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 한글화에 혼신…‘한국의 구마라집’

운허스님과 함께 필생의 역경사업

보물같은 ‘한글대장경’318권 완간

불교시문학 분야도 커다란 발자취



시인이자 한학자로 잘 알려진 월하(月下) 김달진(金達鎭)은 불교시문학의 거장으로 꼽힌다. 월하는 또 경전번역에 남다른 애정을 쏟았다. 출가자로, 교사로 삶을 살았던 그는 말년에 역경사업에 동참하면서 경전한글화 작업에 혼신의 힘을 기울인다. “부처님 가르침을 전하는 것이 소명이자 서원”이라고 했던 그는 입적하기 전까지 펜을 놓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그를 한국불교의 구마라집(鳩摩羅什. 343~413)이라고 부른다.



월하는 경남 창원군 웅동(현 진해시 소사동)에서 태어났다. 1920년 계광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중앙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에 병을 얻어 학교를 그만뒀다. 고향에서 휴양을 하던 그는 다시 서울 경신중학교에 진학했다. 그러나 4학년 때 일본인 영어선생 추방운동을 주동해 퇴학당했다. 창원으로 내려온 그는 모교인 계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곳에서 월하는 조선총독부에 의해 학교가 폐쇄될 때까지 약 7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쳤다. 일본에서 유학 중인 형이 도쿄(東京)로 유학 올 것을 권했지만 관심이 없었다. 대신 문학전집과 세계대사상전집 등을 읽으며 틈틈이 시작(詩作) 노트를 만들었다.

월하가 불교와 연을 맺은 것은 이 무렵이다. 그것은 찰나의 깨달음과 같았다. “찢어진 벽지 사이의 초벌 신문지에서 뚜렷이 보이는 ‘불(佛)’자를 발견한 나는 섬광처럼 마음속의 무엇인가에 강렬한 자극을 받았다(‘나의 인생, 나의 불교’〈불교사상〉. 1984.6).” 기독교 계통의 학교에서 일하면서 교회에 다녔던 그가 불교에 귀의하는 순간이었다.

1933년 늦가을, 출가를 결심하고 집을 나왔다. 심부름 가서 받은 소작료를 여비삼아 금강산 유점사로 향했다. 이듬해 부처님오신날에 월하는 유점사 주지 운악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나는 오늘 그리도 애지중지하던 머리를 깎아버렸다. 구렁이 같이 흉스러운 내 자신의 집착에 대한 반발이었다. 그리고 장삼을 입고 합장해보았다. 외양의 단정은 내심의 정제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겸손과 하심 - 얼마나 평안하고 화평한 심경인가. 높고 아름다운 덕이다(〈산거일기〉 문학동네. 1998).”

그 해 여름 유점사에서 변설호스님에게 〈능엄경〉 강의를 들었다. 1935년에는 용성스님(1863~1940)이 창립한 항일불교단체인 대각교가 운영하는 함양 화과원(華果院)으로 갔다. 이곳에서 그는 반선반농(半禪半農) 수행을 하며 용성스님이 번역한 〈화엄경〉 윤문작업에 동참했다. 농사짓고 참선하며 지내던 어느 날, 문득 말없이 떠나왔던 가족들이 생각났다. 아무리 참선을 해도 마음의 평정을 찾을 수 없어 고향으로 갔다. 그러나 월하를 기다리는 것은 병석에 누워있는 아내였다. 그가 고향에 돌아온 지 하루 만에 그녀가 세상을 떠났다. 무상(無常)의 가르침을 배운 그였지만 아내의 죽음은 충격과 슬픔을 줬다. 조선일보(1936.2)에 발표한 시 ‘낙월(落月)’에는 아내를 잃은 그의 슬픔이 담겨있다.

화과원에 돌아온 그는 더욱 수행에 매진했다. 은사인 운악스님이 보낸 “공비생(公費生)으로 불교전문학교에 입학하라”는 편지를 받고, 1936년 4월 불전에 입학해 체계적인 교육을 받는다. 여기서 그는 서정주(1915~2000)와 시조시인 김어수(1909~1985) 등을 만나 교우했다. 또 서정주.김동리(1913~1955).오장환(1918~1948) 등과 ‘시인부락(詩人部落)’ 동인으로 활동하며 창간호(1936.11)에 ‘황혼’ 등을 게재하는 등 창작에도 매진한다. 월하는 3년간의 전문학교 시절을 떠올리며 “나에게 정신적, 학문적으로 뿐만 아니라 문학적으로 많은 교우관계를 갖게 했다”고 회상했다. 이 즈음 그는 첫 시집 〈청시(靑枾)〉를 발간했다.

학교를 마치고 유점사로 돌아온 그는 4년간 전국의 70여 사찰을 두루 다니며 강론했다. 이 때문인지 왜경의 감시가 심해졌다. 이들의 시찰을 피해 1941년 만주 북간도에 있는 대각교 농장을 찾아갔다. 이곳에서 잡지 〈싹〉을 발간하고 있던 소설가 안수길을 만나 〈싹〉에 ‘용정’ ‘뜰’ ‘향수’ 등 5편의 시를 발표했다.

