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경훈 동국대 역경원 편찬부장(60)은 [한글대장경]간행에 혼신을 ||다해왔다.64년 역경위원에 위촉되고,68년부터 오늘에 이르도록 ||편찬부장직을 고수해온 그의 외길 30년은 바로 역경원의 역사이며 ||한글대장경의 간행史이다.2월 28일로 정년을 맞는 박경은 거사의 ||발자취를 통해 한글대장경 간행 30년사와 함께 역경불사의 현주소와 ||그 방향을 조명해 본다. |+------------------------------------------------------------------+동국대학교 캠퍼스내의 한적한 곳에 자리한 허름한 일본식 집. 그 집이동국대 역경원이다.조명이 밝지 않은 2평 남짓한 편찬부장실. 대장경.책상.쇼파등에는 박부장의 숨결과 손때가 스며 있는 듯 모두 묵은 살림이다.-팔만대장경을 한글화하는 역경은 종단 3대사업의 하나입니다. 역경원창립당시부터 한글대장경 간행에 동참하여 30년간 이 막중한 불사를주도해 오셨는데 이제자리를 떠나시면서 감회가 깊으시겠습니다.*그 소감은 집사람에게 물어봐야할 것입니다. 우리집에서는 나보고"이 일 안했으면 어떠했을까"라면서 늘 부처님께 감사했습니다. "부처님일하는 사람이 뭘 그러느냐"는 아내의 말이나를 지켜줬어요.30년 세월이섬광같이 흘러갔으나 역사적인 대작불사에 동참했다고 생각하면 뿌듯합니다.-역경원에 첫발을 딛게된 인연은....*64년 역경위원으로 위촉됐는데요, 당시는 동국대 역경원이 아니고종단 3대사업 기구의 하나였으므로 종정 효봉스님으로부터 위촉장을받았습니다.-그무렵 불교신문 전신인 [대한불교]편집국장이셨죠. 역경원 성립배경과과정을 좀 말씀해 주세요.*종단에서는 포교.교육과 함께 역경사업을 3대사업으로 정하고 62년12월 역경위원회를 결성했습니다. 耘虛스님이 위원장이셨고, 昔珠스님이부위원장이셨죠.63년 1차 역경위원을 위촉하고 64년 6월에 2차로 역경위원을 보강했습니다.총무원은 63년 역경예산으로 3백만원을 설정 했으나 실제로집행된 금액은 1백50만원이었습니다.당시 교계에서는 석주스님이 선학원에서 법보원을 열어 [열반경]등을번역하다가 역경원이 생기면서 두곳에서 할 필요가 없다고 모든 일을넘겼습니다.총무원이 빚으로 살때이므로 출발하면서부터 경제적으로어려웠어요.5.16혁명후 정부는 고전국역사업에 역점을두고 세종대왕기념사업회와민족문화추진회를 만들어 적극 지원했습니다.우리도 국고보조를 받으려고동분서주했는데 그 조건이 법인이어야 했습니다.난감해 하던차 당시 동국대 총장인 凡山김법린선생이 대학이 법인이니까동국대 부설로 두자고 제의했어요. 그래서 65년 7월21일 지금의 사범대학자리에서 현판식을 갖고 공식 출범했습니다.-초대 역경원장은 운허스님이셨죠.*일체감 형성을 위해서 역경위원장이 역경원장을 겸임키로 했습니다.-겸임이라면 역경위원회와 역경원이 별개의 조직인가요.*二元조직이죠. 역경위원회에서는 번역.증의.윤문.원고작성을, 역경원에서는 출판.보급에 주력합니다.-지난해 가을 월운스님이 역경원장에 부임하셨는데 그동안 몇분의원장을 모셨습니까.*운허, 영암, 자운스님등 4분을 모셨습니다.-현재 역경위원은 몇명입니까.*90명입니다.-한글대장경의 첫권은 언제 나왔나요.*65년에 잡아함경이 첫 선을 보였습니다.-국고보조를 받으면서 역경사업은 순조로웠습니까.*1년에 1천3백만원씩 지원받는 가운데 72년까지 매년 8책씩 간행했으나판매가 어려웠습니다. 조명기 총장시절 동양출판사에 위탁운영 했는데이때 운허스님은 역경원장을 사임했어요.김동익총장이 역경원을 다시찾으려하자 동양출판사가 보상을 요구, 재판이 시작됐는데 그 와중에68년 11월 제가 편찬부장으로 부임했습니다.-국고보조가 일시 중단된 때도 있었지요.*3년간 지원되다가 특정종교 성전번역을 정부가 돕느냐는 일부항의가있어서 주춤했으나 민족적사업임을 역설,77년까지 국고지원을받았습니다.그때 5년만 밀어주면 독자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재단을 만들겠다고약속했어요. 운허스님이 법인설립의 필요성을 절감, 원을 세우셨습니다.-어려운 고비를 많이 넘기셨군요.*석유파동으로 물가는 오르고 보급이 부진해 사업을 감당 못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국고보조를 받으므로 약속한 책수를 안 만들 수없었지요. 학교에서는 재정이 어려우니 나가달라고 하고, 우리는걸음마라도 배우면나가겠다고 사정했어요. 종회때면 한글대장경을 팔아달라고 호소할 정도였습니다.-힘든 가운데 기쁘고 보람스러울때도 있으셨을 텐데요.*황수영총장 시절 법인체인 [동국역경사업진흥회]를 발족했을때, 역경사업의 지속을 위한 유지재단을 원하셨던 운허스님의 遺志를 이제이루었구나 싶더군요.방배동에 건물도 마련했는데, 해산하면 재산은역경원으로 귀속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현재 이사장은 석주스님이십니다.