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지스님의 중국 선종사찰 순례<16> 호남성 영향현 밀인사
법지스님의 중국 선종사찰 순례<16> 호남성 영향현 밀인사
  • 부산 대원사 주지·조계종 교육아사리
  • 승인 2022.12.09 10:29
  • 호수 3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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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앙종 개산조사인 위산 영우선사 행화도량
위앙종 개산조인 위산 영우선사가 법을 펼친 호남성 영향현의 밀인사 전경. 
위앙종 개산조인 위산 영우선사가 법을 펼친 호남성 영향현의 밀인사 전경. 

육조 혜능으로부터 시작한 조사선(祖師禪)은 만당(晩唐)에 이르러 천하에 널리 유행하다 당말 오대(五代)에 걸쳐 ‘오가칠종(五家七宗)’으로 전개된다. 이러한 오가 가운데 가장 먼저 성립한 것이 위앙종(仰宗)이다. 위앙종은 밀인사(密印寺)에서 시작해 밀인사 또한 위앙종으로 불리며 유명해진다. 호남성 영향(寧鄕)현 위산에 자리한 밀인사는 위앙종 본사로 개산조사(開山祖師)는 위산 영우(山 靈佑)다.

‘밀인(密印)’의 ‘밀(密)’은 세 가지 의미가 있는데 어밀(語密), 신밀(身密), 의밀(意密)이다. 밀교에서 연원한 것으로 ‘어밀’은 입으로 염하는 진언(眞言)이고 ‘신밀’은 손으로 행하는 수인(手印)이며 ‘의밀’은 마음으로 관하는 관상(觀想)을 말한다. 이 삼밀(三密)이 함께 이뤄지면 능히 성불할 수 있다고 한다.

사원의 역사

당대 위산 영우(山 靈祐, 771~853)선사가 백장산에서 위산(山)으로 와 토굴을 지어 주석하면서 밀인사는 시작된다. 영우선사가 위산으로 오게 된 연유는 다음 고사에 전해진다.

위산 영우선사 진영.
위산 영우선사 진영.

영우선사가 백장회해(百丈懷海) 선사 문하에서 깨달음을 얻고 보림(保任)하고 있을 때, 사마두타(司馬頭陀)가 백장산으로 왔다. 사마두타가 백장선사께 “위산은 기이하고 묘해서 1500명이 모일 수 있습니다”라고 하자 선사는 “노승이 위산으로 가고자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묻는다. 두타는 “화상은 골인(骨人)이고, 그 산은 육산(肉山)이기 때문에 능히 거처할 바가 안 됩니다”라고 답하였다. 그러자 선사는 “그러면 나의 문도 가운데 거기에 살 만한 사람이 없겠는가?”라고 다시 묻자 “조건이 되는 제자를 살펴보겠습니다”라고 한다.

선사는 시자를 시켜 제일좌(第一座)인 화림(華林)을 불러오게 하였지만, 두타는 걷는 것을 보고 “이 사람은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이어 전좌(典座)인 영우를 부르니, 두타는 “이 사람이야말로 위산의 주인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선사는 밤에 영우를 방으로 불러 법을 부촉하며 “나와 교화의 인연은 여기까지이다. 위산은 뛰어난 경계이니, 마땅히 그대가 살면서 나의 종지를 계승하여 후학들을 널리 제도하라”고 당부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화림은 백장선사께 “제가 대중의 제일좌에 있는데, 어찌하여 영우가 주지를 합니까?”라고 항의한다. 그러자, 선사는 “만약 대중에게 격(格)을 벗어난 한마디를 한다면, 당장 주지를 줄 것이다”라고 하며, 옆에 있던 정병(淨甁)을 가리키고, “정병이라고 부르지 못한다. 그대는 무엇이라 부르겠는가?”라고 묻자, 화림은 “말뚝이라 부르지는 못합니다”라고 답한다. 선사는 다시 영우에게 물었다. 영우가 정병을 걷어차 넘어뜨리니, 선사는 웃으면서 “제일좌가 도리어 영우에게 졌구나”라며 영우를 위산으로 보냈다.

