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톱이 켜켜이 쌓인 내성천 모습.불교신문
모래톱이 켜켜이 쌓인 내성천 모습. ⓒ불교신문

내성천변 물래실
                                                 구지평

 
어정쩡한 물안개가 저녁 강을 서성이다
속기 벗는 투명함에 산 빛이 검어질 때
실골목 저뭇해지는 내성천을 감싸고

굼닐대던 저녁연기 모래톱으로 불러내면
속 깊도록 시詩에 숨어 우련한 물래실이
갈라진 시간 틈새로 제 몸피를 드러낸다

허물어진 돌담 너머 마당귀에 마른 장작더미
텅 빈 방 잠긴 시간 푸른 여백 문장인데
이제야 적요를 푸는 한 올 한 올 자화상

평면으로 구겨지는 빛바랜 담초談草 위에
창문마다 달이 뜨면 거기에, 아! 거기에
묏등에 답청하시는 어머니가 서 있네

※물래실 : 경상북도 예천군 마을 이름
 


시조 당선소감 / 구지평

“금빛 반짝이는 내성천이 시조의 모태”

구지평
구지평

사무실 창밖으로 찌뿌듯한 눈발이 희끗희끗 날린다. 며칠째 일없이 심란하여 맥 놓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시대가 하수상한지라 모르는 전화번호는 잘 받지 않는 편인데 벨소리에 묻은 예기에 끌려 바로 받으니 당선 소식이다. 가슴에서 머릿속까지 헤집고 다니는 말글들이 뽁뽁거리며 입술을 내밀고, 산란기 무논에 붕어 튀어 오르듯 통통거리며 정신 줄을 튕긴다.

책상 위에 게으르게 누워있는 책들 속에 갇혀있던 문장도 스멀스멀 똬리를 풀고 제 공(功)을 자랑하듯 눈앞에 알짱거린다. 그래, 저것들 조탁하며 남은 생 보내라는 부처님 말씀인 게지! 늦깎이 시 공부를 시작한 지 10년째. 연로하신 아버님 둘째아들이 원을 풀었다. 한국문인협회 평생교육원에서 어설프기 그지없는 무지렁이를 야무지게 무두질 해주신 이승하 교수님과 문우님들, 격조 있는 시조 세계와 에스프리의 멋을 깨우쳐 주신 윤금초 교수님과 열린시조학회 문우님들께 감사의 큰절을 올린다. 그리고 코로나에 발목이 잡혀 텅 빈 손이라고 생각한 신축년 한 해를 무한한 기쁨으로 채워주신 심사위원님께 감사의 말씀 올린다. 힘든 시기 함께 보낸 사랑하는 가족들과 뇌리를 스치는 많은 분들께도 고마움을 전하며 잊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졸작의 배경인 물래실은 소백산 등짝을 따라 한참 내려오다 보면 끝자락에 매달린 산골 마을이다. 열 번이 넘는 아버지의 복막염 수술로 형편이 어려웠던 세월이었지만 떠나온 지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머릿속에는 물기 머금은 모래사장이 금빛으로 반짝이던 내성천이 흐른다. 그 배고팠던 때도 부뚜막 한 쪽에 조그마한 단지를 두고 아침마다 곡식 한 줌을 모아 탁발하러 오신 스님께 시주하던 어머니가 눈에 선하다. 남에게 건넨 해로운 말이 다 자식에게 돌아온다며 평생 말을 아끼시던 어머니, 하루 종일 물만 마셔도 배가 부르다던 어머니, 어머니가 2020년 2월에 귀천하셨다. 보셨으면 얼마나 기뻐하실까. 이 기쁨과 영광을 어머님 영전에 바친다.
 


➲ 시조 심사평 /  문태준 시인

“신선한 감각과 고요한 시심 돋보여”

문태준
문태준

불교신문 ‘2022 신춘문예’에 응모한 시·시조 부문 작품들을 꼼꼼하게 읽었다. 불교문인의 등용문인 만큼 응모한 작품들의 경향도 예년과 다름이 없이 불교적 소재를 시적인 모티프로 삼은 경우가 주를 이루었다. 사찰 공간과 주변 환경, 수행, 불교와의 인연 등을 노래한 작품들이 많았다. 특히 불교의 연기법, 공(空), 무심과 무욕 등을 노래한 시편들은 예년의 시편들보다 깊고 확장된 시심(詩心)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다만, 한 편의 좋은 시는 빈틈없이 꽉 찬 상태에 있지 않고 오히려 흰 여백에 의지할 때가 많고, 읽는 사람이 개성적인 독해의 내용으로 그 여백을 마저 채우게 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당선작 선정을 두고 크게 고민한 작품들은 ‘두고 간 신’, ‘반가사유상’, ‘고목’, ‘내성천변 물래실’이었다. ‘두고 간 신’은 낡은 구두를 보며 아버지의 일생을 가늠하는 작품이었다. 작고하시기 전 구두를 닦고 끈을 묶어 신발장에 가지런하게 두었다라고 쓴 대목은 감동이 컸지만 술회의 방식이 다소는 산문적이라는 느낌을 갖게 했다. ‘반가사유상’은 마음이 안정의 세계에 머물게 된 일을 목수의 목공의 일에 견주고 있는데, 시를 짓는 데에 익숙한 솜씨를 보여주었지만 번뇌의 소진과 맑은 명상을 죽음의 상태인 ‘관’에 견준 점은 다소 의아했다. ‘고목’은 벌판에 선 고목을 노스님으로 여기고 쓴 작품이었다. 고목이 “옥빛 낮달 하나 걸치고” 있고, 스스로 적막 그 자체가 되어가고 있다고 적은 시구들은 깨끗한 시심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눈꽃들이 입적해 있다”라고 쓴 시구 등은 다소 과장되어 있는 듯했다.

긴 고민 끝에 ‘내성천변 물래실’을 당선작으로 뽑았다. 이 시조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되는 풍경을 응시하는 고요한 시심이 돋보였다. 시행을 따라가며 읽을 때 잡스럽고 탁한 것을 걷어내며 밝고 환한 달이 떠오르는 모습을 절로 상상할 수 있었는데, 그러할 때에 어떤 환희 같은 것을 느끼게 했다. 시어의 선택이나 시상의 전개가 매우 자연스럽고 또 신선한 감각을 선보여 신뢰감을 안겨 주었다. 앞으로 더 많은 가편(佳篇)들을 보여주시길 당부 드린다. 당선을 축하드린다.

[불교신문3698호/2022년1월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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