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 신인 축융(祝融)이 벌써 기지개를 켠 것이 분명했다· 덩달아 여름을 다스리는 염제(炎帝)인 남와(南訛)까지도 나들이를 나왔지 싶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6월에 불볕더위란 말인가· 산 정상을 향해 한발 떼면 땀은 두 방울이 솟구치고 목은 깊숙이 타들어 갔다· 그나마 나무 그늘이라도 있으면 다행이었지만 그마저 없을 때면 “찌는 더위 불보다 매서워(酷熱甚於火) / 일천 화로에 숯불 이글거리듯 하네·(千爐扇炭紅) / 풍이도 더위 먹어 죽으리니(馮夷應死) / 불이 수정궁에 미치리라·(燒及水精宮)”라고 노래한 이규보의 심정을 알 것도 같았다· 물을 다스리는 신인 풍이조차 쪄 죽일 것만 같은 더위, 그 더위가 팔공산에 가득 차 있었다·

 

“숨 고르며 계단 오르니 반갑게 웃는 부처님이…”

  자연석 광배 삼아 무심한 얼굴 발아래 절하는 보살 바라볼 뿐

  상반신 비해 하반신 굵게 표현 다른 마애불 보다 더욱 친근해

그러나 부처님이 그 자리에 여여 하실진대 어찌 그를 향한 걸음을 멈출 것인가· 아랑곳하지 않고 걸었다· 하지만 서너 발자국 떼고 나면 흐르는 땀을 주체할 길 없었으니 산을 오르는 길은 더디기만 했다· 도대체 산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이 땅에 불법이 펼쳐지고 부처님이 조성되기 전부터 이 땅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에게는 신(神)과도 같은 존재이지 않던가· 신라 또한 다를 바 없어 대사(大祀)를 지내던 삼산(三山) 그리고 중사(中祀)를 모시던 오악(五嶽)과 더불어 소사(小祀)를 지내던 24곳의 크고 작은 산들을 섬기지 않았던가·

산 전체를 성역으로 여기거나 혹은 신성시하는 산악숭배 사상으로부터 암석이나 나무를 섬기는 고대 민간신앙들이 비롯되었으며, 이 땅 곳곳에 남아 있는 마애불들 또한 그러한 신앙적 배경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더구나 지금 오르고 있는 팔공산은 신라의 오악 중 중악(中嶽), 곧 부악(父嶽)이었으며 공산(公山)이라 불리던 신성한 산이었다· 또한 산마루에 두 구의 부처님이 바위에 새겨져 있으니 어찌 한 걸음 내 딛기 힘들다며 상봉에 오르는 것을 마다하겠는가·

사진설명 : 동봉 약사여래입상이다· 상체에 비해 하체가 넓어 보이며 왼손보다 아래에 있는 오른손이 과장되어 보인다· 그것은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는 앙각(low angle)의 표현기법이다·

그렇다고 서둘러 갈 일 아니니 더러 나무그늘을 찾아 이규보가 공산, 곧 팔공산 산신에게 올린 제문들을 읽으며 쉬었다· 이규보는 1202년 12월부터 1204년 3월까지 지금의 경주인 동경(東京)과 청도의 운문산 일대에서 발생한 민란을 평정하러 경주에 머문 적이 있었다· 그때 무사히 난을 평정 할 수 있기를 기원하며 오악에 대해 일일이 제를 올리고 제문을 남겼는데 유독 팔공산에 대해서 3편의 제문이 남아 있다· 한 편은 자신들이 반란군을 섬멸하는데 힘을 실어달라는 통상적인 제문이었다· 그러나 쉽사리 난이 평정되지 않자 다시 제를 올릴 때에는 난근(蘭筋), 곧 말의 힘줄을 제물로 바치며 지은 제문이며 마지막 한 편은 무사히 난을 평정하고 돌아가며 감사한 마음을 전하는 내용이다·

 “찌는 더위 불보다 매서워 일천화로에 숯불 이글거리듯 하네

             풍이도 더위 먹어 죽으리니 불이 수정궁에 미치리라”          -이규보

그는 제문에서 팔공산의 산신을 공산대왕(公山大王)이라는 호칭으로 부르고 있다· 같은 글에서 당시 고려의 왕인 신종(神宗)을 후(后)로 표현하고 있으니 그것은 임금이라는 말일 것이다· 산신의 존재를 오히려 나라의 으뜸가는 존재인 임금에 비해 더 큰 존재로 말하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곧 산은 절대적인 힘을 지니고 있는 존재이며 그의 보살핌을 받지 않고는 나라의 중대한 일을 차질 없이 치를 수 없다는 것을 은연중에 말하고 있는 것이지 싶은 것이다·

