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땅…悲願의 불교

사진설명: 3-4세기 건립된 세와키스투파는 카불에서 동남쪽으로 6km 떨어진 곳에 있다. 아프가니스탄 스투파의 전형을 보여주지만 훼손이 심하다.





















바미얀에서 카불로 돌아오는 길 역시 힘들었다. 한번 본 길이라 눈에는 익숙했지만, 그래도 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카불에 도착하니 오후5시. 거의 8시간 걸렸다. 마음은 부서진 대불에, 몸은 험한 길에 걸려 심신(心身)이 피곤했다. 미군의 검문을 거쳐 카불시내 들어오니 6시였다. 곧장 카불 동남쪽 6km 지점에 있는 유명한 세와키스투파로 향했다. 사진에서만 보던 탑을 참배한다고 생각하자 다시금 힘이 솟았다. 꼬불꼬불한 길을 돌아 세와키스투파에 다 달았다. 해는 이미 서산으로 지고 난 뒤였다. 시계방향으로 서서히 돌았다.

기원후 2세기 경 조성된 세와키스투파. 거의 2000년 전에 만들어진 탑이 아직 남아있다는 것이 신기했지만, 아무도 돌보지 않는 이슬람 땅에서 지금까지 살아남았다는 게 더욱 기적처럼 보였다. 탑 표면에 돌아가며 감실이 있었지만 불상은 없었다. 도굴꾼이 그랬는지 탑 뒤쪽에 커다란 구멍마저 뚫려있었다. 탑 내부에 무슨 보물이라도 있는 줄 알고 그렇게 한 것 같았다. ‘어디나 유물 도굴꾼은 있다’는 점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우리를 따라온, 근방에 살고 있는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뭐라고 설명했다.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어둠이 내리는 길을 지나 카불 시내로 돌아왔다. 파괴된 창문만 가득한 인터콘티넨탈호텔에 돌아오니 저녁 8시. 서둘러 허기진 배를 채우고 침대에 누워 카불과 아프가니스탄의 슬픈 역사를 생각했다. 카불하면 떠오르는 경전이 〈밀린다왕문경〉(나선비구경)이다. 기원전 3세기경 카불을 지배한 그리스계 왕이 메난드로스. 〈플루타크영웅전〉에도 메난드로스왕은 토론을 좋아했다고 적혀있을 정도로 그는 철학자들과 자주 이야기했다. 당시 카불엔 불교가 널리 퍼져 신봉되고 있었고, 토론을 좋아했던 왕은 대론자(對論者)를 찾았다. 마침 왕의 대론자로 고승 ‘나가세나’가 나타났고, 그리스사상과 불교사상 사이의 첫 대화가 이뤄졌다. 대론 장소가 지금의 카불이라고 한다. 메난드로스 왕과 나가세나스님 사이의 대화록이 바로 〈밀린다왕문경〉이다.

<아프가니스탄 위치도>
카불과 아프가니스탄은 이처럼 불교와 인연이 깊지만 역사는 그렇게 순탄하지 못했다. 파란과 곡절로 아로새겨진 중앙아시아 역사를 온 몸으로 보여주는 나라가 아프가니스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서교차로에 위치한 ‘지정학적 위치’가 큰 원인이었다. 이란고원의 북동부를 형성하는 아프가니스탄은 북쪽으로 아무다리야강에서 중앙아시아와 접하고, 동쪽으로 카이버고개를 기점으로 인더스강(江) 유역과 마주치며, 서쪽으로 헤라트에서 이란과 맞닿는다. 다시 말해 아프가니스탄에서 실크로드가 동서남북으로 갈라졌기에, 알렉산더도 이곳을 지나 인도로 침입했고, 징기스칸 역시 아프가니스탄을 가만 두지 않았다.

불교가 전해지기 전 아프가니스탄엔 ‘조로아스터교’가 유행했다. 발흐(아프가니스탄 북부에 있는 도시)를 중심으로 조로아스터교(敎)가 이란까지 퍼져나갔던 것은 기원전 6세기 이후의 일이며, 이 지방은 그 후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의 통치하에 들어갔다. 그러다 기원전 4세기 알렉산더에 정복당했으나, 알렉산더 사후(死後) 부장 셀레우코스가 통치했다. 셀레우코스는 기원전 322년 북인도를 통일한 마우리아 왕조 찬드라굽타(아쇼카왕 할아버지)와 협상 끝에, 아프가니스탄 동부를 찬드라굽타에게 양보하게 된다.

