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이 있었던 곳…지금은 타종교 ‘성지’돼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에 위치한 천진암은 한국 가톨릭의 발상지로 널리 알려졌다. 가톨릭측의 주장에 따르면 “1779년을 전후해 이벽, 정약용, 정약전, 정약종, 이승훈 등 소장 유학자들이 폐사가 된 천진암을 찾아 강학회를 열었다. 강학회는 단순히 서학(西學)을 공부하던 모임에서 벗어나 신앙생활로 발전했으며, 이에 따라 한국 최초의 가톨릭교회로서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한국 가톨릭 발상지로서 권위를 부여해 성지(聖地)로 추앙받고 있다. 하지만 “가톨릭 측은 성지로서 권위를 부여하는 과정에서 역사를 심각하게 왜곡하는 누를 범하고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전언이다. 특히 스님들이 엄연히 수행했던 천진암을 ‘폐사’한 곳이었다는 표현이나, 잠시 짧은 기간동안 불교의 암자였다는 주장은 도를 넘어섰다는 의견이 많다.

<사진설명: 경기 광주 천진암(天眞庵)터. 사찰 터였던 이곳에서 가톨릭 측이 공사를 하고 있다. 광주=김형주 기자>

전문가들은 천진암이 폐사가 아니라는 증거로 다산 정약용의 시를 들었다. 김상홍 단국대 교수는 ‘다산과 천진암의 관계’라는 논문에서 이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천진암강학회가 열린 후 18년이 지난 1797년 정약용은 정약전, 정약종 두 형과 더불어 천진암으로 놀러갔다. 그 소회는 〈유천진암기(游天眞菴記)〉와 시문 8제 15수에 기록돼 있다. 시문 가운데 다산이 천진암에서 형제들과 유숙하면서 밤에 지은 〈사석(寺夕)〉이란 시는 가장 명확한 증거다. ‘…누가 이 좋은 언덕과 골짜기 가져다가 / 두어 명 스님들만 차지하게 했던가(留與數僧專).’ ‘…종소리 나자 스님들과 죽을 먹고(鍾動隨僧粥) / 향은 꺼져 나그네와 함께 잠들었구나….’ 이를 보면 가톨릭 측 주장과 달리 1779년 이후에도 천진암은 스님들이 수행하던 도량이었음을 알 수 있다.

가톨릭 측이 천진암이 폐사였음을 주장하는 근거는 역시 정약용의 글이다. 1801년 순조1년 이승훈.이가환 등 가톨릭교도와 진보적 사상가 100여 명이 처형되고 400여 명이 유배된 신유사옥으로 유배생활을 했던 정약용이 18년 만에 풀려나 66세인 1827년 천진암을 다시 찾아가 지은 〈천진소요집(天眞逍遙集)〉이 그것이다. ‘밤에 천진사에서 잤는데 절이 퇴락해 옛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다(夜宿天眞寺 寺破無舊觀)’고 적혀 있다. 가톨릭 측은 이 글을 증거로 천진암이 폐사였다고 내세우고 있다.

가톨릭측 ‘일방적’ 주장

정약용 ‘천진소요집’서

1779년 천진암은 폐사였다

사찰의미 ‘庵’대신 ‘菴’표기

 

불교계 ‘역사적’ 반박

정약용 ‘유천진암기’에

1779년 후에도 스님들 수행

도와준 게 오히려 화근 돼

하지만 이런 주장에는 다산이 앞서 지은 시문을 면밀히 혹는 의도적으로 살피지 않았다는 혐의가 짙다. 정약용이 36세의 나이로 천진암을 가서 지은 〈유천진암기〉를 무시한 채 30년이 지난 후 쓴 문집만 보고 폐사의 전거로 삼는 것은 무리한 적용이라는 비판이다.

신대현 사찰문화연구원 연구위원은 “조선시대 문헌에서 ‘폐사’라고 했더라도 실제 기능을 했던 사찰도 있었다”며 “불교를 배척하던 당시 시대상황에 따라 일시적으로 스님 등 기거하던 사람이 없는 사찰을 폐사라고 표현한 자의적인 해석이 많았던 점을 볼 때 천진암이 당시 폐사했다고 볼 수 없다”고 말했다.

가톨릭의 천진암에 대한 역사 왜곡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원래 불교 사찰이었다는 사실을 축소하기 위해 암자를 표시하는 庵(암)을 ‘菴’으로 고쳐 썼다. 〈평화신문〉(9월10일자)을 보면 ‘당시 남인계 학자들 호가 모두 녹암(鹿菴), 직암(稷菴) 등 ‘암(菴)’이었으므로, 정약용 선생만이, 또 이곳 천진암에 대해서만, 천진암의 ‘庵’이라는 한자를 ‘菴’이라고 종종 달리 씀으로써, ‘菴’이라는 호를 가진 자기네 단체의 본거지였음을 드러내고 있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브리태니커백과사전〉이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천진암을 ‘암자 암(庵)’으로 쓰고 있어 가톨릭 측의 이런 주장도 설득력을 잃는다.