숨을 고르며 가파른 돌계단을 올라서자 어느덧 동봉과 팔공산의 정상인 비로봉으로 갈라지는 삼거리였다· 동봉에는 석조약사여래입상이, 비로봉 아래에는 마애약사여래좌상이 계시지만 어느 곳을 먼저 갈까 고민할 겨를도 없이 발길은 동봉으로 향하고 있었다· 20여년 만에 다시 찾는 걸음이기도 하려니와 당시 동봉의 마애약사여래에게서 받았던 감흥이 아련했기 때문이었다· 숲을 빠져나가자 산은 민머리를 드러냈고 마치 거석(巨石)신앙의 대상처럼 큰 바위 하나가 우뚝 서 있었다·

부처님은 그곳에 계셨다· 그저 무심한 얼굴을 한 채 자연석을 광배삼아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팔공산의 주봉인 비로봉과 동봉을 오가는 주능선 상에 계신 때문인가· 평일임에도 등산객들의 발길이 잦아 번잡하기 짝이 없었다· 나무그늘을 찾아 주린 배를 채우며 소란함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다시 부처님 앞으로 나오니 기도하는 보살 서너 분이 연신 무릎 굽히고 몸을 숙여 절을 하는 소리만 들릴 뿐 사위가 고요했다· 행여 그들에게 방해가 될까, 먼 곳에서 부처님을 바라봤다·

비록 거리는 멀었지만 부처님의 높이와 비슷한 높이의 바위까지 기어 올라가 기대어 앉았다· 한참을 물끄러미 바라봤지만 무엇인가 어색했다· 부처님은 나와 눈을 맞추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높이가 6m에 달하고 마치 단을 조성한 듯 자연석의 대좌 위에 서 계시니 그 높이가 더욱 만만치 않았다· 그렇지만 나 또한 그 높이와 얼추 같은 높이의 마주 서 있는 바위에서 바라보고 있었는데도 그러하니 의아하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대개 나라 안 마애불들의 시선처리는 참배자들과 눈을 맞추기보다 먼 곳을 응시하고 있기 마련이다· 그러니 구태여 마애불들과 눈을 마주치려면 나의 높이를 높여야 했다· 그러나 나의 높이를 높였음에도 도무지 눈앞의 부처님과는 눈을 맞출 수가 없었으니 무슨 까닭일까·

내가 틀렸음은 땡볕에 머리가 익을 만큼의 시간이 지나고 난 다음이었다· 부처님은 자신의 바로 아래에서 절을 하고 있는 보살들을 바라 볼 뿐이었으니 미처 그 눈길이 나에게까지 닿지 않았던 것이다· 그제야 의문이 풀리며 알 것 같았다· 부처님의 하반신이 상반신에 비해 굵게 표현되어 있으며 아래로 늘어뜨려 오른쪽 허벅지 위에 올려놓은 오른손이 지나치다 싶도록 크게 표현되어 있는 까닭을 말이다· 그것은 앙각(仰角)의 표현방식이다· 앙각이란 밑에서 위를 올려다보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되면 짧은 다리도 길어 보이며 위 보다는 아래가 넓어 보이기도 한다· 또한 바라보는 사람의 눈 가까이에 있는 물체가 멀리 있는 것 보다 크게 보이는 착시현상을 수반하기 마련이다·

바로 발밑을 보는 듯 아래를 보고 있는 시선처리 또한 거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부처님 아래로 다가들어 우러르는 참배자들을 내려다보는 모습인 것이다· 곧 마애불을 조성할 당시 석공이 전체를 가늠하며 부처님의 모습을 바라본 장소가 곧 요사이 참배자들이 서서 두 손 모으거나 몸을 숙이며 절을 하는 자리인 것이다· 그러니 여느 곳의 부처님과는 달리 동봉의 마애약사여래입상은 바로 부처님 코밑으로 다가들어야지만 그 참 모습을 대할 수 있다는 것과도 같은 말이다·

앞서 마애불들이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은 대개 마애불이 위치하고 있는 곳에서 시선이 직선으로 뻗어나가며 평행을 이룬다는 말이다·

그것은 곧 마애불 조성당시 비계를 세우고 올라간 석공들의 눈높이와 부처님의 눈높이가 마주하는 까닭일 것이다· 그 때문에 대개 올려다 봐야하는 마애불과 시선을 맞추는 일은 여간해서 드문 일이기도 하다· 오죽하면 마애불의 뒤로 올라갈 수 있으면 구태여 그곳으로 가서 부처님의 눈길 향하는 곳이 어디인지 살펴보라는 말까지 나왔을까·

사진설명 : 뒤에 보이는 봉우리가 동봉이며 왼쪽 아래에 부처님이 계신다.