열강의 각축장으로 종교도 흥망성쇠 거듭

이후 박트리아의 디오도투스가 기원전 250년경 그리스계 독립왕국을 세우고, 비슷한 무렵 출현한 파르티아 왕국과 남서부의 세이스탄 및 아리아 지방을 두고 다퉜으나 패배했다. 박트리아 왕국은 기원전 175년 인도 펀잡지방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이 즈음 불교가 아프가니스탄에 전파된다. 그러나 박트리아는 북쪽의 대월지(大月氏), 서쪽의 파르티아·사카족(族)에게 차츰 압박받다, 기원전 1세기 쿠샨왕조 쿠줄라 카드피세스(1대왕)에 의해 멸망당하고 만다. 카불의 그리스계 왕조를 타도한 쿠줄라 카드피세스에 이어 3대왕으로 등극한 카니쉬카는 인도와 중앙아시아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했다. 카니쉬카 재위 당시 이 지역의 그리스문화가 불교문화와 결합, 유명한 ‘간다라 미술’이 탄생됐다고 학자들은 분석한다.

사진설명: 힌두쿠시산맥 속에 있는 백양나무 숲길을 가고 있는 아프가니스탄 사람들. 그들은 대단히 순박하고 우호적이었다.
쿠샨왕조도 3·4세기 ‘사산조 페르시아’와 ‘인도 굽타왕조’ 앞에서 힘을 잃고, 5세기엔 에프탈의 침입을 받았다. 쿠샨·에프탈 왕조에 의해 아프가니스탄이 통치(6세기)됐지만, 642년 아랍의 세력 확대에 따라 사산조 페르시아가 멸망하고, 671년경 대부분의 아프가니스탄 지방은 아랍지배에 편입된다. 주민들은 이 때부터 이슬람교를 믿게 됐다. 아바스왕조(820년), 이란계 사파르왕조(867년), 사만왕조(874년), 가즈니왕조(962년), 구르왕조(1187년), 흐와리즘샤왕조(1215년)로 이어지다, 1221년 몽고의 침입을 받았다.

근대에 와서도 아프가니스탄은 열강의 각축장이 됐다. 러시아 남하정책에 위협을 느낀 영국은 아프가니스탄을 자국의 세력 하에 두려고 했다. 결국 ‘도스트 무하마드’와 아들 ‘시르알리’ 때 영국은 제1차(1838~1842), 제2차(1878~1880) 아프간전쟁을 일으켰다. 결과 아프가니스탄 영토 일부가 인도에 할양됐다. 그러다 1905년 아프가니스탄은 영국의 보호국이 됐다. 그러던 1919년 제3차 아프간전쟁을 통해 아프가니스탄은 독립국으로 다시 탄생된다.

그런대로 역사를 유지해오던 아프가니스탄에 1973년 7월 자히르 샤 국왕의 외유 중 쿠데타가 발발, 모하마드 다우드 칸 전(前) 총리가 실권을 쥐고 공화제를 선언했다. 1978년 4월엔 공산세력에 의한 쿠데타가 일어나 타라키(Taraki) 정권이 수립됐으며, 1979년 9월엔 궁정쿠데타로 아민(Amin) 정권이 들어섰다. 같은 해 12월 기존정권 수호라는 명분 아래 소련군이 침공해 카르말 정권을 출범시켰다. 이후 1989년 2월 소련군 철수, 내전 격화, 1994년 탈레반 등장, 2001년 탈레반 붕괴, 2002년 카르자이정권 탄생 등으로 아프간 현대사는 숨 가쁘게 진행됐다.

