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각을 이루실 것이므로 파순을 항복시키리라”

삽화=T-co

새해 2023년이 시작과 함께 조선대장경 월인석보 간경(看經)이 시작되었다. 이 책을 왜 읽어야 할까. 월인석보하면 보통 이름만 알고 훈민정음으로 지은 어려운 책, 안 읽어도 인생살이에 전혀 지장없는 책이 아닌가. 하지만 월인석보는 누구라도 특히 대한민국에 태어난 사람이라면 읽지 않으면 다음 생에라도 후회할 책이다. 새해를 맞아 인생을 되돌아보고 계획을 세우시는가. 과연 나는 어디로 와서 어디쯤 서 있고 어디로 가는가, 어쩌다 철학적인 질문을 자신에게 하시는가. 그렇다면 월인석보를 읽으실 시절인연이 된 것이다. 이 책에는 우리처럼 생로병사와 희노애락에 웃고 우는 지극히 인간적인 사람들의 이야기들로 가득 차있기 때문이다. 각자의 깜냥껏 그 인생의 해답이 아는 만큼 보일 것이다. 과연 그럴까. 지금부터 확인해보자.

현전하는 스무권의 월인석보

월인석보는 현재 20권이 전하고 있다. 초간본 권 1, 2, 7, 8, 9, 10, 11, 12, 13, 14, 15, 17, 18, 19, 20, 23, 25와 중간본 권 4, 21, 22 등 총 20권이다.

이 중 월인석보 권4를 가지고 불교신문에 에세이로 쓰게 되었다. 그동안 필자가 월인석보 권1과 권2를 단행본으로 출간하고 그 다음 월인석보 권3은 전해지지 않지만 같은 내용으로 추정되는 석보상절 3권을 신문에 연재하였기 때문이다. 월인석보는 부처님의 일대기를 8장의 그림으로 그린 ‘팔상도’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도솔래의, 비람강생, 사문유관, 유성출가, 설산수도’를 거쳐 ‘수하항마’ 부분에 해당되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 중에서도 백미로 꼽을 만한 ‘마왕 파순의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펼쳐지고 있다. 월인석보 권4는 중간본으로 군데군데 책이 헤져서 글자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 부분의 판독은 은사이신 김영배(2010, 역주 월인석보 제4)선생의 업적에 힘입었다. 거듭 감사드린다. 또한 이 내용은 ‘석가보’의 한문 경전 내용과도 일치하여 함께 대조하며 읽어 나간다.

월인천강지곡 제67장 마왕 파순의 이야기

월인석보 권 4는 ‘월인천강지곡’ 67장부터 74장까지 8곡의 노래가 먼저 나오고 그 다음에 ‘석보상절’의 산문으로 그 노래 내용을 자세히 풀이하는 방식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는 신문연재 지면 상황을 고려하여 67장의 노래와 그 내용에 해당하는 석보상절을 이어서 배치하여 이해와 가독성을 높이기로 한다.

<월인천강지곡> 육십칠장

(구담이 장차) 정각을 이루실 것이므로 마궁에 방광하시어 파순을 항복시키리라.

(마왕) 파순이 꿈을 꾸고 신하와 의논하여 구담을 항복시키리라.

<석보상절>

구담 보살이 보리수 아래 앉아 계시며 헤아려 생각하셨다.

‘이제 무상정각을 이룰 것이다. 마왕 파순이 가장 높고 모지니 저 마왕을 오게 하여 먼저 항복하게 하고서 삼계의 중생을 제도하리라.’ 하셨다.

‘파순’은 마왕의 이름이니, 가장 모질다 하는 뜻이다. 부처님이 중생을 편안하게 하려 하시거든 가로 거치며(방해하며), 중이 부처의 법을 배우면 어떻게 해서든 어지럽혀 죄가 가장 크므로 모질다고 한 것이다. -월인석보의 ‘협주’

서른 여드레를 보리수를 보시며 도리를 생각하시니 천지가 진동하고 큰 광명을 펴시어 마왕궁을 가리셨다.