그러나 눈앞의 부처님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거기에 익숙해 같은 높이로 올라 선 나의 걸음을 되돌려 놓았다· 바로 아래에 가서 서자 원만하며 그윽한 눈길이 나를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바람 한 점 없는 불볕이었지만 꼼짝 않고 그 앞에서 벗어나지 못한 까닭은 여느 부처님들보다 더욱 친근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리라· 그것은 먼 길 마다 않고 자신을 찾아 참배 온 대중들을 좀 더 자신 앞으로 다가들게 만들고 그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기 위함은 아니었을까· 여느 다른 곳의 마애불들이 대중 전체를 아우르며 이끌고 나간다면 이곳의 부처님은 대중 한 명, 한 명의 기도를 귀엣말로 들어 주고 있는 듯 했던 것이다· 고개조차 오른쪽으로 갸우뚱거리는 듯 하고 있으니 더욱 친근하게 여겨져 그에게는 무슨 말이라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두어 시간이나 머물렀지만 등산객과 참배객들의 행렬이 끝없이 이어져 어수선하기만 했다· 보름달이 뜨는 밤이면 조용할까·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비로봉으로 발길을 돌렸다· 비로봉은 군사시설을 포함해 온갖 송신시설의 안테나로 뒤범벅이 되었을 뿐 더러 철조망으로 견고하게 막아 놓았으니 에둘러 마애여래좌상에게로 향했다· 10분이나 걸었을까· 거대한 암벽이 병풍처럼 펼쳐진 곳, 그곳에 계셨다· 향을 사르고 삼배를 올린 후 부처님을 살펴보고 부처님을 등지고 앉았다·

조금 전과는 달리 외진 탓인지 사위가 고요했으니 나무그늘이 없어도 앉아야 할 일이었다· 종일 걷기만 했으니 잠시라도 앉아서 마을을 추스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불볕더위에 지친 탓인가· 생각은 모아지지 않고 머리는 깨질듯이 아팠다· 매월당 김시습이 경주의 금오산에 머물 때 팔공산 아래를 지나며 시를 한 수 지었다· ‘팔공산을 바라보며(望公山)’라는 제목의 시는 “험준한 팔공산이 우뚝이 솟아서(公山峻聳嶸) / 동남으로 막혔으니 몇 날을 가야 할꼬(却東南幾日程) / 이 많은 풍경을 다 읊을 수 없는 것은(多少風光吟不得) / 초췌하게 병들어 살아가기 때문일세·(只緣憔悴病中生)”라고 했으니 지금 나의 행색이 그와 다를 바 없었다·

 

 

'마애약사여래좌상'의 특징

   연화좌 양쪽 ‘용두’ 눈길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산 동봉석조약사여래입상은 시도유형문화재 20호로 지정되었다·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 입상은 마애불과 석불의 장점만을 취한 듯 큰 바위에 환조(丸彫)에 가까운 고부조로 새겼다·

머리는 소발이며 육계는 두툼하지만 높이는 낮다· 양쪽의 귀는 목까지 길게 늘어졌으나 목이 짧아 삼도가 불분명하다· 법의는 통견이며 가슴께에 모은 왼손에 지물을 든 것처럼 보이나 확인이 쉽지 않다· 흔히 갓바위라고 부르는 팔공산의 관봉 석조여래좌상(보물 제431호)과 상호의 친연성이 확인되므로 조성 시기를 나말여초 즈음으로 본다·

사진설명 : 수더분한 동봉의 부처님과는 달리 비로봉 마애약사여래좌상은 화려하고 장식적이다.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산 비로봉 마애약사여래좌상은 시도유형문화재 3호로 지정되었으며 동봉의 부처님보다 좀 더 이른 시기인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불상의 전체 높이는 3·8m에 이르며 연화좌 위에 남서향으로 앉아 계신다· 그런데 눈에 띄는 것은 연화좌 양쪽 끝에 용두(龍頭)가 있는 것이다· 드물게 보는 것이어서 관심을 끌었으며 머리는 민머리에 육계가 두툼하게 솟아 있다·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며 법의는 우견편단이다· 오른손은 무릎 아래로 늘어뜨렸으며 왼손은 복부에 올려 약합을 들고 있다·

더구나 양쪽 손목에는 팔찌와도 같은 조각이 되어 있어 보주형의 화염과 당초문이 어우러진 광배나 두광의 표현과 함께 전체적으로 장식적이자 화려하며 동봉석조약사여래입상보다 세련된 분위기를 풍긴다· 

이지누 / 기록문학가

가는 길  /

지난주에 다녀 온 삼성암지 마애약사여래입상을 지나 서봉을 향해 올라도 되지만 길이 가파르다· 좀 더 쉬운 방법은 팔공산 케이블카를 타고 중턱까지 올라가 산행을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수태골로 등산을 해도 되며 동화사 들머리에서 부도암과 염불암을 거쳐 오르는 방법이다· 추천하는 순례 길은 수태골로 올라 상봉 근처의 부처님을 친견하고 염불암 마당의 마애여래좌상과 마애보살좌상을 에둘러 동화사로 내려오는 길이다· 수태골에서 정상까지는 2시간 남짓이며 비로봉 마애불에서 동봉마애불까지는 10분, 동봉에서 염불암까지는 30분이다· 염불암에서 동화사까지의 길은 아름답기 그지없으며 40분 남짓하다·

[불교신문 2338호/ 6월2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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