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고보우선사(1301~1382)는 나옹혜근선사와 백운 경한선사와 더불어 여말삼사(麗末三師)로 추앙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불교계의 최대종단인 대한불교조계종의 중흥조이다. 선사는 1301년에 태어나 1350년 이후인 공민왕대에 활동하였으며 조선건국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위화도 회군이 일어나기 6년 전인 1382년에 입적하였다. 선사는 왕사와 국사에 책봉되면서 불교계에 대한 쇄신을 꾀하고자 하였고 선사가 진작시킨 선풍은 조선시대를 거쳐 오늘에도 빛을 발하고 있다. 조선중기 이후 불교계에는 선사와 그의 문도가 계통적으로 이어진다는 법맥이 설정되어 있다.

 

 

백장청규로 불교 쇄신한 조계종 중흥조

 나옹혜근.백운경한 선사와 ‘麗末三師’로 추앙

19세 때 가지산문서 ‘만법귀일 일귀하처’ 참구

 

# 고려후기 가지산문과 선풍

고려말 불교계 일각에서는 자정의 노력 내지 자기 혁신의 노력이 있어왔다. 때문에 공민왕대를 전후하여 여러 종파가 다시 부상되는 가운데 태고선사를 중심으로 한 가지산문과 나옹선사를 중심으로 한 사굴산문이 당시의 불교계를 주도하였다.

가지산문은 도의국사에 의해 개창되어 체증선사로 이어지고 고려중기 원응국사 학일선사(1052~1144)가 가지산문을 중흥하고자 하였다. 그후 원간섭기에 이르러 보각국존 일연선사(1206~1289)가 등장하면서 가지산문이 다시 부각되었다.

<사진> 태고보우선사의 진영.

일연선사는 가지산문이었으나 보조국사 지눌선사의 사상을 표방하면서 임제종뿐만 아니라 조동종이나 우리나라 고유의 민간신앙을 존중하면서 다양한 사상을 수용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일연선사의 상수제자인 보감국사 혼구선사에 이르러서는 몽산덕이선사의 선풍까지 수용하였다. 혼구선사의 제자 경초선사도 원나라에 유력했고 여찬선사는 중국 천목산에 주석하고 있던 당시 임제종 고승 중봉명본(中峰明本)선사를 참례하였다. 그리고 선원사의 주지를 지냈던 혼구선사의 문도 충탄선사도 활동하였다. 따라서 고려후기 가지산문은 일연선사와 그의 문도 혼구선사, 그리고 혼구선사의 문도 여찬, 경초, 충탄선사 등으로 이어지며, 이러한 것이 태고선사에게 계승된다.

몽산선사의 선풍은 그의 생존 시는 물론 오늘날까지 우리나라 불교계에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 더욱이 몽산선사의 제자 철산소경선사가 고려에 다녀감으로써 고려후기 불교계에 몽산선사의 선풍의 영향이 강화되었다. 당시 선종계를 주도하였던 수선사계 뿐만 아니라 가지산문계 일연선사의 제자인 혼구선사와 그의 문도들도 몽산선사의 선풍을 수용하는데 앞장섰다.

이렇듯 원나라 간섭기에 이르러 몽산선사의 선풍과 아울러 고봉원묘선사의 선풍이 수용되기 시작하였으며, 원간섭기 말기 불교계의 일각에서 원나라의 임제선풍을 수용하는 계기가 된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태고선사를 비롯한 나옹선사와 백운선사 등이다. 특히 이렇게 받아들인 선풍은 태고선사와 나옹선사의 문도들에 계승되고, 그들에 의하여 고려말 불교계가 주도되기에 이른다.

# 불교계 활동과 위상

그러면 고려말 불교계에 있어서 태고선사의 활동과 그 위상은 어떠하였을까?

선사는 원나라에 명성이 알려져 공민왕이 “내가 왕이 되면 태고선사를 반드시 왕사로 모시겠다”고 하였다. 1396년(공민왕 5) 공민왕의 왕사로 책봉되어 불교계를 재정비하고자 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9산 선문의 통합과 백장청규를 통한 불교의 쇄신이었다.

하지만 화엄종의 신돈(?~1371)이 1365년부터 1371년까지 집권하여 국정은 물론 불교계를 장악하고 있었다. 화엄종승 진각국사 천희스님(1307~1382)과 선현스님이 왕사와 국사로 각기 책봉되면서 태고선사의 이러한 불교중흥의 노력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속리산에 금고에 처해졌다. 1371년 신돈이 축출된 이후 국사로 책봉되고 우왕이 즉위하면서 다시 국사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1378년(우왕 4) 병을 핑계로 국사를 사직하고 1381년 재책봉되었으나 이듬해인 1382년에 입적하였다.

선사는 신돈이 집권한 1365년 이후 불교계에 이렇다고 할 시책을 펴지 못하고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었지만 선사에 의한 9선문의 통합과 종풍 쇄신의 노력은 당시 불교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마치 나옹선사가 전국의 불교계 대표가 참여한 공부선을 시행하고 회암사를 중창하여 고려말 불교계를 중흥시키고자 한 것과 비견되기 때문이다.