마왕 파순이 꿈을 □□□(꾸는데) 집이 어둡고 연못이 마르고 풍류 악기가 부숴지고 야차와 구반다의 머리빡이 뜰에 떨어지고 제천이 마왕의 말을 따르지 않고 배반하였다. 마왕이 깨어나 두려워하여 신하며 병마(兵馬)들을 모아 꿈 이야기를 말하고 의논하였다. “어떻게 하여야 저 구담 (보살)을 우리가 가서 항복시키려뇨.”

월인천강지곡 67장과 그 내용을 담은 석보상절의 내용을 읽어 보았다. 싯달타태자가 출가하여 구담보살이라 불리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정각을 이루기 직전의 석가모니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때 구담의 가장 큰 걱정은 마왕 파순의 방해로 인하여 삼계 중생을 제도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38일동안 보리수에서 앉아 사유하시니 천지가 진동하고 대광명을 펴는 신통력으로 마왕 파순이 사는 궁궐을 깜깜하게 가리게 되었다.

그러자 마왕 파순은 꿈을 꾸는데 궁전이 깜깜하고 연못이 마르고 악기가 파괴되고 야차와 졸음의 신 구반다의 머리통이 땅에 떨어진다. 여러 하늘신은 파순의 말을 듣지않고 가버린다. 한문경전에는 38일이 48일로, 파순의 꿈이 32가지의 변고를 보였다고 쓰여있다.

월인석보의 ‘협주’는 훈민정음 사전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책 속의 책은 조선시대 순 우리말의 보물창고이다. 가령 ‘모질다’는 마왕 파순이 부처의 법을 가로 거치게 하고 중생제도와 중이 불교의 진리 배우는 것을 어지럽히는 것이라 죄가 큰 것이라 설명하고 있다. 이제 모질다는 ‘억세고 독하다’의 의미로만 축소되어 쓰이고 있어 600년 전 우리말의 풍성함과 대조된다.

또 지금은 ‘중’이 낮추어 부르는 말이 되었지만 조선 시대에는 스님과 대등한 의미로 쓰이고 있다. ‘부처’도 지금처럼 ‘부처님’이 아닌 표현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부처 그 자체로 ‘깨달으신 분’이다. 더도 덜도 없이 적절한 우리 어휘 실력을 익히고 싶다면 월인석보를 정독할 일이다.

‘파순이 꿈을 □□□(꾸는데)’는 글자가 보이지 않지만 ‘이시파순와상 몽중견(爾時波旬臥寐 夢中見)’의 석가보를 참조하여 번역한 것이다.

‘마왕이 깨어나’도 월인석보에는 ‘깨달아’로 쓰여있지만 ‘종몽이기(從夢而起)’를 대조하여 꿈을 깨다로 번역하였다.

이와 같이 월인석보는 세조가 ‘월인석보 서문’에서 밝힌 바와 같이 ‘12부 수다라’ 곧 팔만대장경을 두루 섭렵하여 중요한 요체만을 가려 뽑은 조선 대장경의 시작인 것이다. 그저 1446년 훈민정음 반포 후 10개월만에 24권의 대작 석보상절을 썼다고 감격에 그칠 일이 아니다. 그 24권을 읽고 세종이 그 자리에서 월인천강지곡 600여수를 지었다고 감탄할 일이 아니다. 여기에는 아직 우리가 감히 헤아리지 못하고 있는 다빈치 코드가 숨어있다. 이 책은 그 짧은 시일에 결코 완성될 수 없는 수수께끼를 품고 있다. 물론 월인석보는 12년 후인 1459년 수정보완된 책이지만 그렇다고 석보상절이 완전히 새로 쓰여진 것이 아니다. 아주 오래전 훈민정음 반포 이전부터 준비되어 왔으며 거기에는 월인석보 서문에 등장하는 신미대사를 비롯한 11명의 집단 지성의 힘이 빛을 발하고 있음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이제부터 그 실마리를 찾는 것은 600년 후에 이 글을 읽는 그대의 몫이다.

[불교신문3753호/2023년1월3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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