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그냥 스님’ 되고 싶어”
유일한 교통수단은 ‘도보’ … 자급자족하며 ‘수행의 맛’ 만끽
농사철 앞두고 2000여평 전답 홀로 일구며 ‘선농일치’ 실천
전남 화순 모후산 시적암에서 홀로 정진하는 법장스님이 상추밭을 손보고 있다.
4월20일은 곡우(穀雨). 이때부터 본격적인 농사철이다. 해인사승가대학 학감을 지낸 법장스님은 전라남도 작은 암자에서 홀로 농사를 지으며 정진하고 있다. 전기도 전화도 없는 절이다. 스님이 지인에게 얻어 쓰고 있는 휴대폰은 먹통이었다. 그나마 문자메시지 기능은 살아있는 게 신기하다. 서로 17개의 연통을 주고받은 끝에 겨우 약속을 잡았다. 정오에 기별을 띄우면 저녁 7시에 답장이 오는 식이었다.
지난 12일 주소도 모른 채 ‘모후산 시적암’이라는 단서만 들고 무작정 찾아갔다. 택시로 화순 근처를 1시간30분 동안 헤맸다. 취재가 불발되는 것 아닌가 초조해할 때, “(화순군 남면) 내리에서 ‘설아헌’이란 간판을 보고 계속 올라오라”는 메시지가 ‘몸 성히’ 도착해 가까스로 만날 수 있었다. 꼭 10년 전인 1997년 이맘때 해인사를 나온 스님은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시적암(是寂庵). ‘여기서 열반적정을 이루겠다’는 뜻이다.
2000평 전답을 혼자 일군다. 쌀은 주변에 융통해 먹어도 찬은 모두 자급자족한다. 마당 한편에 간장과 된장을 담은 장독대도 수북하다. 생전 처음 해보는 밭일이었다. 이제는 좋은 모종을 손수 골라내고 뙤약볕 아래서 농약 통을 짊어지고 다니는 자신의 모습이 낯설지 않다. “자유롭고 싶었죠. 권력 부 명예 모든 것으로부터. 그냥 스님이 되고 싶었어요. 돌이켜 생각하면 다른 무엇이 되고 싶어서 출가한 건 아니었죠. 소원은 스님, 그 뿐이었지.”
스님의 유일한 교통수단은 도보다. 스님은 2003년 틈틈이 써온 글을 묶어 〈사람이 그리운 산골이야기〉를 출간했었다. 그때 딱 한번 서울 땅을 밟아봤다. 씨앗을 사기 위해 10리가 넘는 가게까지 걸어 나가는 게 외출의 전부다. “구태여 나갈 필요를 느끼지 못해요. 나가봐야 아무것도 없거든.” 실제로 시적암에서 스님 외에 살아 움직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 산과 물 뿐인 희멀건 풍경 탓인지 당신의 고독은 더욱 묵직해보였다.
스님은 정말 혼자 산다. 도시의 독신과는 차원이 다르다. 누우면 술집, 엎어지면 편의점이 있는 곳에 사는 그들은 혼자 즐기는 것일지언정 혼자 사는 것은 아니다.
모후산으로 가는 길은 스님에게도 모험이었다. ‘스님은 잔정이 많아서 절대 혼자 못 산다’는 도반들의 만류를 멋지게 뿌리치고 나왔기에 무엇이든 소득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시작부터 삐걱거렸다. 시적암 터를 잡고 대들보를 세우려는데 ‘IMF’가 터졌다. 생활고보다 돈을 꾸고 다니는 자신의 모습이 더 절망적이었다.
시적암에서 처음으로 맞은 겨울엔 발전기를 도둑맞았다. 홍수가 나면 진입로는 흔적도 없이 날아가버렸다. 재작년 겨울이 압권이다. 유행성 출혈열에 걸려 병원에서 보름 동안 자리보전하고 있던 사이, 누군가 침입해 가으내 수확한 작물과 벌목용 전기톱까지 몽땅 싸들고 달아났다.
결국 산 속을 헤치며 나무 삭정이를 주워 모을 땐 눈물이 나기도 했다. “당당한 출격대장부로 살겠다고 들어왔는데 사소한 일에 낙담하고 마음을 졸이는 내가 더 짜증스럽더군요. 차라리 이보다 더 원시적으로 살았다면 어땠을까 싶어요. 모닥불 때고 생식하며 완전한 무(無)로 살았으면.”
사실 처음부터 혼자 살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마음 맞는 사람들과 아담한 선방을 꾸려 ‘봉암사 결사’와 같은 승가공동체를 지향했었다. 그러나 실패했다. 외져도 너무 외졌던 모양이다. “신도들의 시주로 살아가는 스님들은 무언가 그들의 삶에 도움이 되는 말을 해주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정작 나의 생각과 사는 이야기를 들려주려 하면 ‘스님은 현실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며 손사래나 치기 일쑤예요. 끝내 입을 다물고 말죠.”
스님은 뜻을 알아주는 지기를 기다리며 앞으로도 ‘막강한 청빈’을 고수하며 지낼 계획이다.
〈사람이 그리운 산골이야기〉에 나오는 첫 번째 글의 제목은 ‘올해 봄날도 수상하다’이다. 2002년이었는데, 3월초에 매화꽃이 피는 이적을 보며 세상의 흉조를 걱정했다. 스님은 “올해도 그때만큼이나 봄이 얄궂게 왔다”고 말했다. 세상이 한미 FTA 때문에 유난히 봄을 탄다. ‘제3의 개국’과 ‘21세기형 매국’으로 갈라진 국론이 매캐하게 타들어간다. 물론 스님과는 아무 상관없는 논란이다.
인터뷰를 마치며 스님은 “구질구질하게 고생한 이야기 밖에 못했는데 뭐 쓸 게 있겠느냐”며 미안해했다. 하지만 마지막 찻물을 따르는 모습은 어느 스님보다 기품이 넘쳤다. “혼자 힘들게 살다 보니까 느낀 게 한 가지 있긴 있어요. 자기 모습대로 사세요. 자기 능력만큼만 행하고. 그 이상을 바라면 나도 힘들고 남도 힘듭니다.”
화순=장영섭 기자 fuel@ibulgyo.com
[불교신문 2320호/ 4월2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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