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와서 연꽃 피울 수 있는 ‘마음의 정원’


물속, 땅, 허공에 있는 외롭고 원한 가진
영가 천도하는 500년 전통 중요 불교의식
국가무형문화재 ‘진관사 수륙대재’로 유명

1000년 전 고려 진관스님의 환생인가?
1964년 진관스님 부임이후 대웅전 비롯
다수의 전각 중창 ‘지금의 진관사’ 일궈

순국 100년 초월스님 다시 오신 것인가?
독립운동 상징 最古 태극기로 또다시 주목

서울 진관사. 옛날부터 일체중생의 행복을 위해 수륙무차평등재, 나한재를 설행해온 사찰답게 누구나 와서 쉬며 마음속에 연꽃을 피울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마음의 정원’으로 불린다.
서울 진관사. 옛날부터 일체중생의 행복을 위해 수륙무차평등재, 나한재를 설행해온 사찰답게 누구나 와서 쉬며 마음속에 연꽃을 피울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마음의 정원’으로 불린다.

북한산 푸른 숲속에 자리한 ‘마음의 정원’ 진관사(津寬寺)는 불암사, 삼막사, 승가사와 더불어 예로부터 서울 근교의 4대 명찰(名刹)로 손꼽힌다. 또 진관사는 옛날부터 일체중생의 행복을 위해 수륙무차평등재, 나한재를 설행한 사찰로 누구나 와서 쉬며 자신의 마음속에 연꽃을 피울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마음의 정원’이란 특별한 이름이 덧붙었을 것이다.

왕실 지원…무차평등 기원 도량

고려 초 천추태후는 왕위 계승자 대량원군(태조 왕건의 7째 아들)을 죽이려 하였으나 진관스님이 삼각산 암자 불상 밑에 굴을 파서 숨겨 화를 면했다. 1009년 강조가 군사를 일으켜 대량원군을 왕으로 옹립하니 그가 고려 8대 현종이다. 현종은 자신이 숨어있었던 암자를 신혈사(身穴寺)로 바꾸고 인근의 터에 진관스님을 위해 1011년에 절을 짓고 1012년에 낙성법회를 열어 스님을 국사로 봉하고 진관사라 하였다. 이후 1090년에 선종은 진관사에 행차하여 오백나한 재를 성대하게 봉행하였으며, 1099년, 1110년에는 숙종과 예종이 진관사에 순행하는 등 고려 왕실의 지원과 보호를 받아 왔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고려 왕실의 원혼을 천도하고 민심을 달래기 위해 1397년 진관사에 총 59칸(間)에 이르는 수륙사(水陸社)를 건립하고 네 번을 찾아왔다. 또 이성계는 1397년 <경제육전>에 수륙재 관련 조항을 넣어 국가의식으로 치러지는 국행(國行) 수륙사찰로서의 위상을 갖추게 하였다. 수륙재는 누구에게나 불법(佛法)을 강설하고 평등하게 음식을 베푸는 불교의식으로 진관사의 국행수륙재는 태조와 태종, 세종대까지 활발히 설행되었으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왕실보다는 개인과 사찰 중심으로 설행되었다.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돼 더 유명해진 진관사 수륙재.사진제공=국립무형유산원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돼 더 유명해진 진관사 수륙재.사진제공=국립무형유산원

‘칠칠재 형식’ 낮재 밤재 국행수륙대재

진관사 수륙재는 칠칠재(49재) 형식으로 낮재와 밤재로 설행된다. 낮재는 일주문 밖에서 영가를 가마에 태워서 사찰로 맞이하여 목욕을 시켜 번뇌를 씻어준 후 화엄성중의 힘으로 삿된 기운을 몰아내고 도량을 깨끗이 한다. 대형불화를 이운하여 야단법석에 불보살님을 모시고 춤과 노래로 찬탄하며, 영가에게 <법화경>을 들려준다. 밤재는 수륙재를 펼친 연유와 단을 세워 저승사자를 불러 대접하고, 다섯 방위의 상제에게 공양을 올려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한다. 그 다음 상·중단에 불보살님을 청하여 공양을 받으시길 권하고, 하단 영가에게는 법식(法食)을 주어 극락왕생을 기원하고 배웅하는 절차로 진행된다.

