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조 아미타여래불 모신 수려한 극락전 '유명'

'생육신 김시습'의 설잠스님 발자취 서린 곳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 숲 언제나 좋으며
태조암 왕복길은 심신치유로 '적합'

부여 무량사 극락전 설경. Pen drawing on korean paper. 53x38cm.
부여 무량사 극락전 설경. Pen drawing on korean paper. 53x38cm.

2021년 12월 한겨울의 추위가 매섭던 어느 날, 부여의 고즈넉한 천년 고찰 만수산 무량사를 찾았다. 이 곳은 부여 팔경 중의 한 곳으로 일 년 중 어느 때에 방문해도 사계절의 아름다운 숲이 언제나 반겨준다. 부여읍에서도 가까우며 여유롭게 산책하면서 힐링하기에 좋은 곳이다. 무량사는 시대의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한평생 올곧은 지조를 지키다가 굴곡진 삶을 마감한 생육신이었던 매월당 김시습으로 더 잘 알려진 설잠스님의 체취가 느껴지는 곳이다.

무량이란 '시간도 지혜도 세지 않고 도를 닦는 곳'이란 의미로 근처 마을 이름도 무량 마을이다. 이 절은 신라 말에 범일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무량사 일주문을 지나면 통일신라 시대에 처음 지어진 넒은 무량사의 옛 터가 나오는데 규모가 커서 임진왜란 이전에는 위용이 대단했음을 알게 해준다. 지금의 무량사는 실개천을 따라 더 깊은 곳 맞은편에 위치한다.

오래된 기둥에 세월의 무게를 이고 있는 일주문(광명문) 너머로 수령이 수백 년은 족히 넘었을 느티나무 숲이 아름드리 우거져 있다. 무량사로 들어가려면 극락교라는 다리를 건너게 되는데 사찰의 역사를 말해주는 사적비와 공덕비가 도열하듯 서 있고 잠시 쉴 수 있는 정자가 있어 잠시 쉬며 숨을 고른다.

극락교를 지나면 천왕문을 통해 보이는 장면이 마치 한 폭의 풍경화가 액자에 가득 차 있는 듯하다. 절묘하게 가지가 늘어져 멋들어진 풍경을 연출하는 거대한 느티나무와 소나무들 뒤로 신라시대 석등과 고려시대 5층 석탑 그리고 조선시대 진묵대사가 새로 지은 무량사의 주불전인 극락전이 일직선으로 한눈에 들어오는데 시대적 흐름과 웅장함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12월의 눈이 소복이 쌓여 설경의 운치를 더해준다. 이 자리의 감흥을 담아 가느다란 펜선으로 공력을 담아 그려 보았다.

무량사의 중심 불전인 극락전은 우리나라에는 흔히 볼 수 없는 백제 양식 중 2층 구조의 전각인데 내부로 들어가면 2층이 아닌 층고가 높은 1층 구조이다. 2층의 높이 덕분에 국내에서 가장 큰 소조 아미타여래 삼존불을 조성하여 모시고 있기도 하다. 천정에는 차안에서 피안으로 인도하는 반야용선도로 장엄하여 눈길을 사로잡는다. 현판은 설잠스님이 쓴 것으로 그의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 극락전 옆에 서 있는 배롱나무도 마치 설잠스님이 짚으셨을 주장자 같이 느껴져 정겹다.

대부분의 전각이 극락전 마당 옆의 지장전만 빼고는 극락전 서편 요사채인 우화궁을 끼고 우측 평지에 배치되어 있다. 역시 우측 편에 자리 잡고 있는 영산전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영축산에서 500제자들에게 설법하시던 영산회상도가 그려져 있다. 독특한 석탑과 햇살에 빛나는 판벽 구조의 작은 전각의 간결미에 심취해 한참을 바라보다가 눈과 햇살 그리고 그림자가 어우러진 이 장면을 작품에 담기로 했다.

부여 무량사 영산전. Pen drawing on paper. 45x38cm.
부여 무량사 영산전. Pen drawing on paper. 45x38cm.

영산전 오른 편에는 천수천안관세음보살을 모신 원통전과 영정각이 나온다. 영정각은 비단에 그린 반신상의 '매월당 김시습'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김시습의 영정은 조선시대 패랭이 모자를 쓰고 있는 야복 초상화 중 걸작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높아 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초상화는 인물의 내면을 담아야 걸작이라 한다는데 부릅뜬 눈에서 그의 곧은 정절과 기개가 느껴진다.

개울 너머에 삼성각과 청한당이 나란히 있다. 설잠스님의 호인 청한자(淸寒子)의 이름을 딴 '청한당(淸閒堂)'은 스님이 주석했다가 입적한 곳으로 단청이 없고 현판의 글씨가 예사롭지 않다.

일주문에서 우측 오솔길로 오른 끝자리에는 힐링코스로 추천할 만한 태조암이 있다. 이곳은 자동차가 다닐 수 있으니 몸이 불편한 사람도 쉬이 방문할 수 있다. 숲길이 아름다운 곳으로 알려진 이 곳은 시간 내어 올라가 보면 심신이 치유되는 곳임을 알게 된다.

다시 발길을 돌려 일주문에서 왼쪽 길로 다리를 건너면 무진암 입구에 부도탑이 있는데 '五歲 金時習之墓'라고 적혀 있는 것이 스님의 부도탑이다. '오세'라는 호칭은 세종대왕이 신동이라 불리는 스님의 어린 시절 글솜씨를 칭찬한 일에서 연유되었다고 한다.

스님이 입적한 후 곧바로 다비를 하지 않고 매장한 뒤 3년 후에 관을 열어보니 생전 모습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고 한다. 이를 본 스님들이 성불한 선지식으로 여겨 다비를 한 뒤 부도에 모셨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왕위 찬탈 과정에서 사육신을 처형한 뒤 임금이 된 세조를 비판하며 불문에 귀의한 후 평생을 은둔한 천재 시인 '매월당 김시습'으로 더 알려진 설잠스님. 옳지 않은 일에는 타협하지 않는 정신이 요즈음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주고 있다는 생각에 잠기며 무량사 기행을 마쳤다. usikim@naver.com

[불교신문 3720호/2022년6월1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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