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 산업혁명, 우리와 무슨 상관인가?

변치 않는 진리는 自燈明法燈明
봇물 터지듯 일어나는 변화에는
그 기세에 올라타는 지혜 필요
4차 산업기술도 방편으로 활용

여몽환포영 세상에 속지 않도록
부동심 지혜 담보해 주어야 할
근본 사명은 스님, 수행자들 몫

일반인들의 접근이 힘든 작은 암자에서도 수행 정진이 끊어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현재의 기술문명을 활용하여 조심스레 보여준다면 전 세계인이 마음혁명과 정신혁명으로 나아가도록 발심할 수 있게 인도할 수도 있다. 사진은 금정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미륵암 전경을 드론으로 촬영한 모습. 불교신문 자료사진
일반인들의 접근이 힘든 작은 암자에서도 수행 정진이 끊어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현재의 기술문명을 활용하여 조심스레 보여준다면 전 세계인이 마음혁명과 정신혁명으로 나아가도록 발심할 수 있게 인도할 수도 있다. 사진은 금정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미륵암 전경을 드론으로 촬영한 모습. 불교신문 자료사진

‘트렌드를 읽는다고 해서 100% 성공을 보장할 수는 없지만 트렌드를 모르면 100% 실패는 보장할 수 있다’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4차 산업혁명과 관련된 미래사회를 전망하는 담론에서 한 번쯤 들어보았음 직한 말로 이제는 변화에 둔감했던 모든 분야에서도 고도화된 기술의 발전이 사회 전반에 미치는 영향을 무시할 수 없게 되었음을 인정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인공지능(AI)이라는 말이 깊이 각인된 것은 2016년 세계랭킹 1위 이세돌 9단이 구글에서 만든 알파고와의 바둑 대국에서 패배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으면서였다. 다섯 번의 대국에서 인간대표 이세돌 9단이 한 번밖에 이기지 못한 것에 크게 실망했으나 그 이후 그 어떤 인간도 인공지능과의 대국에서 승리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는, “아, 저건 상대가 안 되는 게임이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바둑대국의 데이터를 입력하여 밤낮으로 자체 공부를 실행하고 있는 컴퓨터를 이길 수 있는 인간이 있겠나. 마치 KTX 열차와 달리기 시합을 해서 이길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일 뿐이야!”라며 얼른 포기하고 마음을 내려놓았다. 빠른 포기는 가끔 집착으로 인해 생기는 억지와 생떼로부터 신속한 자유를 안겨주기도 한다. 하지만 뭔가 개운치 않은 뒷맛과 씁쓸했던 기억의 여운은 꽤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이렇듯 4차 산업혁명은 ‘마음’과 ‘인간성’을 소중히 여기는 불교계에는 뭔지 모를 미심쩍은 불안감을 선사하는 그 무엇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거부할 수도, 무시할 수도 없는 필연적인 변화의 물결이요 거스를 수 없는 대세임에는 틀림없는 것이기도 하다.

시각들: 명암과 양면성

4차 산업혁명 이전에 우리 인류는 이미 많은 산업혁명을 겪어왔다. 18세기 증기기관이 발명되면서 1차 산업혁명은 시작되었고, 전기 에너지를 통한 대량 생산이 가능해지면서 2차 산업혁명을 맞이하게 되었다. 지난 세기 후반에는 컴퓨터와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지식정보의 스마트혁명인 3차 산업혁명이 지구촌을 강타했다. 디지털과 스마트 기술에 강점을 보인 우리 한국은 글로벌 IT 강국의 반열에 오르는 정도에 그치지 않고 세계의 신기술을 선도하는 지위에까지 올라섰다. 여기에 다시 인공지능, 가상현실, 빅데이터 등의 개념조차 온전히 이해하기 힘든 용어들이 느닷없이 등장하면서 4차 산업혁명이라는 괴물은 온통 세상을 집어삼키고 있는 중이다.

이와 함께 그것이 지니는 이중성과 양면성을 경계하는 목소리들도 만만치 않다. 이러한 흐름에 대해 온몸으로 거부의 의사를 표방하는 이들도 적지 않으며, 또 다른 인간의 고독과 고통을 견인하게 될 것이라는 예측들도 심심찮게 제시되고 있다. 양극화는 심화될 것이고, 대량 실업 사태는 피하기 어려울 것이며, 인간의 효용 가치는 더욱 하락할 것이라는 부정적 견해들도 일면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세상의 모든 것에는 명암이 있고 양면성이 공존하는 것이리라.

4차 산업혁명에 드러난 종지: 무아·무애

부처님 가르침(佛法)을 굳게 믿는 입장에서는 제행(諸行)의 무상(無常)함을 거스를 수 없는바 봇물 터지듯 일어나는 변화에는 일단 그 기세에 올라타는 승기(乘氣)의 지혜를 발휘해 볼 필요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 머리카락 두께의 약 8만분의 1에 해당한다는 ‘나노(nano)’ 기술은 의상대사가 말한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과 <구사론>에서 말하는 ‘극미(極微)’ 세계의 현실화라고 볼 수 있겠다. 화엄학에서 말하는 팔만사천 모공찰(毛孔刹) 하나하나에 삼천대천세계가 담겨 있다는 사사무애(事事無)의 진여법계는 이미 스마트폰을 통해 명백하게 현실세계에 구현되고 있으며 이러한 대세를 거스른다는 것은 어쩌면 치암중죄(癡暗重罪) 수준에 이르렀다고도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현실세계와 가상세계를 오고 가는 초현실을 구현하는 기술혁명을 보고서는 인간이 본래 무아(無我)의 존재이다 보니 그 실체 없음을 저러한 기술을 통해 산업에 활용시키고 있구나 하며 묵묵히 긍정하기도 한다.

