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중심, 곧 中原은 漢族이 살던 곳이다. 그러나, 중국의 역사는 북위.요.금.원.청 등 중원을 지배한 異民族 국가들의 이름을 전하고 있다. 한족이갖고 있는 中華意識은 이민족을 "오랑캐"로 부르기를 서슴치 않았다. 거란족이 세웠던 요(遼, 907~1125)역시 "오랑캐의 나라"로 치부되었음은 물론이다.그같은 의식을 우리 역시 은연 중에 지니고 있었던 탓일까, 고려를 침입한원죄 때문일까, "東夷"로 불렸던 우리도 요나라를 "오랑캐"로 불렀다. 그 결과 요는 우리의 중국사 이해로부터 소외되었던 것이다. 이제 요나라의 문화와 불교를 새롭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이민족에 짓눌린 한족의 상처받은 자 존심을 포용하면서도, 이민족 나름의문화적 자존심을 세워나가야 했던 것이 요나라의 입장이었다. 바로 이같은문제를 해결하는 데 불교가 필요하였으므 로 요나라는 불교를 국교로 삼았다.그같은 입장은 "천하를 평정하는 데는 힘으로써 했으나, 천하를 지키는데는 글로써 한다"는 말 속에 분명히 나타 나 있는 것이다.물론 요나라가불교를 국교로 삼게 된 내면적 동기는 정치적 인 데에 있었으나, 불교는 그렇게 선택됨으로써 불교가 갖고 있는 보편성이 널리 드러나게 되었음도 사실이다.불교는 중국의 종교가 아니다, 불교는 민 족을 초월한 가르침이며, 계급의평등을 내세우는 가르침이라는 선언이다.이러한 선언을 통하여, 요나라는 불교로써 한족이 갖고 있었던 유교적 화이 관을 일거에 붕괴시키고자 하였다.이 점에서, 필자는 요나라 지도자들의 불교 이해는 정확하였으며, 그만큼 역사를 진보시킨 것으로 평가하고 싶다.역대의 제왕들이 불교를 숭신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특히, 성종.흥종.도종이 다스릴 때(982~1100)는 가히 요나라 불교의 전성시대였던 것이 다. 성종은 라이벌 北宋의 眞宗 황제가 죽자, 그를 위해 민충사에서 명복을 기원하는 등 불교도로서의 관용의 미덕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흥종은 "불법 을 더욱 존중하여 스님들 가운데 三公.三師 및 政事令에 임명되는 자가 대개 스무명이나 되었으니, 귀족들이 소망하여 아들과 딸을 僧尼로 삼는 자가 많 았다"고 <거란국지>는 전하고 있다. 道宗은 스스로 화엄과 범어에 정통하였 으며, 고려의 대각국사 의천과도 교류하였다.의천으로부터 원효의 저술을 받아서 읽고 있었을 정도였으니, 불교에 대한 후원의 정도가 어떠했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요의 민족구성은 거란족.한족.발해 등 매우 다양하였다. 그 중에서도 요나라 불교를이해하는 데는 한족의 신앙생활을 살펴야 한다. 거란족 지배하의 한족에게는 불교를 믿는 또다른 이유가 있었다.거란족 지배하의 한족은 요나라의 사민정책에 따라서 고향을 떠나 북방 의변경으로 강제적 이주를 하기도 했다. 그렇지 않고 고향에서 살 수 있었 다하더라도 이민족 지배하 민족의 삶이 결코 행복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그런 그들 역시 불교를 믿음으로써 정신적 위안을 얻고, 불교를 중심으로단 결할 수 있었던 것이다.후당의 하동절도사 석경당이 요의 도움으로 후당을 멸망시키고 후진의 황제로 즉위하자 연운 16주를 요에게 바친 일이 있었다.그곳에 살던 한족들의불교에 대한 신앙심은 더욱 투철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널리 성행하게 된 것이 千人邑會라는 결사조직이다.읍회는 "주 로 강제적으로 혹은 자발적으로 거란에 들어간 漢僧의 문화사업을 중심으로 하여 전개된 불교 서민화운동을 규명하는 것을 주안으로 하고, 신자의 정신 적 유대와 계몽 및 사원유지의 경제적 후원기관"이었다. 