용성스님 입적 후 대각교 농장은 어려움에 직면하고, 월하는 북간도 생활 1년 만에 금강산으로 돌아왔다. 유점사에서 해방을 맞았다. 광복 직후 그는 산을 내려와 서울로 갔다. 춘원 이광수의 소개로 동아일보에 입사했다. 문화부 기자로 일하면서 청년문학가협회 부회장직도 맡았다. 그러나 오랜 시간 세속을 멀리했던 그에게 기자는 맞지 않는 옷이었다. 1948년 대구로 내려가 경북여자중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49년 진해중학교로 자리를 옮긴 월하는 1962년까지 학생들을 지도했다.

교직생활을 하면서 간간히 동양의 고전을 번역해 출간했다. 퇴직 후 〈한산시〉(법보원. 1962)를 발간한 것을 계기로 그는 인생의 전기를 맞는다. 바로 운허스님(1892~1980)과의 만남이다. 〈한산시(寒山詩)〉는 중국 당나라 때 ‘문수보살의 재현’이라 불렸던 한산이란 사람이 쓴 선시(禪詩). 이 책을 읽고 남양주 봉선사 주지이자 역경원장이었던 운허스님이 월하를 찾아왔다. 스님은 그에게 역경에 동참해줄 것을 권했다. 동국대학교 역경원으로 간 그는 고려대장경 역경사업에 뛰어들어 임종 직전인 1989년까지 대장경 번역을 계속했다. ‘월하’라는 당호도 이 때 운허스님이 지어준 것이다.
사진설명: 운허스님(왼쪽)과 월하

그에게 있어 역경은 삶의 전부였다. “나름대로 정성과 심혈을 기울인 것은 사실이지만 부처님의 본 뜻을 얼마나 정확히 전했는지 두려움이 앞선다”며 언제나 조심스럽게 경전을 한역했다. 그의 일상은 늘 같았다. 새벽5시에 일어나 참선한 뒤 2~3시간 동안 작업을 한다. 아침공양 후 오전 내내 책상에 앉아있다. 20여 년간 매일 20~30매를 번역했는데, 그가 번역한 경전분량은 200자 원고지 15만 여장으로 추산된다. 이 모두가 〈한글대장경〉 속에 들어있다. 이와 함께 〈장자〉(현암사. 1965) 〈법구경〉(현암사. 1965)를 번역해 출간하고 〈백운화상어록〉 〈태고집〉 〈대각국사집〉 〈보조국사법어〉 등을 한역해 세상에 내놓았다. 그가 있어 많은 고문(古文)들이 세상에 알려졌다. 입적하기 전까지 월하는 〈보조국사전서〉(고려원. 1988) 〈붓다차리타〉(고려원. 1988) 등을 출간했다. 역경작업을 하면서 한동안 쓰지 않았던 시도 썼다. 등단 50년 만인 1983년 시전집 〈올빼미의 노래〉를 발표해 건재함을 과시했다.

월하가 82세로 삶을 마감한 후, 그를 추모하는 움직임은 계속 됐다. 그를 도와 선시를 번역했던 막내 사위 최동호 교수(고려대 국문과)와 마산 진해 창원의 시인들이 주축이 돼 1990년 김달진문학상을 제정, 매년 9월 시인과 평론가 각각 1명을 시상하고 있다. 올해로 16회를 맞는 문학상은 처음에는 시 부문만 시상하다가 1998년부터 평론부문이 추가됐다. 이와 함께 매년 6월 문학상 기념 시낭송회를 연다. 경남 진해시는 1999년부터 매년 가을 김달진 문학제를 개최해 월하의 문학과 삶을 기린다. 올해는 10월8~9일 이틀간 진행되며, 월하 백일장, 청소년 시낭송회 및 ‘김달진의 삶과 문학’을 주제로 심포지엄을 개최한다. 진해시는 또 2004년 학계와 문학계 대표 14명으로 구성된 ‘김달진 선생 생가복원 추진위원회’를 발족하고, 진해시 소사동 48번지 일대에 생가를 복원했다. 현재 유물전시관이 건립 중이며 올 연말 완공된다.

월하는 “보시는 보시를 잊어서 무루(無漏)의 보시가 되고, 자비는 자비를 잊어서 큰 자비가 된다. 종교는 종교를 잊어서 진정한 종교가 되고 시는 시를 잊어서 영감의 시가 되고, 나는 나를 잊어서 비로소 온전한 나가 된다”고 말했다. 자신의 이름을 감추고 20년을 하루같이 경전을 한역했던 월하의 삶 자체가 무루의 보시가 아닐 수 없다. 그는 고인이 됐지만 그가 열정을 쏟아 부었던 〈한글대장경〉은 318권으로 완간돼 사람들 곁에 남았다.

