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다정한 여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뚝뚝하고 엄격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알았습니다.

어머니의 한 걸음, 한 걸음이 모두 나를 향한 기도였다는 걸. 젊은 날엔 김구 선생을 따라 아버지와 함께 당당한 여자 광복군이었던 어머니, 그 누구에게도 무릎을 꿇지 않고 당차게 살아온 강인한 여인이 “지장보살, 지장보살”을 부르며 무릎을 꺾은 때가 일본군에 맞서 싸우던 임시정부가 중경으로 옮겨갈 때 타게 된 마차에서 내가 굴러 떨어져 심하게 다쳤을 때라고 합니다.

갓 태어난 나는 당연히 그 기억이 없지만 내 몸은 아직도 그 때를 기억하고 있어 내 다리에는 지금까지 큼지막한 상흔이 남아 있습니다.

어머니는 교훈이 되는 소리는커녕 잔소리도 안하는, 전형적인 말을 아끼는 형입니다. 나는 그 흔한 “공부 열심히 해라” “시험 잘 봐라” “시험 잘 봤느냐”같은 말도 들어본 기억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큰 시험을 앞둘 적엔 어머니는 새벽부터 절에 가셨습니다.

젊은날 여자광복군으로 헌신

한평생 자식에 말 아끼시며

내리사랑 가슴에 품으신 분

어머니 기도는 내 삶의 등대


대전중학교에 들어갔을 즈음에도, 대전고등학교에 들어갔을 즈음에도, 서울대학교에 들어갔을 즈음에도 열심히 백일기도를 드리셨습니다. 내가 그 기도 덕택에 시험에 합격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어머니의 기도가 내 인생의 가장 깊은 힘이었다는 것을 어찌 부인할 수 있을까요. 지금도 그 때의 어머니를 생각하면 왜 그렇게 처연한 생각마저 드는 지 모르겠습니다.

아들이 자랑스러울 때조차도 어머니는 말을 아꼈습니다. 나는 내 어머니가 나를 자랑하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알지요. 나는 어머니의 자랑이고 하늘이라는 걸!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극도로 말을 아끼신 것은 행여 그 교만이 아들의 장래에 걸림돌이 될까 걱정해서였습니다. 나는 말을 하지 않고도 통하는 깊고도 깊은 세계가 있다는 것을 어머니에게 배웠습니다.

어머니는 또 다른 세상으로 통하는 문입니다. 어머니가 있기에 우리는 마음 속에 법당을 지으며, 무조건 마음 놓아도 되는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고, 어머니가 있기에 우리는 삶을 긍정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어 어머니를 만드셨다”는 얘기는 우리 모두가 어머니의 사랑으로 사랑을 배우고 성숙을 배우고 용서를 배우고 화해를 알게 되기 때문일 겁니다. 어머니를 생각하면 ‘나’만큼 흠뻑 사랑받은 존재가 있을까, 싶게 훈훈한 건, 우리 모두에게 어머니는 관음의 현현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지금도 나와 함께 살고계십니다. 나는 어느 순간 알게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몸이 불편하신 어머니가 여전히 맥을 놓지 않는 것은 바로 나에 대한 기도가 남아서라는 것을!

불편한 몸이 되고 나서야 나를 보면 환하게, 소녀의 미소를 짓는 어머니! 건강하셨을 때에는 그 미소조차 아꼈던 어머니가 내 눈시울을 뜨겁게 만듭니다.

나는 이제 분명히 고백할 수 있습니다. 어머니는 존재 자체가 큰스님이고, 큰 기도라는 것을! 어머니는 나의 하늘이라는 사실을!

김원웅/ 국회 의원

[불교신문 2246호/ 7월1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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