가톨릭 측이 천진암을 폐사였다고 한 것에는 다른 의미도 포함돼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분명 1797년 당시 천진암에는 스님들이 있었고 가톨릭 강학회도 열렸는데, 30년이 지난 1827년에는 아무도 없는 폐사 상태였다는 것에 착안한 의문이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신유사옥(1801년) 당시 조정(朝廷)이 가톨릭교도를 신고하지 않고 숨겨준 죄목을 들어 천진암 스님들을 처형하고 사찰을 강제 폐쇄했기 때문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가톨릭교도들은 왜 사찰에서 강학회를 열었을까. 프랑스인 샤를르 달레 신부의 1874년 저서 〈한국천주교회사〉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정유년(1777)에 유명한 학자 권철신은 정약전과 학식을 얻기를 원하는 그 밖의 학자들과 함께, 방해를 받지 않고 깊은 학문을 연구하기 위해 외딴 절로 갔다.’ 당시 서학(西學)에 대한 박해를 피해 외딴 절인 천진암을 찾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천진암 스님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서학자들의 공부를 도와준 셈이다. 때문에 가톨릭 측의 천진암 주장은 당시 불교가 대승적인 차원에서 카톨릭교도를 도왔다는 역사적 사실을 축소하고 은폐하려는 의도가 숨어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

역사학자 이이화 씨는 “천진암 성지에서 이 곳에 옛 절터라는 역사적 사실은 단 한 줄도 발견할 수 없었다”며 “분명한 역사왜곡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또 천진암과 함께 잠시 강학회 장소로 사용된 주어사 터에서 발견된 ‘해운당대사의징지비(海雲堂大師義澄之碑)’가 서울 합정동에 위치한 절두산 순교성지에 옮겨져 있는 이유에도 의문이 든다.

이에 따라 천진암에 대한 역사왜곡을 바로잡고 정확한 사실(史實)을 밝혀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폐사가 아닌 제 역할을 하던 수행도량이자 박해받던 가톨릭교도들을 돕던 대자대비의 부처님 말씀을 실천하던 사찰이라는 역사적 진실을 분명히 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역사를 의도적으로 왜곡한 가톨릭 측이 참회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종단협 불교인권위원장 진관스님은 “이렇게 불교에 대한 왜곡이 심한데도 관심조차 없었던 불교계도 반성하고 이제라도 역사 바로세우기에 나서야 한다”며 “가톨릭교도 인권과 종교화합 차원에서 참회하고 역사를 재조명하는 데 스스로 앞장서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왜곡된 사실을 기록해 물의를 빚고 있는 평화신문 관계자는 “기획이라 표시했지만 사실은 변기영 신부가 보내온 광고다. 신문사측엔 책임이 없다”고 말했다.

현재 사찰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천진암 터에는 대웅전터로 추정되는 위치에 이벽.이승훈 등 강학회에 참석한 5명의 ‘조선교구 설립자 선조’ 묘가 이장돼 있으며 성당, 박물관, 연구원 공사가 한창이다.  김하영 기자

● 천진암의 수난사

천진암이 언제 완전히 폐사됐고, 가톨릭 성지로 변모했을까. 1989년 9월에 발행된 월간 〈대원〉 제82호에서 피해 당사자들의 증언을 소개, 당시 상황을 짐작케 한다.

마을 노인들을 취재한 〈대원〉지의 기사에 따르면 “가톨릭인들을 숨겨준 탓으로 관가에서 폐사시켰다. 천진암에서 수도하던 스님도 십여분 참형됐다”고 증언하고 있다. 해방 이후 천진암을 다녔다는 신도들의 증언으로 볼 때 천진암은 구한말 중창과정을 걸쳐 1980년 초반까지 유지돼 온 것으로 추정된다.

“가톨릭인 숨겨줘 관가에서 폐사

수도하던 스님 10여명 참형 당해”

천진암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1962년의 일이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이 발행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영어권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등에 따르면 1962년 남상철에 의해 사지(절터)가 확인됐고, 천진암이 천주학의 시발지라고 주장한 수원교구 내 몇몇 신부들이 1979년 성역화 사업을 시작했다. 정약전이 〈주교요지(主敎要旨)〉를 만든, 가톨릭 시발지에 대해서는 가톨릭내에서도 논란이 많다. 1770년대 가톨릭이 모였던 장소를 정확히 명시하지 않았던 때문이다. 천진암은 그 후보지 가운데 하나였음에도 불구하고 수원교구는 대대적인 성역화 사업에 착수했다.

〈대원〉지에 따르면 변기영 신부의 주도로 천진암 일대의 땅을 사들였는데, 당시 천진암터에 사는 주민들에게 땅을 사들이기 위해 “자신의 과수원에 들어가는 주민을 경찰에 고발하고” “외출 후 집에 돌아올 때 수차례의 검문과 검색을 당하게 만들고” “사찰 신도의 소지품을 검사하는 등” 정부의 협조를 얻어 상식 이하의 행동을 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또 천진암터에 있던 영통사에 대해 “광주시 당국을 동원해 건축중이던 건물을 일방적으로 건축취소시키고, 예불소리가 시끄럽다고 고발하고, 밤에 건달이 사찰에 침입해 거주자를 위협하고, 신도들이 절 앞 개울에서 쉬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등”의 행동을 했다는 증언이다. 또 가톨릭계가 추진한 ‘군립공원계획’에 반대한 주민들을 안기부와 경찰서가 조사했다는 내용으로 볼 때, 가톨릭과 광주시의 조직적인 탄압이 지속된 것으로 해석된다.

결국 34만여평에 이르는 땅을 사들인 변신부측은 1979~81년 사이에 이벽.정약종.권철신.권일신.이승훈 등 한국가톨릭회 초기 인물들의 묘를 천진암터로 이장했으며, 1990년 영통사 주지 일영스님이 탄압을 이기지 못하고 사찰에서 나옴으로써 천진암이 불교의 역사에서 사라지게 됐다.

 안직수 기자 jsahn@ibulgyo.com

[불교신문 2265호/ 9월2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