이때 북, 목탁, 요령, 징 등 법구와 취타대, 삼현육각의 악기를 울려 더욱 수륙재를 장엄하게 한다. 북은 부처님의 말씀을 알릴 때 치는데 <대법고경>에 “부처님은 아난다에게 큰 북을 치라고 이르시고 법을 설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경전을 독송할 때 사용하는 목탁은 수행과 정진을, 요령은 이 소리를 듣는 자는 능히 악을 소멸하고 선(善)에 든다고 한다. 망자는 요령 소리를 듣고 지옥의 고통이 멈춰지고 극락세계로 인도된다고 한다. 징은 금고(金鼓) 대신 사용하는데 수륙재의 금고 소리는 참회하는 마음을 내게 한다. <금광명최승왕경>에 “인간·천상·아귀·축생 등 현재 고통을 받는 중생들은 금고에서 나오는 묘한 소리 들으면 괴로움을 여의고 해탈을 얻는다. 지난 세상에 제가 지은 죄업 이제 부처님 전에서 모두 다 참회합니다”라고 하였다. 이렇듯 진관사 수륙재는 물속이나 땅이나 허공에 있는 외롭고 원한을 가진 영가를 천도하는 중요한 불교의식으로 조선 500년 전통을 이어와 국가무형문화재가 되었다.

나한전은 고려 때 오백나한재 봉행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사진은 수기삼존불.
나한전은 고려 때 오백나한재 봉행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사진은 수기삼존불.

고려 오백나한재 봉행…나한전도 유명

진관사는 고려 때 오백나한재를 성대하게 봉행한 사찰답게 나한전도 유명하다. 나한전과 더불어 독성전, 칠성각은 6·25전쟁 때 불타지 않고 남아있는 유일한 건물이다.

천태만상 나한상 가운데 하나. 손거울 보는 나한.
천태만상 나한상 가운데 하나. 손거울 보는 나한.

나한전에는 1768년에 진흙으로 조성한 수기삼존불(석가모니불, 미륵보살, 제화갈라보살)과 십육나한, 제석천, 금강역사, 저승사자 등 총 23분을 봉안했다. “석가모니불과 자씨미륵보살과 제화갈라보살 및 16나한님과 도리천궁의 제석천에게 귀의합니다. 우리는 최고의 덕을 지닌 부처님을 조성하기를 원합니다. … 일체 겁에 부처님의 깊고도 깊은 공덕을 찬탄함으로써 법계의 중생이 모두 다 함께 무량광불국토에 속히 들어가기를 기원합니다”라고 한 봉안기의 간절한 발원에서는 신앙의 힘이 느껴진다.

진관사 나한은 그야말로 천태만상이다. 연봉 지팡이를 짚고 손거울을 바라보며 ‘이 얼굴이 본래진면목’ 하거나, 나한전 예불문을 펼쳐두고 불자들을 가르치거나, 등을 긁으며 오른발은 단 아래로 내려놓고 왼 무릎을 훤히 내보이며 손가락으로 버선을 신겨줄 사람을 찾는다. 또 단정학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거나, 호랑이를 등판 삼아 글씨를 쓰거나, 용의 여의주를 빼앗아 골려주는 등 파격적이고 역동적이어서 재미있다.

초월스님 독립만세운동 상징…가장 오래된 태극기

초월스님이 3·1만세운동 때 사용했던 현존最古 태극기.
초월스님이 3·1만세운동 때 사용했던 현존最古 태극기.

2009년 5월에는 진관사 칠성각 보단 밑을 뜯어내던 중 90년을 되돌리는 역사적 물건이 발견되었다. 그것은 애국지사 초월동조(初月東照: 1878~1944)스님이 1919년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던 태극기였다. 일장기를 덮어 바느질한 유일한 태극기로 일본의 탄압에 굴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독립의지를 표방하였다. 진관사 태극기는 현존하는 우리나라 국기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기미년 그날의 숭고함이 베어 나온다.

백초월(白初月)스님은 독립자금 조성에 앞장선 분으로 대한독립은 오직 한 마음에 달려 있고 그 마음은 <화엄경>의 일심처럼 보현보살의 실천행으로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고 보았다. 김광식 교수는 ‘백초월의 항일운동과 진관사’ 논문에서 초월동조스님은 “‘번갯불 번쩍할 때 바늘귀를 꿰어야 한다’ 또 ‘독립운동은 뱃속에 가득 차게 마음속에서 우러나와야 한다’고 독립운동의 실천을 강조하였다”고 한다. 사진으로 본 스님의 모습은 어디 두려움 있겠는가? 바위처럼 단단한 두상과 번쩍이는 눈빛에는 강인한 힘이 느껴진다. 스님은 1944년 6월 청주교도소에서 순국하였지만 100년이 지난 지금 태극기로 진관사에 다시 오셨다.

또 진관사는 1000년 전 고려 진관(津寬)스님의 환생인가? 1964년에 진관(眞觀)스님이 부임하여 대웅전, 명부전, 홍제루와 범종 등의 여러 전각을 중창하여 진관사를 오늘에 이르게 하였다.

 

[불교신문 3742호/2022년11월1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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