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타카쿠스 준지로오(高楠順次郞, 1866~1945)
<20> 타카쿠스 준지로오(高楠順次郞, 1866~1945)
  • 승인 2006.06.03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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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수대장경’ 편찬…일본을 대표하는 학자

유럽에 유학해 7년간 불교학 연구
20세기 漢譯불교문헌 ‘표준’ 정립
동경제국대학 교수로 인재도 양성



불교를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타이쇼신수대장경〉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것은 중국, 한국에서 편찬된 대장경을 기초로 해 일본에 전래한 고사경(古寫經)이나, 20세기 발견된 돈황(敦煌) 문서 등을 교합(校合)한 대장경의 결정판이며, 현재에도 한역불교문헌의 표준이 되는 대장경이다. 이 일을 한 사람이 도쿄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의 교수로 메이지부터 쇼와(昭和) 중반까지 일본의 인도학.불교학계를 이끈 다카쿠스 준지로다.


준지로오는 1866년, 히로시마(廣島)현의 농업, 사와이 간조우(澤井觀三)의 장남으로서 태어났다. 아명은 우메타로오(梅太郞), 나중에 준(洵)으로 바꿔, 나아가 준지로오(順次郞)로 바꿨다. 실가의 성은 사와이(澤井)였지만, 후에 결혼해서 타카쿠스(高楠)가의 양자가 돼서는 타카쿠스 준지로오가 되었다. 호는 셋초우(雪頂)였다. 히로시마현은 정토진종(淨土眞宗)의 신앙이 번성한 지역이며, 준지로오도 그러한 환경 속에서 자랐다.

10세의 무렵, 〈시경(詩經)〉, 〈당시선(唐詩選)〉 등 한적(漢籍)을 배워,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사숙에 들어가서 공부를 계속했다. 그 후 고향의 초등학교의 교사가 되었는데, 이 때 용산회(龍山會)라는 모임을 만들어 정치를 연구했다. 또 기풍관(起風館)이라는 조직을 만들어 지방 청년의 기풍 쇄신에 노력하거나 금강사(金剛寺)라는 절을 회장(會場)으로 삼아서 불교강연회를 개최하거나 했다.

그 후 쿄토에 나와 니시혼간지(西本願寺)가 만든 쿄토보통교교(京都普通敎校)에 입학했다. 이 학교는 주로 종파내(宗派內)의 절이나 신자의 자제에게 입학을 허가해, 신시대에 활약하는 유위의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교과는 대부분 외국인에 의한 영어 강의나 영어의 원서를 쓰는 강의를 했다. 또 생활에는 군대식을 도입해, 규율의식의 양성을 도모하는 등,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교육을 했다. 준지로오는 매우 우수하고, 또 집단을 통솔하는 능력도 있어서 항상 학생 중의 리더였다. 그는 재학 중 학생의 풍기를 교정하기 위해서, 금주 금연을 설해, 덕행을 권하는 반성회(反省會)라는 조직을 결성하기도 했다. 22세 때, 효우고(兵庫)현 코우베에 사는 타카쿠스 마고사부로우(高楠孫三郞)의 외동딸 시모코(霜子)와 결혼해, 타카쿠스가에 양자(養子)로 들어와 성을 타카쿠스로 바꾸었다.

1890년(25세), 준지로오는 유럽으로 유학을 갔다. 런던에 도착하자, 난죠우 분유우(南條文雄)의 소개장을 가지고 막스 뮬러(Max Muller) 박사를 방문했다. 그는 당초 정치나 경제를 공부하고 싶었지만, 뮬러 박사의 권유도 있어서 인도학.불교학의 연구에 종사하게 되었다. 이후 7년간, 그는 뮬러 박사 아래에서 연구하는 것과 동시에, 독일.프랑스 등의 대학에서도 배워, 1897년(32세)에 귀국했다. 유학중에는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이나 의정(義淨)의 〈남해기귀내법전(南海寄歸內法傳)〉을 영역한 것 외, 수많은 영문 저작을 저술했다.

귀국 후 그는 도쿄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 문과대학의 강사가 되어, 범문학(梵文學)의 강좌를 맡았다. 그 다음 해에는 현직인 채로 체신대신(遞信大臣)의 스에마쯔 겐초오(末松謙澄)의 비서가 되어, 러일전쟁을 앞두는 상황 속에서, 영일동맹(英日同盟)의 강화를 도모하기 위한 외교의 일에도 종사했다. 1899년(34세)에 제국대학 교수가 되어, 다음 해에는 문학박사학위를 얻었다. 그 후 62세에 정년퇴직이 될 때까지 제국대학을 중심으로 많은 인재를 양성했다.

그런데 준지로오의 실적으로 대표적인 것은 〈타이쇼 신수대장경〉(이하 ‘타이쇼 장경’으로 약칭)의 편찬이다. 대장경을 편찬하게 된 계기는, 1917년(52세), 대학 강의에서 파리어의 니카야(Nikaya)와 한역 〈아함경(阿含經)〉의 대조연구를 하고 있었는데, 당시 있었던 대장경은 학생들에게 입수하기가 너무 어려워서 어떤 학생이 준지로오에게 새로 대장경을 만드는 것을 제안한 것이었다. 그래서 1923년(58세), 와타나베 가이교쿠(渡邊海旭)와 연명으로 간행취지서를 발표해 작업에 착수했다. 편집.교합 등은 문하생뿐만 아니라 각 종문대학(宗門大學)의 연구자를 동원해서 작업을 했다. 우선 교합소(校合所)를 세 곳에 마련했다.

