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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 2563 (2019).2.17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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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봉암사 결사 무엇을 남겼나
 식민불교 청산하고 정화운동 이념 모태

‘부처님 근본정신 회복’ 취지로 전통불교 복원

조계종단 재건 주춧돌 놓고 대중화에도 큰 획

 <사진설명> : 봉암사 결사는 근본불교적인 불교개혁운동을 표방, 이후 전개된 불교정화운동의 이념적 모태가 됐다. 사진은 1954년 12월 전국비구.비구니대회에 참석한 스님들이 조계사 인근에서 정화의 타당성을 홍보하는 모습.

 
부처님의 근본정신을 회복하자는 취지로 시작된 봉암사 결사. 공동수행을 통한 청정불교 회복을 소리없이 외친 봉암사 결사는 6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한국불교 수행전통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다. 10여명의 수좌스님들이 청정한 수행을 실천에 옮기면서 ‘오직 부처님 법대로만 살아보자’는 ‘원칙적인 외침’이 오늘날까지 면면히 전해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봉암사 결사 60주년을 맞아 결사의 성립과 내용에 이어 현대적 의미를 짚어봤다.

1947년 가을 성철, 청담, 자운스님 등이 총림생활에는 도서확보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판단에서 당시 김법룡 거사가 소장하던 도서를 봉암사로 인수하면서 시작된 봉암사 결사. 이렇게 시작된 결사는 불법에 어긋난다며 우선 불공과 천도재를 받지 않고 수좌스님 스스로 자발적인 노동을 통해서 생활하자는 방침을 정했다. 당시 봉암사 수좌스님들은 나무하고 물긷고 밭갈고 탁발하는 것을 일상화했다. 가사와 장삼, 발우 등의 개선도 시도했다. 이같은 제반규칙을 일컫는 ‘공주규약’에는 이외에도 참선수행, 포살 실시, 능엄주 암송, 자주ㆍ자치 구현, 청규와 계율의 준수 등 17개 항에 달하는 규약이 포함돼 있다.

이같은 개혁을 시도한 것은 당시 불조교법이 파괴됐다는 현실 인식에서 나왔다. 봉암사 결사에 대한 소문이 점차적으로 퍼져감에 따라 전국 각처의 수좌스님들은 봉암사에서 수행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몰려들었다. 1948년 봉암사 대중은 30여명에 달했다. 청담, 성철, 자운스님을 축으로 향곡, 혜암, 월산, 성수, 법전, 우봉, 도우, 보경, 보안, 응산, 청안, 혜명, 일도, 보문, 홍경, 종수스님 등이 그 주인공들이다. 결사는 재가불자에게도 급속히 번졌다. 봉암사에 밀려든 불자들을 대상으로 보살계 법회를 봉행했고, 이를 기반으로 스님-신도간 위계질서가 구축됐다. 재가자가 스님들에게 예를 표하는 삼배의례도 이 당시부터 정착됐다. 법회에서 법단 내 중단예불이 폐지됐고 〈반야심경〉 독송의례가 보편화됐다. 이는 봉암사 결사가 불교의 대중화에도 큰 획을 긋게 된 배경이다. 보살계 법회 뿐 아니라 공양물의 평등성 등도 단적인 예다.

이처럼 결사는 불교의 근본과 한국불교의 전통을 회복하기 위한 현실인식이 저변에 깔려 있는 가운데, 당시 불교계의 모순을 잡고 사상적 대안을 정립해 주었다.

 <사진설명> : 봉암사결사 이후 5년 만에 전국의 스님들은 ‘불교정화’를 외쳤다. 사진은 1954년 12월 정화촉진을 촉구하며 종로.중앙청 일대를 시위하는 스님들.
 
 
 한국 현대불교사에서 봉암사 결사가 갖는 의의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봉암사 결사는 우선 일제 식민지 불교 잔재의 극복이라는 측면이 두드러진다. 식민지 불교 극복의 실천운동으로 정의되는 봉암사 결사는 해방공간 불교계의 역사적 과제였던 일본불교의 청산, 식민지 예속성의 단절, 한국 전통불교의 복원을 충실히 실천했다. 근본불교적인 불교 개혁운동을 표방한 결사는 따라서 불교정화운동의 이념적 모태가 됐다. 1954년부터 본격화된 불교정화 운동 추진의 정신적 기반이 됨에 따라 봉암사 결사에 동참한 대다수의 수좌스님들은 정화운동을 주도하거나 합류했다. 물론 결사의 정신이 정화운동을 추진한 중심부에 있었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다만 결사의 정신이 조계종단 재건과 운용의 기초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이론의 여지가 없다. 잘 알려진대로 결사에서 실행됐던 의식와 의례 규칙 등은 이후 관행화됐다. 앞서 제시한 장삼과 가사, 〈반야심경〉 독송, 삼배의례 등의 보편화가 그것이다. 뿐만 아니라 결사의 전개 과정에서 나타난 규약과 이념, 실천 등은 조계종 승가정신사의 상징사적 의미를 제시해준다.

봉암사 결사는 그러나 미완성의 결사로 소멸되고 말았다. 2년여간 전개된 결사는 1949년부터 서서히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봉암사 인근에 빨치산이 출몰하면서 사찰 인근에 경찰이 자주 출입했고 급기야 수행생활에 지장은 물론 수좌스님들의 생명에 위협까지 받게했다. 끝내 1949년 9월 봉암사에 보관됐던 도서는 부산의 묘관음사로 이전됐고 대중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봉암사 결사는 이처럼 외부의 요인에 의해 좌절됐지만 수좌스님들의 투철한 현실의식, 결사의 자생성, 규약에 나타난 원칙성과 규율성, 청정성, 간화선 중심 등을 표방했다. 현대불교사에 중요한 위상을 점한 이유도 여기에 근거한다.