시각을 달리하여 본다면 4차 산업혁명이라는 것이 인류사에서 불교의 종지를 가장 현실에 잘 드러내 준 것일지도 모르고, 팔만대장경에 대한 새로운 ‘묘장엄(妙莊嚴)’이 펼쳐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역설적이게도 ‘삶이 곧 판타지’임을 더욱 잘 지각할 수 있게 해 주는 계기는 오히려 기술 문명이 발달하면서부터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과거는 단수이고 미래는 복수이다. 과거의 일은 분명한 역사로 확실하게 남게 되지만 미래는 그 누구도 구체적 변화의 양상을 모두 다 알 수 없다. ‘오직 모를 뿐’이고 이 변화에 대해서 좋고 나쁘고의 이분적 생각을 버리고 그저 ‘불사선 불사악(不思善 不思惡)’의 자세로 산 눈을 뜨고 정신 차리고 알아차릴 뿐인 것이다.

드론과 유튜브에 눈을 뜨다

어느 날 나는 ‘드론’이라는 신문물을 알게 되면서 한국불교의 세계화를 위한 최적의 아이템 하나를 떠올렸다. 드론은 바로 천년의 세월이 넘도록 수많은 옛 암자들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암자 보유국 한국’을 위한 축복과도 같은 문물이라는 발견을 하게 해 주었다.

천년 세월이 넘도록 한두 명의 수행자가 번갈아 살면서 견성도인(見性道人)을 꾸준히 배출해 내어온 한두 칸의 조그마한 암자들, 그동안 숨어 있던 암자들의 가치가 세상에 드러나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존에는 헬기를 통해 촬영하다 보니 암자들의 전모를 제대로 담아내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는 드론을 활용해서 위대한 자연 속에 숨어 있었던 암자들의 생동감 넘치는 사계(四季)를 촬영하여 내셔널 지오그래픽이나 영국 BBC 다큐멘터리처럼 만들어 지구촌의 모든 인류에게 보여줄 수 있게 된 것이다.

800여 년 전 지리산 상무주암에서 보조국사가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나의 노스님인 혜암선사께서도 이곳에서 정진하셨으며, 지금은 현기선사께서 수십 년째 정진하고 계신다. 그 작디작은 암자들에서 수행자의 정진이 끊어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엄청난 현재의 기술문명을 활용하여 조심스레 보여준다면 전 세계인이 마음혁명과 정신혁명으로 나아가도록 발심할 수 있게 인도할 수도 있는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의 기술문명도 뱀이 마시면 독이 되고, 소가 마시면 우유가 되는 물과 같은 것 아니겠는가. 반야의 지혜를 통해 기막힌 활용처를 보여주는 역할을 해야 할 장본인은 바로 불교의 스님들과 불자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연찮은 기회로 카메라 한 대 없이 강제 유튜버가 되어 버린 나의 일상을 살펴보면 그다지 변한 것은 없다. 하지만 변해 있는 기술문명을 보는 시각은 매우 달라져 있다. 내가 연구했던 탄허스님은 내년이면 입적 40주기가 된다. 옛 방식이라면 추모 다례재를 거룩하게 지내는 것에 열과 성을 다하겠지만 나의 생각은 조금 바뀌어 있다. 윤회 환생하여 다시 돌아와 있을 어린 탄허를 위한 불교 강의 콘텐츠를 유튜브에 지속해서 올려 주어 친구들과 함께 스마트폰을 검색하다가 우연찮게 전생에 공부했던 불교의 지혜와 랑데부를 하게 된다면 우리는 눈 밝은 선지식 하나를 새롭게 얻게 되는 것이다. 그가 굳이 스님이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스티브 잡스처럼 불교 공부한 힘으로 심플한 선(禪)스타일로 새로운 문명을 개창하든지, ‘파친코’ 같은 명작드라마를 만들어 내어 세계에 한국을 알리든지, 자유자재한 힘을 불교의 지혜를 통해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불교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기회: 수행과 포교의 패러다임 시프트

변해 버린 시대에 변화한 젊은이들에게 근본 진여의 세계를 어떻게 현대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까. 이 물음은 반드시 현대적인 매체와 현재의 삶과 문화를 통해서 함께 고민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문제이다.

<화엄경>에서는 여래가 아니면 설하지 못해서 부처님이 직접 설법하셨다는 ‘아승지품’이 등장한다. 이 품에서 말하는 무량대수 중에서도 가장 큰 ‘불가설불가설전(不可說不可說轉)’이라는 수는 한량없는 변화의 양상에 대한 상징일지도 모른다. 유교의 주역에서도 영원히 세상은 변한다는 ‘변역(變易)’과 그 변한다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는 ‘불역(不易)’, 그리고 이 변화의 이치는 너무나 간단하다는 ‘간이(簡易)’의 삼역(三易)은 영원한 진리로 보았다. 이를 다른 말로 하자면 변하는 것이 있지만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공포심을 갖지 말고 전도몽상(轉倒夢想)에서 벗어나서 자신을 등불로 삼고 진리를 등불로 삼아야 한다는 불법(佛法)의 진리는 변함이 없는 것이다. 흘러가는 세상에 대해 두려움이 없이 적응하면 될 뿐이고, 걸림 없이 살면 될 뿐이다.

4차 산업의 기술 문명을 방편으로 잘 활용하고, 이제 기민하게 적응하여, 몽환포영(夢幻泡影)과도 같은 세상에 또다시 대중들이 속지 않도록 부동심(不動心)의 지혜를 담보해 주어야 할 근본 사명은 이 시대를 사는 스님들과 수행자들의 몫이 되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지피지기(知彼知己)의 마음으로 4차 혁명 운운하는 것을 활안(活眼)을 갖추어 좀 긴밀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불교신문 3722호/2022년6월2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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