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 관상록
한국불교 초석 다진 선승
수행자 시선으로 ‘금강산’
여행기와 관상시 담아내
경건하고 엄숙하게 묘사
시학, 한문학 소양 일품
근현대 한국불교의 초석을 놓고 통도사의 개혁을 이끈 선승(禪僧)이자 시승(詩僧)으로 꼽히는 구하대종사(1872∼1965). 법명은 천보(天輔), 법호는 구하(九河), 시호는 축산(鷲山)이다. 부산대 한문학과에서 ‘경봉 정석의 한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통도사 스님들의 시문에 대한 연구들을 진행해 오고 있는 최두헌 통도사 성보박물관 학예 연구실장이 구하스님의 금강산 여행기와 관상시를 소개한 <금강산 관상록>을 최근 펴냈다. 경승 유람으로 일관된 유학자들의 기록과는 달리 이 책은 금강산을 수행의 근원이자 치유의 공간으로서 바라보는 수행자의 시각은 자료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발 내디뎌 뿌리 잡고 푸른 하늘로 오르니/ 문득 위태로이 신선이 노니는 듯하네/ 박빈 거사가 진리의 눈을 여니/ 두 부처가 능히 돌로 된 배로 초대하는구나”(시 ‘선암(船庵)’ 중에서) “물 위의 달빛 맑디맑은 곳에 절집 하나 그윽한데/ 물결을 말하고 바다를 말하다 내가 먼저 알았네/ 구름 쫓고 달 가리키니 도(道) 아닌 것이 없고/ 물을 배우고 산을 보는 것 모두가 스승이라네”(시 ‘송라암(松蘿庵)’ 중에서) 특히 구하스님은 금강산 내의 각 사찰과 소장 유물, 부속 암자 등을 상세히 밝히고 순례자의 눈으로 바라본 금강산의 모습을 경건하고 엄숙하게 묘사한다. 그리고 관상시에서는 조선불교 시승의 맥을 이은 구하스님의 풍부한 시학과 한문학적 소양이 잘 드러나 있어 주목된다.
이 책은 구하스님이 1932년 4월7일에 통도사를 출발해 8월28일 다시 통도사로 돌아올 때까지 약 5개월간의 행적을 일기체 형식으로 기록한 여행록이다. 스님은 물금역을 출발해 서울-철원-금화-금성-단발령-말휘리-내금강역으로 연결된 내륙 철도를 이용했다. 스님이 금강산에 도착한 뒤 장안사를 거점으로 기록이 시작되는데, 본문 격인 ‘금강산 가는 길과 볼거리(金剛山路程及觀賞)’는 크게 노정과 관상시로 나뉘어 있다. 노정에는 통도사에서 출발해 금강산 장안사에 도착하기까지의 여정, 금강산에서의 관상, 돌아오는 귀로까지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이처럼 이 책은 크게 기행록인 ‘금강산 가는 길과 볼거리’와 관상시인 ‘보고 느낀 것을 시로 짓다’ 두 부분으로 나뉜다. 기행록 안에도 중간중간 구하스님이 금강산에서 본 선인들의 관상시와, 이에 대해 화답한 구하의 시들이 들어 있다. 스님의 시들은 보이는 것을 사실적으로 표현했고, 금강산 곳곳의 자연환경에 대한 찬탄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또한 승가의 일상적 모습, 사찰의 고요한 정취 등을 담아내 눈길을 끈다. 풍부한 시학과 한문학적 소양이 잘 드러난 이 시들은 근대 승려의 시문 창작과 활용 방법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한문학이 쇠퇴해 가고 있는 오늘날, 이러한 승가의 자료와 시문들은 근대 한문학의 자취를 이어 줄 소중한 자료라고 할 만하다.
구하스님은 13세가 되던 1884년 천성산 내원사로 출가했고, 1886년 경월도일(慶月道一)을 은사로 득도했다. 1896년 표충사에서 만하승림(萬下勝林)에게 대소승계를 수지했다. 이후 1899년 통도사에서 수선 안거를 시작하면서 동시에 내외 경전을 두루 섭렵하게 된다. 1899년에 통도사 황하각에서 성해남거(聖海南巨) 선사의 전법 제자가 돼 ‘구하’라는 법호를 받았다. 1908년 명신학교를 비롯해 1932년 입정상업학교(현 부산 해동고), 1934년 통도중학교(현 보광중)를 설립해 어려운 절 살림과 암울한 일제 치하의 시대 속에서도 인재 양성에 힘썼으며, 1910년부터 15년간 통도사 주지를 맡아 근대 통도사의 개혁을 이끌었다. 무엇보다 일제 치하에서 독립을 위해 임시정부에 독립 자금을 지원하는 등 불교계 독립 운동사에서 빠질 수 없는 인물이기도 하다. 1963년 10월3일 세수 94세, 법랍 82세로 열반에 들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