이는 도원(道原)이 편찬한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권9에 실린 ‘담주위산영우선사(潭州山靈祐禪師)’의 전기에 실린 이야기다. 이러한 인연으로 위산에 이르렀지만, 본래 이 산은 매우 험준하여 인적이 끊어진 까닭에 영우선사는 원숭이 떼를 벗 삼아 도토리와 밤을 주워 끼니를 때우니, 산 밑 사람들이 차츰 알게 되어 대중을 거느리고 함께 절을 지어 주었다. 807년 재상 배휴(裴休)의 도움으로 사원 면모를 갖추었으며, 823년 비로소 국가가 인정하는 진응사(眞應寺)가 탄생한다. 이 무렵 사찰에 수행하는 대중이 1000여 명이 넘었다고 한다.

당 무종(武宗)의 회창법난(會昌法難) 시기에 사찰은 철거되었으며, 영우선사 또한 법난을 피하여 은거하였다. 선종(宣宗)이 등극한 이후 다시 불교가 일어나면서 승상을 맡았던 배휴의 도움으로 중창하고, 그의 아들까지 위산으로 출가하면서 선종 황제가 ‘밀인선사(密印禪寺)’의 편액(扁額)을 하사하여 정식으로 ‘밀인사’ 명칭을 얻게 되었다.

사원의 현황

밀인사 만불전 뒤에 자리한 99.19m의 천수관음상.
밀인사 만불전 뒤에 자리한 99.19m의 천수관음상.

지금의 밀인사는 위산 중턱 비로봉 아래 너른 평지와 계곡을 끼고 위치해 있다. 푸른 소나무, 대나무, 은행과 단풍은 고고한 역사와 함께하고 있다. 만불전을 중심으로 뒤로는 99.19m의 천수관음이 있고, 여래 전각인 공덕당, 열반당, 후원 등이 배치되어 가람 역사의 유구함과 사원건축의 화려하고 웅대함을 증명한다. 밀인사 산문 편액에는 ‘반야도량(般若道場)’ 네 글자가 각인되어 있고, 산문 대련에는 “법의 비가 형악에 내리니, 앙산에 종풍이 열렸도다(法雨衡岳, 宗風啓仰山)”라고 되어 있다. 이는 조계의 선풍이 앙산에 전해져 새롭게 위앙종을 개창하였음을 뜻한다.

만불전은 밀인사에서 제일 유명한 건축물로 1993년 중창하였고, 높이는 약 27m이다. 금색 유리 기와로 장엄하고, 전기(殿基)와 전(殿) 내외의 38개 기둥은 모두 흰색 화강암이다, 만불전에는 1만2218존(尊)의 개금 불상이 모셔져 있다. 중국 사찰 중에서는 보기 드물게 장엄하며 가장 많은 불상을 모시고 있다.

만불전 주위는 동서로 나누어 재당(齋堂, 공양간), 법당, 공덕당, 열반당, 요방(寮房, 스님이 거처하는 곳) 등이 자리하고 있다. 재당 뒤에는 ‘유염석(油鹽石)’이 있다. 유염석은 사찰을 건립하자 기름과 소금이 끊임없이 흘러나와 대중이 모두 사용하기에 충분했다는 전설이 전한다. 또한 미녀견(美女, 긴 대나무 홈통)이 있는데, 도량에 물을 공급하는 수도관이다. 물의 근원인 용왕정은 배휴부인 진씨가 희사하여 수백 개의 돌을 서로 맞물려 축조한 것으로 유명하다.

위산에서 제일 높은 계려봉(界廬峰) 중턱에 있는 영우선사가 좌선하던 넓직한 목우석(牧牛石)도 근대 들어 태허(太虛)법사가 시를 쓸 정도로 일품이다. 백과함단(白果含檀)은 위산의 또 하나 보기 드문 경치이다. 사찰 뒤 천수관음상 앞 한 그루 아름드리 은행나무는 영우가 손수 심은 것이라 전해지고 있다. 나무는 높고 크지만 속이 비어 있는데, 그 곳에 한 단향목(檀香木)이 기생하여 같이 어우러져 사계절 푸름과 아름다움을 뽐낸다. 이밖에도 목정(木井), 사자안(子岸), 조탑(祖塔), 배휴묘(裴休墓) 등 고적이 있다.

