우스님. 지난 8일 서울 삼선동 정각사에서 스님을 친견했다.
 

조계종 명사 광우스님은 수행자로 살아온 삶이 곧 법(法)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평생을 한결같이 정진하며 살아왔다. 세납 여든이 훌쩍 넘었지만 스님에게선 맑고 청량한 기운이 느껴졌다.

"14살 어린아이 눈에 비친 선객(禪客)의 모습이 어떻겠소?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는 모양이 이상할 뿐이제. 하루 이틀 사흘 날이면 날마다 면벽수행을 하시는 스님들을 보다못해 장난기가 발동했던 게야. 눈감고 좌선삼매에 빠진 한 수좌스님 얼굴을 손가락으로 꾹 찔러보고 도망을 쳤지. 도무지 사람인지 말은 할 수 있는지 등등이 궁금했었나봐." 광우스님은 70여년 전 이야기를 잔잔하게 들려줬다.

광우스님이 장난을 쳤던 상대는 상주 남장사 관음선원서 참선수행하는 수좌스님이었다. 당시 관음선원 조실 혜봉스님은 방선(放禪)의 여가에 ‘철부지 소녀’를 불렀다. “광우야(스님은 속명도 법명과 같다)” “예…” 혼날 줄 알고 마음 졸이며 대답했더니 조실스님은 “대답하는 그 놈이 무엇이냐?”라고 다시 물었다. 소녀는 어리둥절해 하면서 “모른다”고 답했다.

조실 스님은 다시 말했다. “선방의 스님들은 바로 그것을 생각하고 있는게야.” 뭔지 모를 큰 기운이 온몸에 감돌았다. 그 날 이후 철부지소녀는 “대답하는 그 놈”을 찾아 정진하는 ‘예비 수행자’가 됐다. 큰방 탁자 밑둥이 제일 끝에 있는 하판말석에 앉아 화두정진에 들어갔다. 마침내 출가발심이 맺혔다.

스님은 우선 비구니처소가 있는 김천 직지사로 가서 ‘출가절차’를 밟고 다시 남장사로 돌아왔다. <천수경>은 줄줄 왼지 오래고 <초발심자경문>과 <치문>을 배우고 남장사 혜봉스님 곁에서 <법화경>을 습득했다. 어느 날 혜봉스님이 큰 상을 줄테니 ‘법화경 해제’를 하루만에 외워보라는 지시를 내렸다. 상을 준다는 기대에 실제로 하루만에 달달 외웠더니 돌아온 상은 큰 붓 한자루였다. 읽고 외고 쓰면서 부처님법을 성실하게 공부하라는 암묵적인 가르침이었던 것이다.

스님의 수행담은 이어졌다. 행자로 살았던 스님이 삭발염의를 하고 승복을 빨리 입고 싶은 나머지, 은사스님에게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상좌가 은사를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은사가 상좌를 위해 먼길을 찾아오는 진풍경은 쉬 찾기 어려운 사례다.

“우리 은사스님은 내 편지를 받자마자 맏상좌를 데리고 장삼감을 떠서 직접 와주셨던 참으로 인자하신 분이셨제. 본래 삭발염의는 조실방 앞에서 해야 후에 큰스님이 된다는 설이 있어서 그 날도 나는 조실방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합장을 한 채 삭발을 했었어. 그 때 조실스님이 물으시더군. ‘성불하는 그날까지 후회하지 않고 중질을 잘 하겠느냐’고. 그 때 뭔지모를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서원했던 마음은 지금도 잊혀지지가 않아…”

이후 남장사 관음선원에 ‘한국 최초의 비구니 강원’이 세워지면서 비구니 스님들이 모여서 함께 탁마할 수 있는 도량이 생겼다. 그러나 4년간 운영된 남장사 관음강원은 첫 대교과를 졸업한 광우스님을 끝으로 문을 닫았다. 일제강점기에 미혼여성들이 모여있는 곳이면 위안부로 무차별 연행됐던 시절이라 강원 폐교가 불가피했다.