식민지 불교의 극복, 근본불교적인 개혁운동, 정화운동의 이념적 모태, 결사에서 시도된 의례의 지속성 등은 봉암사 결사가 한국불교에 남긴 상당히 의미있는 획으로 인식되고 있다. 김광식 부천대 교수는 ‘봉암사 결사의 전개와 성격’을 주제로 한 논문에서 “봉암사 결사는 한국불교사의 기념비적인 의의를 갖고 있다”며 “근대 식민지불교의 모순을 청산하려는 강렬한 정신과 실천에서 대두된 봉암사 결사는 이후 불교정화운동의 추진 및 조계종단 재건과 운영에 있어 기본적 준칙으로 인식되었다고 할 만하다”고 밝혔다.

조계종단 재건의 밑거름이 됐던 봉암사 결사가 비록 좌우익 갈등, 6.25 전쟁 등 민족적 비극에 의해 ‘미완성 결사’로 중도 해체됐지만 청정가풍을 실천했던 2년간의 결사는 60년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그 정신만은 오롯이 전해지고 있다.

하정은 기자 jung75@ibulgyo.com
 
[불교신문 2305호/ 2월28일자]
 
 
 
결사의 산증인 수원 봉녕사 묘엄스님

“율장에 안 맞는 것은 다 버렸다”

열대여섯 나이에 결사 참여

하루종일 오로지 정진 몰두

“요즘 후학들 따라하지 못할 것”

지난 16일 수원 봉녕사에서 승가대학장 묘엄스님을 만났다. 봉암사 결사 당시 열 대여섯의 나이로 봉암사 백련암에서 참선을 했던 스님은 어느새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다. 스님은 성철스님과 청담스님에 대한 기억으로 봉암사 결사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대승사 쌍련선원에 있을 때 청담스님과 성철스님이 영산도를 그려놓고 말씀을 나누는 걸 뒤에서 봤습니다. 커다란 종이를 펴고 해인사를 총림으로 만든다는 가정 하에 도면을 그리시더군요. 경전에 능한 운허스님과 이광수 씨에게 강원을 맡기고, 자우스님과 종수스님은 율원을, 성철스님과 청담스님은 선원을 맡아 운영하면 좋겠다는 희망들이었죠.”

해방 직후, 불교의 모습은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포교란 단어가 생소했던 시절이라 불교를 알리고자 애쓰는 스님들도, 절에 찾아오는 신도들도 없었다. 스님들은 오로지 정진에만 몰두했다. “고춧가루 한 홉이라도 사판승에게 일일이 허락을 구하고 사용하던 때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수행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두 분 스님(청담, 성철스님)은 해방과 함께 출가자도 변해야 한다는 데에 의견을 모았던 것 같습니다.”

동냥을 해서라도 영산회상을 한번 실현해보자고 결심한 스님을 따라 묘엄스님도 비구니스님 다섯 명과 함께 봉암사 백련암에 방부를 들였다. 이곳에서 스님은 경전을 근거로 흐트러진 율을 바로잡아가는 과정을 체험했다.

자급자족을 원칙으로 선농일치를 실천했고, 보름과 그믐에 포살법회를 열었다. 때 아닌 때 먹지 않고 자지 않았다. 또 보조국사 지눌스님이 입었던 장삼을 똑같이 맞춰 비구.비구니스님 가리지 않고 나눠입었다. 중국의 총림법을 따라 외출할 때는 삿갓을 쓰고 육환장을 집었다. 비단 가사는 누에고치를 살생해서 만든 것이라 입지 않고 대신 삼색으로 염색한 괴색가사를 수했다.

“스님에게 삼배를 올리기 시작한 것도 봉암사에서부터입니다. 1948년 자운스님을 계사로 보살계를 주고 그 때부터 스님을 보면 삼배를 올리라고 가르쳤습니다.”

스님들은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뜻으로 모든 일을 처리해나갔다. “율장에 맞지 않는 것은 모두 버렸습니다. 부처님이 금했던 비단가사와 목발우를 비롯해, 산신각이나 칠성각에 있던 탱화도 태웠습니다. 민속신앙이지 불교는 아니니까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힘든 시기라 불만도 생기고, 각 처에서 스님들이 모인 만큼 문중도 제각각이라 분열도 있을법했다. 봉암사 결사는 그러나 이런 우려를 딛고 모범으로 자리 잡아갔다. 한 철이라도 봉암사에서 보낸 스님은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란 말이 회자될 정도였다.

“요즘 후학들은 따라하고 싶어도 할 수 없을 겁니다. 그 때는 화장실 들어갈 때만 빼고 하루 종일 가사장삼을 수하고 지냈습니다. 대중숫자대로 지게를 만들어 아침저녁으로 나무를 하고 탁발을 해 살았으니 여간 고된 것이 아니죠.”

스님은 60년이 지난 지금 봉암사 결사정신이 많이 사라진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산신각이나 칠성각 등은 모두 되살아났고, 신도들 보시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자급자족하며 살던 수행자의 모습도 희미해졌기 때문이다. “당시와 똑같이 그저 초발심으로 돌아가 그 옛날 우리 스님들이 목청 높여 말씀하셨던 수행의 청정함과 엄격함을 되살렸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수원=어현경 기자 eonaldo@ibulgyo.com



[불교신문 2305호/ 2월2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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