배휴는 밀인사 중창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위산에서 세상을 등져 이곳에 묻혔다. 사찰 주위에는 회심교, 내목정, 양생지, 선인헌보, 용왕정, 노화수, 경자암, 사자암, 만인상 등이 있는데, 백과함단과 함께 ‘위산십경(山十景)’이다. 밀인사 뒷산 비로봉 만불영산에는 세계에서 제일 높은 99.19m의 노천천수관음성상(露天千手觀音聖像)이 모셔져 있다.

천수관음성상 좌대는 관음보살 탄생일을 상징한 21.9m이고, 높이는 관세음보살 성도일(成道日) 음력 6월19일에서 착안하여 61.9m이다. 천수관음성상 주위에는 연꽃 주변을 물이 감아돈다는 의미인 수요연화(水繞蓮華)가 있고, 33좌의 관음화신을 모셨다.

그리고 밀인선사 대웅보전 중축선과 천수관음성상 중축선을 연결해 주배도(主拜道)와 주배량(主拜場)을 배치하였다. 배도(拜道)는 주변 산세와 융합하여 보리수 형상을 나타내 국내외에서 보기 드문 광경이다. 길상(吉相)광장은 보리수 뿌리이고, 주배도는 보리수 줄기이며, 619개의 계단으로 되어 있다. 주배도에서 위쪽으로 다섯 갈래 대도(大道)는 보리수의 다섯 개 가지이며, 이를 따라 999좌의 보살을 안치하니 장엄하기 그지없다.

위산 영우선사와 선사상

위산 영우(771~853)선사는 복주 사람이고, 남악회양 문하의 제3세이다. 15세에 건선사 법상율사에게 삭발하고, 항주 용흥사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먼저 대·소승 경율을 배운 후 천태산 국청사에 들어가 한산과 습득을 친견하고, 언지를 받아 륵담(潭)선사를 참알하였다. 마지막에 백장 회해선사를 친견하였다. <경덕전등록>에는 백장선사와의 기연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어느 날 백장선사가 물었다. “누구냐?” “영우입니다.” “그대는 화로 속에 불이 있는지 헤쳐 보았는가?” 위산대사가 헤쳐 보고 말했다. “불이 없습니다.” 백장이 몸소 일어나 깊숙이 헤쳐 조그마한 불을 얻고는 들어 보이면서 말했다. “이것이 불이 아닌가?” 이로부터 대사가 깨닫고 절을 한 뒤에 자기 견해를 펴니, 백장이 말했다. “그것은 잠시 나타난 갈림길일 뿐이다. 경전에 설하기를, ‘불성을 보고자 하면 마땅히 시절인연을 관찰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시절이 이르게 되면 마치 미혹했다 홀연히 깨달은 것 같고 잊었다 홀연히 기억한 것과 같아 자기 물건이지 남에게서 얻은 것이 아님을 성찰하게 된다. 그러므로 조사께서 말씀하시기를, ‘깨달아 마치면 깨닫지 못한 것과 같고, 마음이 없으면 또한 법도 없다’고 하셨으니, 이는 다만 허망한 범부 성인 따위의 마음이 없고 본래 심법(心法)이 원래 스스로 갖추어진 것이다. 그대가 이제 그렇게 되었으니, 잘 보호해 지녀라.”

이렇게 백장선사가 영우한테 상세히 설하여 깨달음을 인정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깨달은 인연을 선가에서는 ‘노중화(爐中火)’라고 한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위산으로 가서 밀인사를 세우고, 40여 년간 주석하면서 수많은 제자를 가르쳤다. 선사는 <담주위산영우선사어록>에서 자신의 선사상을 다음과 같이 설한다.