이러한 천인읍회는 그 주된 사업에 따라서 "供塔泣"."供燈泣"."念佛邑"등으로불리웠다.이러한 천인읍회에 대하여 두가지 의혹이 있을 수 있겠다. 첫째는 그 별명이 불사를 중심으로 붙여져 있음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성격이 외형적 불사중심이 아니었던가 하는 점이다.그러나, 오히려 불사에의 동참은 자연적인 것 으로 이해되며, 보다 중요한것은 이들 읍회를 중심으로 한족이 친목을 도모 하며 신앙생활을 통해 거란족 지배의 아픔을 함께 이겨내고자 함에 있었던 것이다. 둘째는 불사 중심이라면 자연히 부유층이 중심이 아니었을까 하는 점이다.그러나, 실제 천인읍회에 참여한 사람들은 지도적 한족 출신의 승려 외에는 여인.상인.농부 등이 평등하게 참여하였던 것으로서 "부유층의 독점 이나그들의 신심과시나 유한적 사교기관과는 판이한 성격"을 지닌 것으로 평가된다. 천인읍회는 금나라 불교에서도 볼 수 있게 된다.어느 나라 불교에서나 심오한 교리 중심의 불교와 서민층의 대중화된 불교의 이중적 모습은 함께 했던 것같다. 요 역시 서민층을 중심으로 해서는 거란족 고유신앙인 샤마니즘도 행해지고 있었으며, 그 결과 샤마니즘과 융합된 불교 의 모습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이에 대해서는 앞으로의 자세한 연구를 기다리고, 여기서는 요나라의 교리중심 불교가 어떤 특성을 보여주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요나라 불교사에서 가장 특기할 만한 일은 대장경의 조성이 다. 이른바 "거란대장경"이 그것이다.약 30년 동안에 이루어진 것으로서, 전체 5천48권이다. 고려시대 의천은 "속장경"을 조성할 때 이 "거란대장경" 을 저본 혹은 교본으로 삼았음은 주지하는 바이다. 覺苑.非濁.法均 등이 중 심이 돼 "거란대장경"을 만들었으나그 이전에 이미 希麟은 <속일체경음의> 를, 行均은 <龍龕手鑑>을 지어서대장경 조성의 준비작업을 진행시켰던 것이다.이 불사에도 "송판대장경"에 대항하고자 하는 거란족의 문화적 자존심이그 이면에 깔려있었던 것이다.이와 함께 특기할 것은 방산 운거사의 "석각대 장경"이다. 수나라 때 靜玩에 의해서 최초로 시작된 "석각대장경"은 당.오대 의 약 300년 동안 그 조성이 중지되었으나, 다시 요나라에 들어와서속각되 었던 것이다.이는 운거사 사주 겸풍을 중심으로 하고, 천인읍회의 후원이 있었던 것이다.기타 요나라 불교의 사상사적 특성은 다음과 같다. 첫째 <육 조단경>과<보림전>의 焚書에서 알 수 있듯이 남종선은 배척되었으나, <도서 >가 성행한 것으로 보아서 하택선만은 긍정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둘째 거 란족출신의 유일한 고승이 바로 율사였던 것처럼, 계율중시의 불교였다.셋 째 밀교가 널리 성행하였다. 특히 도액의 <현밀원통성불심요집>이 주장하는 것처럼 현교인 화엄과 밀교의 다라니를 함께 닦자는 입장을 취하고있었다.이 중에 관심을 끄는 부분은 셋째, 顯密雙修이다. 그같은 가풍은 우리 불교에도 큰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현재 독송용 <천수경>속 에는 준제4대주를 함께 지송토록 되어 있는데, 그같은 가풍은 <현밀원통성불 심요집>에서 처음 나타나기 때문이다.결론적으로 요나라는 비록 이민족의 국 가였으나 불교문화를 꽃피운 불교국가였던 것이다.앞으로 요나라 불교의 모 습, 특히 고려불교와의 관계 등이 더욱 세말하게연구되어야 할 것이다.김호성<동국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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