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 화교와 함께 동남아 곳곳에 사찰 건립

복건성 해안은 역사적으로 가장 왕성한
이민의 원천…복건성은 ‘화교의 뿌리’다.
동남아 곳곳 복건·광동·조주회관 등의
간판은 민월의 천부적 해양력을 암시한다

정크선 몰고 동남아로 진출, 집단이민촌을
꾸리고 개척한 이들은 단순 이민자가 아니라
해양실크로드 개척자이자 해양교역 시스템을
만들어낸 사람이다.

이들은 동남아 땅에
마조묘와 정화묘를 세웠다. 당연히 불교도
바다를 건넜다. 화교를 따라 동남아 곳곳에
사찰이 만들어졌다. 바다를 건너왔던 불교가
다시 바다를 건너 동남아로 퍼져나간 것…

정화함대가 들른 동서해양교류의 요충지 말레이반도 믈라카의 사찰 청운사.
정화함대가 들른 동서해양교류의 요충지 말레이반도 믈라카의 사찰 청운사.

불보살에 무사항해 서원한 영락대종

명태조 주원장이 세상을 떠난 후, 명조에는 피비린내 나는 정권 다툼이 벌어졌다. 홍무제 시기에 주체(朱)가 연왕(燕王)에 봉해졌다. 주체가 반란을 일으켜 건문제를 제거하고 스스로 황위에 올라 성조가 되었다. 홍무제 사후 조카 건문제의 제위 계승 및 제후 숙청 정책에 반발하여 ‘정난(靖難)의 변’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난징을 함락시키고 스스로 제위에 올랐다. 그가 명 3대 황제 영락제(永樂帝, 재위 1360~1424)다.

주체에게 패한 건문제는 도주하여 행방불명이 되었다. 주체의 정화함대 파견에는 건문제의 행방을 찾는 일이 분명히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바닷길 어딘가에 숨어있을지도 모를 건문제를 찾아내서 화근을 없애려는 목적이 정화함대에게 암묵적으로 부여되었을 것이다. <명사> ‘정화전’에 쓰인, “성조(成祖)는 혜제(惠帝)가 해외로 도망간 것으로 의심하고 그의 종적을 추적하는 동시에 이역에 병력을 과시함으로써 중국의 부강을 드러내고자 하였다”는 대목이 그것이다.

영락제는 회통하(會通河) 운하를 완공시켜 남북 물자 교류의 교두보를 확보한 후, 1421년 수도를 남경에서 북경으로 옮겼다. 영락제는 황제로는 역사상 최초로 다섯 번에 걸친 막북(漠北, 몽골) 친정(親征)을 치렀다. 해룡강 하류까지 진출하여 요동 도사를 설치하고, 여진족은 위소에 편입시켰으며 누르칸 도사까지 설치했다. 일본과 동남아에 대한 패권 확립, 베트남 정벌, 티베트 회유와 티무르 제국과의 전쟁, 정화의 남해 대원정과 문물 교류 등의 팽창정책을 추진했다. 그의 치세로 명은 전성기를 맞이한다.

베이징 근교 대종사에 있는 영락대종. 무게 46.5t으로 중국에서 가장 큰 청동종으로 알려졌다,
베이징 근교 대종사에 있는 영락대종. 무게 46.5t으로 중국에서 가장 큰 청동종으로 알려졌다,

1418년은 영락제에게 기념비적인 한 해였다. 이 해에 정화함대가 전 세계를 주유하라는 영락제의 명령을 완수한 것이다. 영락제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은혜에 감사드리기 위해 거대한 영락대종(永樂大鐘)을 주조했다. 현존하는 중국의 가장 큰 청동 종으로 국보이자 ‘종의 왕’이란 별칭이 있으며 베이징 북서쪽 교외의 대종사에 지금도 걸려 있다. 영락종은 무게 46.5t, 높이 6.75m, 외경은 어깨에서 2.4m, 가장자리에서 3.3m다. 대종은 수백 년 동안 지진과 바람과 비를 견뎌 왔지만 여전히 잘 보존되어 부식되지 않았다. 종은 당시 음향 특성, 기계적 구조 및 주조 기술 측면에서 세계 최고 수준이다.

종 앞뒷면 안팎에 한자 22만6266자, 산스크리트어 5400자 등 총 23만자로 각인되었다. <제불세존여래보살존자신승명경(佛世尊如菩尊者神僧名)>, <금강경> 및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등이 포함되었다. 불경 문구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12개의 염원을 기록한 <대명신주회향문(大明神回向文)>이다. 그중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대자대비를 칭송하고, 명과 주변국이 같은 법도를 준수하도록 기원하며, 모든 재난이 없어지기를 기원하고, 명의 영원한 통일을 염원하는 것 등이다. 영락제는 이 발원으로 정화가 해외에서 했던 봉불(奉佛)이 자신의 의지에 따라 성과를 내고, 그가 속세를 떠난 후에도 영혼이 지옥에 떨어지지 않도록 해주고 명이 영원히 존속하도록 해줄 것을 기원했다. 정화의 대항해 목적 안에 영락제 자신의 불교적 사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대종사는 이후 왕실이 기우제를 지내는 장소가 되었으며, 국행기우제는 청이 멸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항해의 수호 보살인 개인용 관음보살상(명, 백자, 광동성박물관).
항해의 수호 보살인 개인용 관음보살상(명, 백자, 광동성박물관).