“무릇 도인의 마음은 바탕이 바르고 허위가 없고, 등지거나 친밀함이 없으며, 속이고 허망한 마음이 없다. 언제나 보고 들음에 평상(平常)을 찾으며, 다시 비뚤어짐이 없고, 또한 눈을 감고, 귀를 막지 않는다. 다만, 정(情)은 물(物)에 기대지 않고 바로 얻는다. 위로부터 모든 성인의 설법도 단지 변방의 허물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악지견(惡知見), 정견(情見), 상습(想習) 등이 없다면, 가을의 맑은 물 같이 그대로 청정하여 무위(無爲)하니, 도인(道人)이라 하고, 또한 무사인(無事人)이라 칭하리라.”

이러한 설법은 영우선사의 선사상을 총괄한다. 주지하다시피 <단경(壇經)>으로부터 ‘무념(無念)’, ‘무상(無相)’, ‘무주(無住)’의 삼무(三無)가 논증되고, 그로부터 ‘무수무증(無修無證)’의 명심견성(明心見性)이 제창되었다면, ‘도인의 마음’은 이러한 사상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 는 것이다. 따라서 ‘도인의 마음’과 계합하는 수행방법은 일상 인연을 배척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생각을 어떤 인연에도 매몰시키지 않는다. 이렇게 된다면 누구나 가을의 맑은 물 같이 더없이 맑고, 걸림 없는 ‘무사인’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고 설파한다.

영우선사 법을 이은 제자 앙산혜적(仰山慧寂)이 “어느 곳이 진불(眞佛)이 머무르는 곳입니까?”라고 묻자, 선사는 이렇게 답했다. 

“헤아림으로써 헤아림이 없게 하는 묘함으로, 헤아림을 돌이키는 영염(靈, 靈火)이 끝이 없으며, 헤아림을 다하여 본원에 돌아오니, 성(性)과 상(相)이 항상 머물며, 이(理)와 사(事)는 둘이 아니어, 진불이 그렇고 그렇다.”

혜적은 이 말을 들은 후 바로 개오(開悟)하여 위산선사를 15년 동안 시봉하였다. 영우선사로부터 혜적이 깨달은 기연은 백장선사로부터 깨달은 ‘로중화’와 상당히 유사하다. 다시 말하면, 불성과 영화(靈火)를 비유하고 있는데 ‘진불’은 우리 자성(自性)에 언제나 꺼지지 않는 상태로 존재하고 있으며 이러한 상태를 ‘이사불이(理事不二)’, ‘진불여여(眞佛如如)’로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위산영우와 앙산혜적 사제의 선풍을 ‘위앙종’이라고 칭한다. 후대에 ‘위앙종’의 종풍을 법안문익은 <종문십규론>에서 “방원묵계(方圓默契)”로 평가하고 있다. <인천안목>에서는 이렇게 평가한다. 

“위앙종은 아비는 자애롭고 자식은 효도하며, 윗사람은 명령하고 아랫 사람은 따른다. 네가 밥을 먹고 싶으면, 나는 곧 숟가락을 받쳐 들고, 네가 강을 건너고 싶으면 나는 곧 배를 젓는다. 건너 산에 연기가 보이면 곧 불이 있음을 알고, 담 너머 뿔이 보이면 곧 소가 있음을 안다.” 

또한 <오가종지찬요>에서의 평가는 다음과 같다.

“위앙종풍은 부자(父子)가 일가(一家)를 이루며, 스승과 제자가 서로 화합한다. 말 없이 드러내지 않으며, 명암(明暗)이 서로 치달려, 체용(體用)을 모두 밝힌다. 무설인(無舌人)을 종(宗)으로 하고, 원상(圓相)으로 그것을 밝힌다.”