그럼에도 근대 비구니계 3대 강백 중 한사람인 수옥스님(1902~1980)에게 <화엄경> 등을 전수받았다. 강원을 마친 광우스님은 대학을 가면 속퇴(俗退)의 지름길로 인식되던 당시 혜봉스님의 법상좌인 뇌허 김동화(1902~1980, 전 동국대 교수) 박사의 응원으로 동국대에 입학했다. 6.25로 부산 대각사에 동국대 교사(校舍)가 있던 시절이었다.
 

1940년대 동화사 금당선원 앞에서 남장사 관음선원 조실. 혜봉스님(가운데)과 함께 찍은 사진. 우측이 광우스님.

1956년 비구니스님으로서는 처음으로 동국대 불교학과를 졸업한 스님은 재학시절 삭발염의한 승복차림이 어색해서 남장(男裝)을 하고 다니기도 했다. “출가한 비구니가 여성복을 입으면 옳지 않다고 생각하던 끝에 머리를 거뭇하게 기르고 양복을 입고 다니면서 공부를 했었제.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지만 그 때는 오직 공부에 목말라 그것이 우스운 줄도 몰랐지.”

‘비구니 스님 1호’로 동국대를 졸업한 스님은 10여년간 법화경 산림법회를 봉행했다. 본격적인 전법활동을 펴기 시작하면서 지금으로부터 40여년 전, 현재 스님이 주석하고 있는 서울 성북구 삼선동에 정각사를 창건했다. 일요법회를 비롯해서 어린이법회 중고등학생법회 청년법회 일반법회 등 근기에 맞는 계층포교를 전국적으로 처음 실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역시 김동화 박사의 도움이 컸다.

평생을 오로지 수행일념 하나로 부처님 제자로서 바른법을 배우고 닦아 널리 알려온 광우스님. 스님은 불교란 그저 “일체불성을 깨치고 자기를 성찰하는 정진”이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자기 마음의 근원을 찾아가다 보면 자신을 성찰하게 되지. 성찰하고 또 성찰하고 닦고 또다시 닦아가면 무엇인가 보일게야. 지금도 번뜩번뜩 놀라지. ‘광우야, 대답하는 그 놈이 무엇이더냐’라고 묻던 큰스님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니 깜짝 놀랄 일 아니겠나?”

70년 오롯이 수행과 포교에만 일념정진해온 광우스님은 오늘도 내일도 여여한 모습으로 부처님이 되는 길을 걷고 또 걷는다.


■ 광우스님은…

69년 자운스님 계사로 구족계
한국불교 첫 비구니 明師 품계

1938년 상주 남장사에서 성문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1939년 직지사에서 청담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1968년 청룡사에서 자운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각각 수지했다. 직지사 선전비구니선원, 동화사 부도암, 남장사 관음선원, 대전 세등선원에서 수선안거를 성취했다.

대한불교청소년교화연합회 심사분과위원장과 이사, 운문사승가대학 학장, 평화통일자문위원, 비구니 이부승 니화상 증사, 범민족올림픽추진중앙협의회 대의원, 목동청소년수련관 관장, 인도 보디가야국제삼단대계 계획 존중아사리 교수아사리, 불교텔레비전 이사, 전국비구니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정각사 주지와 생명나눔실천본부 이사를 맡고 있다.

지난 10월23일 합천 해인사 대적광전에서 열린 비구니 원로스님에 대한 명사(明師) 법계 품서식에서 조계종 종정 법전스님으로부터 명사법계를 받았다. 비구니에 대한 명사법계는 한국 불교사상 처음으로 명사는 비구의 대종사(大宗師)에 해당하는 품계로 승랍 40년 이상 비구니에게 품서한다.

하정은 기자 tomato77@ibulgyo.com
사진 김형주 기자 cooljoo@ibulgyo.com

[불교신문 2377호/ 11월1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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