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갑
김대갑

오래 전에 읽은 어떤 콩트 하나. 시대적 배경은 김영삼 정부 초기였으며, 언론을 통해 전두환과 노태우의 천문학적 비자금이 연일 폭로되던 시기였다. TV를 켜기만 하면 몇 천억 이라는 돈이 아무렇지도 않게 보도되었다.

공장에 다니는 두 젊은이가 비자금을 보도하는 뉴스를 시청하다가 심심파적으로 10원짜리 고스톱을 치게 되었다. 두 젊은이는 그저 허허 웃으면서 한참을 재미있게 쳤다. 그런데 서로 뺏고 빼앗기다 보니 제법 독이 오르게 되었다. 

“인마, 피박이잖아. 60원 줘야지 왜 30원만 줘.” “지나가면 그만이지.” “이 자식이. 야 아무리 10억짜리 고스톱이라도 너무 치사한 거 아냐.” “치사하긴 뭐가 치사해. 겨우 30억 갖고 핏대 올리는 네가 더 치사하다.”

두 젊은이는 한참을 억억거리면서 삿대질까지 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불현듯 자기들이 무심코 내뱉은 돈의 단위가 원이 아니라 억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매스컴에서 하도 억억거리니까 자기들도 모르게 원이라고 해야 할 것을 억이라고 했던 것이었다. 두 사람은 한참을 서로 쳐다보다가 갑자기 부둥켜안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몇 백억, 몇 천억이 우스운 세상에 10원짜리 몇 개를 놓고 다투던 자신들이 너무 초라했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아파트 정문에서 비스듬히 경사진 오르막길에 야채 장수들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다. 주로 아침 운동을 하는 주부들을 상대로 상추와 오이, 고추 등을 파는 노점상들이었다. 새벽부터 아침 9시 정도까지 반짝 시장이 열리는 것이었다. 비가 부슬부슬 오던 날, 나는 아파트 정문을 나섰다. 궂은 날씨에도 서너 대의 트럭이 자리를 잡고 있었지만 주부 손님들은 거의 없었다. 

나는 우산을 쓰고 아침 산책을 마친 후 집으로 돌아갔다. 야채 장수들은 여전히 비에 젖은 거리를 지키며 열심히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손님이 없자 야채 장수들은 이제 나에게 좀 사가라며 실없이 한마디를 던지곤 했다. 나는 다소 퉁퉁한 몸집의 야채 장수에게 다가갔다. 

상추 한 묶음을 내가 가리키자 그는 이천만이라며 벙싯 웃었다. 그와 나는 잠시 서로를 쳐다보며 웃었다. 나는 그에게 “여기 이천만 원입니다”하며 천 원 지폐 두 장을 건네주었고, 그는 “이천만 원짜리 야채 여기 있습니다”하며 비닐봉지를 내게 건네주었다. 그러나 그의 미소에는 씁쓸함이 묻어 있었다. 아마 그 웃음 뒤에는 겨우 이천 원짜리 하나 팔았다는 자조감이 섞여 있으리라. 

그의 씁쓸한 미소를 뒤로 한 채 나는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예전에 읽었던 그 콩트와 작년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수십 억 원의 퇴직금에 얽힌 기사가 오버랩되었다.

[불교신문3700호/2022년1월1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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