제일 교합소는 도쿄.시바(芝)의 조우죠우지(增上寺)에 설치해, 여기서 고려(高麗)판.송(宋)판.원(元)판.명(明)판의 교합을 했다. 제2 교합소는 도쿄 우에노(上野)의 제실박물관(帝室博物館)(현재의 국립박물관)에 설치해, 나라(奈良)의 정창원(正倉院)에 보존되고 있는 성어장(聖語藏)이라는 덴표우시대(天平時代, 8세기)의 사본의 교합을 했다. 제3 교합소는 도쿄의 궁내청도서료(宮內聽圖書寮)에 설치해, 쿄토의 토우젠지(東禪寺)에 전래하는 송판의 교합을 했다. 그 외 가점 및 원어주(加點及原語註), 편찬배인(編纂排印), 편집색인(編集索引), 돈황사경교합(敦煌寫經校合), 지온인댄표사경교합(知恩院天平寫經校合), 코우야산고려장고교합(高野山高麗藏校合) 등의 직무를 마련해 준지로오는 편집 겸 발행자로 취임했다.

당초 1923년에 제1권을 출판할 예정이었지만, 동년에 일어난 관동대지진이나 화재등에 의해 작업이 중단해야 했다. 그러나 곤란을 넘어서, 1924년에 제1권 아함부 상권(阿含部上卷)을 간행한 것을 시작으로, 1934년까지 정장(正藏:인도,중국,한국 찬술문헌) 55권, 속장(續藏:일본 찬술문헌) 30권, 도상(圖像)12권, 목록 3권의 전 100권을 완성했다. 그는 〈타이쇼장경〉의 판매 영업면을 담당한 다이조출판(大藏出版)주식회사(현재도 존속)의 설립 및 경영의 중심이나 되어, 그야말로 〈타이쇼장경〉의 기획, 편집, 경영의 모두에 걸쳐 총람했다.

준지로오는 〈타이쇼 장경〉의 특색을 다음의 5항목으로 정리했다. 첫째 모든 대장경이나 고사본을 엄밀하게 교합하는 것, 둘째 질서를 가지고 배열하는 것, 셋째 당시까지 알려져 있던 범문과 한문의 대조를 나타내는 것, 넷째 목록과 색인을 만들어 이용이 편리를 도모하는 것, 여섯째 휴대에 편리하고 또 가격을 싸게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준지로오는 〈타이쇼 장경〉 완성 1년 전에 파리어 성전의 일본어 번역인 〈국역남전대장경(國譯南傳大藏經)〉의 간행을 계획했다. 그 목적은 첫째 불교를 이해하고자 할 경우 〈타이쇼 장경〉에 수록된 한역불전(漢譯佛典)만으로는 불충분하고, 남방불교의 원전을 참조해야 하는 것. 둘째 종래 남방불교를 소승불교라고 비방해 온 잘못을 바로잡는 것. 셋째 남전의 불전이 한문 불전보다 인간으로서의 불타를 그려내고 있는 것, 넷째 한문이 아니고 국역이라는 스타일이 대중 교화에 도움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는 감수를 맡았고 45명의 번역분담자와 함께 작업을 해서 1935년(70세)에 제1권을 보내, 1941년(76세)에 전65권을 완결했다. 또 도쿄제국대학 불교청년회에 〈남전불교 강좌〉를 개최해, 남방불교 지식의 보급에 힘썼다. 그 외 준지로오는 1922년부터 1924년에 걸쳐 고대 인도의 종교서인 〈우파니샤드〉를 번역, 간행하는 작업도 했다.

이러한 〈타이쇼장경〉, 〈남전대장경〉등의 편찬.번역은, 그 결과가 일본의 인도학.불교학에 공헌할 뿐만 아니라, 제작 과정에서 제자를 양성할 수 있는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준지로오의 지도를 받은 주요한 인물로 기무라 다이켄(木村泰賢), 우이 하쿠주(宇井伯壽), 히가타 류우쇼우(干潟龍祥), 가나쿠라 엔쇼우(金倉圓照), 나가이 마코토(長井眞琴), 미야모토 쇼우손(宮本正尊) 등 그 후의 일본의 인도학.불교의 석학이 많이 있다.

또 준지로오는 불교를 번창하게 하려면 , 우선 여성 교육에 힘을 실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1924년에는 도쿄.츠키지(築地)의 혼간지(本願寺) 내에 무사시노 여자학원(武藏野女子學院)을 만들었고 1929년에는 키치죠우지(吉祥寺)에 토지를 구입해 이전했다. 이 학교는 현재에도 무사시노대학(武藏野大學)이란 이름으로 존속하고 있다. 또 학교와 함께, 여자불교청년회(女子佛敎靑年會)의 육성에 힘을 썼다. 그 신념은, 가정의 정화, 사회의 계도, 여성 교육의 완성은 불교부인에게 기대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운동의 기관지로서 〈아카트키(‘새벽’의 뜻)〉를 발행했다.

76세에 〈국역남전대장경〉의 간행을 끝낸 그는, 동년 불교학연구소인 나카야마 문화연구소(中山文化硏究所) 소장이 되어 계속 연구를 했다. 1945년 6월, 후지산(富士山) 산기슭의 낙산장(樂山莊)에서 세연을 다했다. 세수 80. 일생을 불교 연구에 바친 생애였다. 〈동양문화사에서의 불교의 지위〉 (1930), 〈동방의 빛으로서의 불교〉 (1934) 등 수많은 저서가 있다. 주요 저서를 수록한 전집도 출판됐다.

사토오 아츠시 일본 동양대학 동양학연구소 객원연구원



[불교신문 2234호/ 6월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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