이로부터 보자면, 위앙종 선풍은 ‘체용쌍창(體用雙彰)’을 두드러지게 강조하는데, ‘체(體)’는 본체로 만물을 존재하게 하는 원인이고, ‘용(用)’은 외재의 표현 형식이다. 또한 체(體)는 형상이 없기에 언어로 표현할 수도 눈으로 볼 수도 없으며 만질 수도 없다. 이러한 까닭에 영우선사는 ‘불설파(不說破)’, ‘무설인(無舌人)’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영우선사는 “부모의 입에서 나온 바는 끝내 자식의 말이 되지 못한다”라고 했으며, 앙산은 “제불(諸佛)의 밀인(密印)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조사의 선리(禪理)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는가? 위앙종에서는 ‘원상(圓相)’을 통해 나타내고 있다. 즉 원(圓) 가운데 모서리(方)가 있는 도안으로 선리를 나타내 마음으로 계합하게 하는 것이다. ‘밀인사(密印寺)’ 명칭이 이로부터 나온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혜적선사는 영우선사를 참알하기 이전에 탐원(耽源)선사에게 97가지 원상을 배우고 이후 위산에서 이 원상을 운용하였기에 ‘방원묵계’가 위앙종을 대표하는 선풍으로 알려지게 된 것이다.

위앙종 문하에서 주의를 끄는 것은 ‘조사선’ 개념을 철저하게 사용했다는 점이다. 향엄지한은 본래 영우선사와 함께 백장선사에게 사사하였는데 경전에 박식하였지만, 선리는 깨닫지 못하였다. 백장선사가 입적한 후, 사형인 영우선사를 따랐다. 영우선사는 지한에게 ‘부모미생시(父母未生時)’를 물었지만, 답하지 못하고 모든 경전과 책을 태워버리고 말하기를, “지금까지 불법은 배우지 않고, 오히려 승려가 되어 오래도록 밥만 축내며, 심신의 수고로움만 면하였구나”라며 제방을 유행하였다.

그러다 남양(南陽)을 지날 때, 혜충(慧忠)국사 유적을 참배하고 머물면서 어느 날 풀을 베다 기와조각을 던졌는데, 대나무에 맞아 경쾌한 소리를 내었다. 이때 갑자기 선리를 깨닫게 되었다. 이후 위산으로 돌아온 후, 앙산선사가 묻자 향엄은 “작년 가난은 가난이 아니고, 금년 가난이 비로소 가난이다. 작년 가난은 송곳 세울 땅이 없었지만 금년 가난은 송곳조차 없다”는 게송을 올리자 앙산이 “사제는 다만 여래선(如來禪)을 얻었으나 조사선(祖師禪)은 얻지 못하였다”고 답했다. 후에 다시 “나에게 하나의 기틀이 있으니, 눈 깜박임이 이와 같다. 만약 아직 모르면 사미를 불러 물으리라”라는 게송을 올리자 앙산은 “또한 기쁘니, 지한 사제가 조사선을 깨달았다”고 인정하였다.

밀인사 지도.
밀인사 지도.

이는 <위산영우선사어록>과 다양한 선종 전적에 실려 있으며, ‘여래선’과 ‘조사선’의 분기(分岐)와 차별을 논할 때 자주 인용되는 구절이다. 이로부터 보자면, 여래선은 여전히 수증(修證)이 남아 있지만, 조사선은 ‘본래현성(本來現成)’과 ‘당하즉시(當下卽是)’라는 돈오(頓悟)의 풍격을 보이고 있다고 하겠다.

선풍을 중국문화에 융합

위앙종은 ‘오가칠종’ 가운데 가장 빨리 성립되었지만, 오세(五世)를 전승하고 ‘오가’ 가운데 가장 먼저 법맥이 끊어지게 되었다. 그렇지만 위앙종 본사인 밀인사는 여전히 건재한다. 밀인사는 위앙종 선풍을 중국문화에 융합시키는 다리 역할을 하였다. 지금도 밀인사를 참배하고, 중국선종을 연구하는 불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밀인사 스님들과 대중은 여전히 묵묵히 계합하는 위앙종의 친절하고 순박한 풍격을 계승하고 있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불국정토의 느낌을 주고 있다.

부산 대원사 주지·조계종 교육아사리

동국대 WISE캠퍼스 겸임교수

[불교신문 3746호/2022년12월1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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