사진설명: 잘랄라바드 부근에 있는 하다는 아프가니스탄 불교유적의 보고다. 현장스님의 <대당서역기>에 의하면 여기에 부처님 정골사리가 안치돼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승원과 스투파 유적의 잔해만이 평원의 찬바람을 맞고 있다.
다음날(2002년 4월28일). 카불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파키스탄으로 출발했다. 며칠 전 지나왔던 비포장도로를 달렸다. 머리를 수없이 차 천장에 부딪히며 잘랄라바드에 도착하니 오후2시. 점심도 굶고 곧바로 하다 유적지로 직행했다. 잘랄라바드 시내에서 동남쪽으로 1시간 정도 달리니 유적지가 나왔다. 유적지라고 해봐야 대단한 것은 아니고, 흙으로 조성한 스투파와 승원(僧院)유적이 남아있는 정도였다. 그나마 내전(內戰)으로 돌보는 사람도 없이 쓸쓸하게 흩어져 있었다. 한 때 부처님 정골 사리를 모신 스투파가 있어 ‘불정골성’(佛頂骨城)으로 유명했던 ‘하다’(Hadda)가 이제는 찾아오는 이 조차 드문 한적한 촌으로 변했다니, 믿기지 않았다. 전설에 의하면 ‘부처님이 보살일 당시 하다에서 연등불을 만나 장차 위대한 각자(覺者)가 되리라는 예언을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슐레이만 산맥에서 불어오는 찬 바람만 유적지 위를 휩쓸고 있다. 그 모습에 ‘무상(無常)의 진리’를 실감하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찬 바람을 얼굴과 온 몸으로 받으며 유적지에 올라, 그 옛날 성지였던 하다 일대를 둘러보니 만감(萬感)이 교차됐다. 중국 동진의 고승 법현스님(317~419. 399~412 인도 순례)도 하다를 찾았다. 〈불국기〉엔 이렇게 나온다. “혜라성에 이르렀다. 성내에는 불정골정사(佛頂骨精舍)가 있는데 금박과 칠보로 골고루 꾸며져 있었다. 왕국은 정골을 공경하고 중히 여겨 사람들에게 빼앗길 것을 두려워하여 나라 안의 호성(豪姓) 8인을 골라 각자에게 도장 하나씩을 갖게 하고 이 도장으로 봉인하여 수호시키고 있다. …(중략)…불정골은 황백색이며 방원(方圓)이 4촌이고 상부(上部)는 융기되어 있다.”

부처님 정골사리 스투파도 바람 속에 방치

당나라 현장스님(?~664. 629~645 인도 순례)의 〈대당서역기〉에도 하다는 나온다. “나게라갈국(현재의 잘랄라바드) 성의 동남쪽 30여리를 가다 보면 혜라성에 이르는데, 둘레가 4~5리에 이른다. 성안에 사는 사람들은 순하고 질박하며 올바른 믿음을 지니고 있다. 또한 다시 2층 누각이 있는데 용마루에는 그림이 그려져 있으며, 2층 안에는 칠보로 만들어진 작은 스투파가 있다. ‘여래의 정수리 뼈’(佛頂骨)가 안치되어 있다. 뼈의 둘레는 1척2촌이고 모공(毛孔)이 분명하게 보이며 황백색을 띠었다. 뼈는 보석함에 넣어져 스투파 안에 모셔져 있다.”

사진설명: 슐레이만산맥에서 불어오는 찬 바람만 유적 위에 가득했다. 그리곤 아무 것도 없었다.
법현스님과 현장스님이 인도대륙을 순례할 당시 까지만 해도 하다지역은 대단한 성지로 각광받았다. 혜초스님의 〈왕오천축국전〉엔 관련 기록이 없지만 그때에도 하다는 나름대로 성세(盛勢)를 간직하고 있었으리라. 그런데 지금 하다엔 흙더미만 남아있다. 유적지 위에서 바로 앞에 있는 스투파를 한 참 동안 바라보았다. 무너지고 부서지고, 내부는 휑하니 빈 그 모습이 마치 지금 아프가니스탄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바미얀도 그렇고, 하다도 그렇고, ‘과거의 영광은 바람에 날아가고 흩어진 유적만 찾아오는 이를 반길 뿐’이었다. 영고성쇠(榮枯盛衰)가 어쩔 수 없는 진리이기는 하지만 심하게 파괴된 유적지에 서니, ‘한탄’(恨歎) 이외 다른 말이 나오지 않았다.

다시 차를 타고 잘랄라바드를 거쳐 토르크함에 도착하니 오후5시. 아프가니스탄 세관을 통과하고 파키스탄 영내에 들어오니 안내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반갑게 악수하고, 마지막으로 아프가니스탄을 돌아보았다. 바미얀 계곡, 카불 시내, 잘랄라바드와 하다 등 3박4일간의 길고도 짧은 아프간 일정이 가슴 저리게 머리에 새겨졌다. 쇠망한 아프가니스탄 불교사에서 무엇인가 교훈을 얻어야만 한다는 생각도 동시에 들었다.
아프가니스탄=조병활 기자 bhcho@ibulgyo.com /사진 김형주 기자 cooljoo@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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