어현경 기자 eonaldo@ibulgyo.com



● 월하의 불교사상과 시

선불교적 즉관의 세계 詩로 표현

우주가 ‘나’와 하나…연기론 짙어



월하는 1929년 〈문예공론〉에 시 ‘잡영수곡(雜泳數曲)’으로 등단했다. 불교전문학교 시절 서정주.오장환.김동리 등과 함께 ‘시인부락’ 동인활동을 했고, 1940년 첫 시집인 〈청사〉를 세상에 선보였다. 1947년에는 대구에서 창간된 ‘죽순(竹筍)’ 동인으로 활동하다가 이후 문단에서 잠적했다. 등단 50여년 만인 1983년 시 전집 〈올빼미의 노래〉를 간행돼 그의 시가 재조명됐다. 그러나 월하는 오랫동안 우리 문학사에서 소외돼왔다. 이는 그가 시업보다는 번역에 더 충실했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가 남긴 시작품은 “직관적인 언어로 예리하게 사물을 표현해내고, 자신만의 독특한 시세계를 은밀하게 구축하고 있다(신소영 ‘해방기 전통서정시 연구’)”고 평가받는다.

최동호 고려대 교수는 “월하선생의 시적 전개는 샘물(1938)과 청시(1941), 벌레(1947), 씬냉이꽃(1990) 등 네 편의 시로 집약될 수 있다”고 말한다. “숲속의 샘물을 들여다보다/ 물속에 구름이 있고 흰 구름이/ 떠가고 바람이 지나가고/ 조그만 샘물은 바다같이 넓어진다/ 나는 조그만 샘물을 들여다보며/ 동그란 지구의 섬 우에 앉았다(샘물 전문)” 최 교수는 “화자의 자의식이 샘물을 들여다보며 우주적으로 확대된다”고 봤다. 천지만물이 ‘나’와 하나이며 우주와 ‘나’도 하나라는 연기론을 보여준 것. 최 교수는 또 어떤 인공의 힘도 가하지 않고 무위자연의 세계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은 노장의 자연사상인 동시에 선불교의 자연직관으로 통하는 첩경”이라고 덧붙였다. 시인 오탁번은 “너무 단순해 소품의 동시 같지만, 자세히 관찰해보면 자아와 우주의 관계가 조밀하게 다루어져 있다”며 “한국 시사(詩史)에서 이처럼 인간이 어떤 것에 집중할 때 느끼는 절대순수, 절대고독의 상태를 순박한 말로 표현한 시는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30년 뒤 월하는 한 마리 벌레로 변신한다. “고인 물 밑/ 해금 속에/ 꼬물거리는 빨간/ 실낱같은 벌레를 들여다보며/ 머리 위/ 등뒤의/ 나를 바라보는 어떤 큰 눈을 생각하다가/ 나는 그만/ 그 실낱같은 빨간 벌레가 된다.(벌레 전문)” 김동리는 이 시를 두고 “불교사상이 꽤 짙게 깔려있지만, 그와 동시에 즉관(卽觀)하는 모든 자연, 모든 사물 속에 직감하는 우주의식의 일단도 되는 것”으로 보았다. 신상철 경남대 명예교수는 ‘김달진의 작품세계’를 통해 “‘어떤 큰 눈’ 앞에서 벌레나 화자는 동류가 된다”며 “이런 정서는 제행무상과 맥이 닿는데 월하선생은 그런 빛과 내음을 최대한 억제해 순수시의 영역을 지켜냈다”고 평가했다.

문학평론가 김윤식은 ‘시와 종교의 길목 - 월하 김달진의 경우’에서 “김달진의 평생에 걸친 시작행위란 ‘마음’의 끝을 따라가기에 다름 아닌 것”이라고 분석했다. “하이얗게 쌓은 눈 우에/ 빨간 피 한 방울 떨어뜨려보고 싶다/ -속속드리 스미어드는 마음이 보고 싶다(눈 전문)” 김윤식은 또 “정치 이데올로기와 문학 사이에서, 교육과 문학사이, 종교와 문학 사이를 오고가며 시를 쓴 것도 오직 이 ‘마음’을 찾기 위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결국 월하는 자신의 평생 화두였던 ‘마음’의 끝자락을 잡았다. 산책길에서 문득 발견한 씬냉이꽃 한 송이 속에서 우주를 깨닫는 경지를 보여준 것. “사람들 모두/ 산으로 바다로/ 신록철 놀이 간다 야단들인데/ 나는 혼자 뜰 앞을 거닐다가/ 그늘 밑의 조그만 씬냉이꽃 보았다./ 이 우주/ 여기에/ 지금/ 씬냉이꽃 되고/ 나비 날은다. (씬냉이꽃 전문)” 김재홍 경희대 교수는 “소아(小我)적인 관점에서 우주적인 관점을 획득함으로써 자연과 완전한 조화 또는 우주와의 교감을 성취했다”며 “이런 경지가 지락(至樂)이며, 도의 발견이고 허심(虛心)의 완성”이라고 표현했다. 결국 월하에게 있어 시는 삶이었고 깨달음의 과정이었다.

어현경 기자 eonaldo@ibulgyo.com



[불교신문 2147호/ 7월2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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