# 선사상 및 선풍

그러면 우리는 태고선사의 선사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흔히 태고선사는 석옥선사의 법만을 사사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선사는 석옥선사와 서로 뜻이 맞아 신구(信具)까지 받는 등 석옥선사의 법을 인가받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정작 석옥선사의 탑명이나 어록에는 석옥선사가 태고선사를 상수 법제자로 인정한 부분은 찾기 힘들다.

<사진> 양평 사나사는 보우스님이 고려 공민왕 때 140여칸의 규모로 중창한 사찰이다. 현재 이곳에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72호인 원증국사 석종탑과 73호인 석종비가 남아 있다.

태고선사는 13세인 1319년(충숙왕 6) 회암사 광지선사에게 출가하여 머리를 깎고 얼마 안되어서 가지산문 총림으로 가서 19세에는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의 화두를 참구하였다. 선사가 이러한 화두를 참구하고 분심을 내어 정진한 것은 고봉선사가 공부의 3요설(要說)로서 제시한 대신근(大信根).대분지(大憤志).대의정(大疑情) 가운데 하나이다. 이렇듯 태고선사는 석옥선사의 스승인 급암선사의 도반인 고봉선사의 선풍도 계승한 것이다.

또한 선사는 고려를 방문했던 철산소경선사의 제자인 무극선사의 교시를 받았다. 철산선사와 그의 제자 무문사총선사가 고려를 방문한지 30여년 만에 몽산선사의 손제자인 무극선사가 고려를 방문한 것이다.

태고선사는 이러한 선풍을 익힌 다음 원나라로 가서 석옥선사에게 인가받았다. 더욱이 ‘종사인가(宗師印可)’를 중시하는 몽산선사의 손제자인 무극선사의 교시가 태고선사에게 받아들여졌다. 석옥선사는 태고선사에게 가사와 주장자를 주면서 법제자임을 표시했지만 석옥선사에게 인가받은 것 자체는 몽산선사의 선풍의 영향이었다. 몽산선사의 선풍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을 ‘무자화두(無字話頭)’와 ‘오후인가(悟後印可)’를 들 수 있다. 태고선사는 국내에서 득도하고 원나라 석옥선사를 비롯한 뛰어난 선사들을 찾았던 것이다.

선사는 중국에서 귀국한 후 고려에 유력한 임제종 고승 고담선사와도 교유하였다. 고담선사는 당시 중국 임제종 고승 적조현명선사인데, 몽산선사의 4법어 가운데 등장하는 고담선사와 동일인물이라고 생각된다. 고담선사는 1367년 경기도 미원현 은성사에 왔다가 ‘태고암가’를 읽고 흠모하여 소설산으로 가서 보우선사와 교유하였다.

따라서 태고선사의 선사상 가운데 간화선 일문을 강조하는 것은 석옥선사의 법을 이었다고 볼 수도 있지만 몽산선사와 고봉선사의 선사상 내지 선풍도 수용하였다고 할 것이다. 선사의 선풍을 내세울 때 임제종 석옥선사의 선법을 계승한 사실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이나 태고선사의 선풍이 지눌선사와 비교하여 간화선 일변도로 나아가 그 사상적인 폭을 줄였다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태고선사가 석옥선사와 계합하여 인가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석옥선사의 선풍뿐만 아니라 국내의 지눌선사와 몽산선사의 선풍, 고봉선사의 선풍을 계승하면서 종합 발전시켰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 맺음말

그렇다면 태고선사의 활동과 위상 그리고 선사의 선사상 내지 선풍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앞서 언급한 바와같이 고려후기 가지산문은 신라말 개창조 도의국사와 고려중기 원응국사를 거쳐 원나라 간섭기 일연선사와 그의 제자 혼구선사에 이어진다. 그리고 혼구선사의 문도 여찬선사, 경초선사, 충탄선사를 거쳐 태고선사에게 계승되어 가지산문이 사굴산문과 더불어 고려후기 불교계를 주도하였다.

선사는 9산문의 통합 등 불교계의 재정비와 쇄신운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선사와 그의 문도들은 고려말 불교계의 다른 세력의 견제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신진성리학자들에 의하여 비판을 받았기 때문에 비록 여말선초에 크게 발현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16세기 중엽 청허휴정선사와 그의 문도들이 태고선사를 정맥으로 삼아 한국불교계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동안 선사의 선사상 내지 선풍은 석옥선사에게서 법만을 이은 듯 규정되었다. 그러나 선사의 선사상 내지 선풍은 국내의 지눌선사의 선풍을 받아들인 바탕위에 중국의 임제종 정맥인 고봉선사와 그의 문도인 중봉선사 그리고 몽산선사와 그의 문도 철산선사, 그의 손제자 무극선사의 선사상 내지 선풍도 포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바로 알아야 한다.

따라서 선사의 선풍이나 위상을 중국 임제종의 아류인 듯 이해하거나 지눌선사 보다 그 사상적 폭이 좁다고 볼 것 아니다. 선사는 당시의 선사상 내지 선풍을 포용하여 확대 발전시킨, 한국적 선사상의 재창조자였던 것이다.

 황 인 규

동국대 역사교육과 교수

 

 

[불교신문 2367호/ 10월1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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