정화, 불교 힌두교 이슬람 모두 공양

대항해를 이끈 정화의 성씨는 무함마드의 중국식 한자인 마(馬)씨다. 무슬림이 마씨를 성으로 삼은 풍습에서 유래한다. 직계 선조는 칭기즈칸의 중앙아시아 원정 때 몽골에 귀순하여 원세조 쿠빌라이 때 운남성 경영에 노력했던 색목인 정치가다. 정화의 이름은 삼보(三寶, 三保)였으며, 환관 최고위직 태감(太監)이 됐기에 삼보태감으로 알려진다. 키가 크고 힘이 무척 셌다. 황제의 심복으로 외교관, 전사로서 빼어난 재능을 보여 함대를 이끄는 중책을 맡았다. 국제통 가문의 이슬람교도라는 점이 대원정 총수로 발탁된 배경일 것이다.

정화함대의 하서양(下西洋) 주요 임무는 국위 과시였으며, 천하가 평화롭게 지내는 원교책략(遠交策略)은 실제로 성공적이었다. 조공무역을 조직하는 것이 중요 임무였기에 가는 곳마다 도자기, 비단, 금은 등 명 황제가 내리는 하사품을 전달하고, 보석, 약재, 향료, 희귀 동물 등을 기증받았다. 많이 주고 적게 받으며 경제이익을 초월했기 때문에 조공무역은 각국에 유리했다. 하서양은 중국이 전대에 개척했던 서양 항로를 초월했다. 정화함대는 전대미문의 규모로 동서양 해상항로를 개척했으며, 아시아와 아프리카 해역을 연결했다.

특이한 일은 1407년(영락 5) 남경에서 출발한 제2차 원정이다. 정화는 무사히 여기까지 찾아온 항해에 감사하는 불사를 개최했고, 기념비를 세웠다. 비문 오른쪽에는 한자, 왼쪽에는 타밀어, 왼쪽 아래에는 페르시아어로 되어있다. 정화가 항해자들이 기원하던 스리랑카 남쪽 인도양 해안의 사원에서 공양했다는 사실과 불교 의례에 바친 품목을 알려준다.

타밀어 부분은 명 황제가 힌두교의 신을 찬양해 공물을 바친다는 내용이다. 당대 바다를 누비던 힌두 무역상을 배려하는 의미다. 페르시아어는 이슬람교와 알라신과 성인의 영광을 찬양해 공물을 바치고 비석을 세운다는 것이다. 곧 당대 페르시아의 무슬림 상인을 배려하는 뜻이다. 이처럼 특정 종교 배타성이 아니라 불교, 힌두교, 이슬람을 모두 배려한 의례를 집행한 것이다.

동남아 곳곳에 세워진 남양화교 사찰

명대에는 복건성 민인(人)의 남양 이주민이 급등했다. 중국 정부는 해상무역을 통제했고, 마지못해 이주를 묵인하고 있었다. 중국의 마지막 두 왕조인 명·청시기 정치·사회적 변화는 해상무역과 그것에 수반되는 해외 이민이라는 강력한 압력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 압력은 정부가 더욱 실용적 태도를 취하도록 자극했다. 국가의 이해관계와 사회적 역동성 사이의 상호 작용이 5세기에 걸쳐 중국인 이민의 형태를 만들고 있었다. 마침내 남양 화교라는 명칭이 고착됐다.

이민자는 대체적으로 온주인, 복주인, 조주인, 광동인이었다. 남쪽 복건성 해안은 역사적으로 가장 왕성한 이민의 원천이었다. 복건성은 ‘화교의 뿌리’다. 동남아 곳곳에서 보이는 복건회관·광동회관·조주회관 등의 간판은 민월의 천부적 해양력을 암시하는 증거물이다. 정크선을 몰고서 동남아로 진출해 집단이민촌을 꾸리고 개척한 이들은 단순 이민자가 아니라 해양실크로드의 개척자이자 해양교역 시스템을 만들어낸 사람이다.

이들은 동남아 땅에 ‘바다의 여신’ 마조묘와 성인으로 등극한 정화묘를 세웠다. 도교에서 ‘재부의 신’으로 모시는 관우도 함께 모셔갔다. 당연히 불교도 바다를 건넜다. 화교를 따라서 동남아 곳곳에 사찰이 만들어졌다. 바다를 건너서 중국으로 건너왔던 불교가 다시금 바다를 건너서 동남아로 퍼져나간 것이다. 이들 절 건립에서 중국 스님들 역할이 절대적이었고 많은 스님들이 이민자들과 함께 바다를 건너 오늘에 이른다.

 

[불교신문 3745호/2022년12월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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