오늘의 역경원은 68년 김동익총장때 다시원장직을 맡으신 운허스님의원력이 아니면 아마 어려웠을 겁니다.2년전 국고지원을 다시 받아 보려고하는데 종단 협조가 없음이 문제로 대두되자 총무원장 義玄스님이5천만원을 선뜻 내놓았습니다. 종단적 차원의 역경사업 배려는 처음이므로 너무 감사했습니다.-금년부터 국고지원을 다시 받게 되셨죠.*김영삼대통령의 공약이행 차원에서 결정됐는데요. 금년부터 4년간 매년3억5백만원씩 지원 받습니다.-정년을 앞두고 국고지원을 다시 받기위해 애쓰셨는데, 한글대장경은몇년도에 완간됩니까.*93년까지 1백36책이 나왔으니까 앞으로 97년까지 매년 26책씩 1백4책을펴내고, 여기에 한국고승저술 10책을 더해 총2백50책으로 마무리 하게됩니다.-불교계는 물론 국가적 차원에서도 방대하고 거룩한 불사인데요, 대장경역경의 중요성은 어디에 있습니까.*시대에 대응하는 언어로 부처님 말씀을 전하는데 있다고 봅니다.사회가 급변하면서 사유와 언어도 달라지므로 부처님 가르침을 제대로전하려면 새로운 번역이 계속돼야 합니다. 오늘의 한글대장경도 얼마안가고전이 될테니까요.부처님의 말씀을 오늘의 언어로 풀어내는 작업은 한글세대에게 부처님이 누구이며 무슨말을 했나 일러주면서, 전문화되고 있는사회에서 자기를 응시할 수 자리를 제공하는 불교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새로운 번역과 지속사업을 강조하셨는데, 한글대장경을 붉은 표지에서검은 표지로 바꾸면서장정을 변경하고 經名중심으로 새롭게 펴내는이유도 바로 대중과의 교감때문이신가요.*그렇죠. 예를 들어 아함부, 본연부하니까 자기가 찾으려는 經을 쉽게못찾아요. 앞으로 신세대 독자를 위해 횡조로 조판하고 활자도 키워야할 것입니다.-현재 역경사업의 문제점과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 주시죠.*보다 나은 발전을 위해 축적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까지는 그렇지못했습니다. 바람직한 역경을 위해서는 사상.교리등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불교학자를 비롯 국어학자, 작가, 시인, 사회학자등 많은 인력이한 회상에 모여야 합니다. 초기에는 용어심의 위원회를 구성, 최현배이숭녕씨등 당대의 국어학자들이 참여했어요.팔만대장경 역경은 불자들의전유물이 아니거든요.그리고 어린이, 청소년등 계층별로 읽을 수 있는대장경도 나와야 합니다.-한글대장경 외에도 고려대장경 영인, 문고본 현대불교신서, 단행본간행등 많은 일을 하신 줄 알고 있습니다.*고려대장경 영인작업을 할때는 많지않은 역경원 식구들이 장정등 소가죽을 사다가 손수 재단했어요. 경비절감을 위해서 였죠.영인본을 이선근총장이 박정희대통령에게 가져갔는데 그자리에서 박대통령이 쉬운 불서를요구했습니다. 李총장은 그 요구에 [문고본을 만들겠다]고 대답, 경전주석서 계획이 문고본 신서 1백권간행으로 바뀌었습니다. 신서는 현재82권까지 나왔습니다.-경전주석서 말씀을 하셨는데 역경원이 서둘러 해야할 일은 무엇일까요.*순서가 바뀌었지만 경전주석서를 펴내고, 한글대장경이 완간되면 색인,별책 해제본을 만들어 대장경을 이미 구입한 분에게도 배포해야되겠죠.월운스님 오신후 범어 한글표기사전 작업을 과감하게착수 했습니다.-북한에서 대장경 해제본이 들어왔는데요.*역경사업이 왜 국가적 차원의 작업인가를 다시 생각케 하는 계기가될 것이고 남북한 불교교류의 의미도 있다고 봅니다. 우리는 현재 간행된經마다 책머리에 해제가 붙어있는데, 북한 해제본은 우리것과 비교가안됩니다.-불교와는 어떻게 만나셨습니까.*원래 가톨릭집안이었어요.목포상업학교시절 혜화전문출신 국어선생님의영향으로 일본작가 武者小路實篤의 소설<유마경>에 심취했습니다.이 작가는 알려진 소설가인데 훗날 그분의 <조용한폭풍>(원제 [석가])를읽고 부처님 일대기를 써야겠다는 발원을 했습니다.-그래서 <조용한 폭풍>을 번역 하셨고 <부처님의 생애>를 쓰셨군요.그밖에도 저서가 여러권 있는줄 아는데요.*<석가의 생애와 사상>, <佛典>, <서산대사집>, <雪國>, <유마경>등역.저서가 있지만 부끄럽습니다.*문학을 하셔서 신춘문예에 당선되셨고 서울사대졸업후 출가도 하셨다는이야길 들었는데요.*56년인가 동아일보신춘 시부문에 입선했어요. [塔]이란 시였는데, 내가나를 보는 소리를 詩化했던 것 같습니다. 은사이신 금오스님이 내게[月塔]이란 법명을 주셨거든요. 입산은 처음부터 3년 시한부 였습니다.-성철스님과 아주 가까우셨다면서요.*부처님의 중생사랑이 큰 짝사랑이라고 볼때 그분은 짝사랑할 수 있는열정적인 가슴을 지니셨습니다.-편찬부장으로 부임해서 편찬부장으로 자리를 마무리하셨습니다.세속적으로 생각하면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앞으로 꼭 하실일과계획은?*살아왔듯이 살 것입니다. 역경위원으로 일하면서, 쓰고 싶은 충동이일면 破寂하면서 지내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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