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병의 심정으로 고녕가야사 바로잡으려 한다

일제는 조선의 얼을 없애기 위해
한국 기상을 상징하는 웅주의
뿌리 의식을 없애려 획책했다

상주 문경의 출발이자 최초국가
고녕가야 역사 멸절시키는 것이
대(對)조선 식민정책에 있어서
지중한 현안으로 떠오른 것이다

함창 고녕(古寧)가야는 웅주(雄州)이며 상주 문경의 뿌리역사이다. 사진은 함창 고녕가야가 한 눈에 보이는 문경 봉천사에서 바라본 고녕가야의 전경.
함창 고녕(古寧)가야는 웅주(雄州)이며 상주 문경의 뿌리역사이다. 사진은 함창 고녕가야가 한 눈에 보이는 문경 봉천사에서 바라본 고녕가야의 전경.

함창 고녕(古寧)가야는 웅주(雄州)이며 상주 문경의 뿌리역사이다. 상주를 일컬어 상락(上洛)이라 부르는 것은 위쪽에 있는 가락이라는 말이요 상주의 고명(古名)이 낙양(洛陽)인 것은 가락의 남쪽 따뜻한 곳이라는 의미다. 낙강(洛江)이 낙동(洛東)인 것은 가락의 동쪽으로 흘러가는 강이라는 뜻으로 일찍부터 상주는 가락을 토대로 성립된 고을임을 말해준다.

일제는 조선의 얼을 없애기 위해서 한국 기상을 상징하는 웅주(雄, 수컷 웅)의 뿌리의식을 없애려 획책했다. 상주 문경의 출발이자 최초국가인 고녕가야 역사를 멸절시키는 것이 대(對)조선 식민정책에 있어서 지중한 현안으로 떠오른 것이다. 상주의 별칭인 웅주(雄州)는 물산이 풍부한 큰 고을이라는 외적인 뜻 외에 수컷의 힘을 나타내는 내재적 의미가 숨어있다.

일본인들의 고대사와 뿌리의식에 대한 집념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집요하고 오래되었다. 그와 병행하여 조선에 관련한 부분은 철저히 부정하고 왜곡했으며 그 대표적인 예가 고조선과 가야사 대목이다. 한일 합방 초대총독 데라우치의 주요 정책 중 최악은 조선인으로 하여금 조선의 역사를 배우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심지어 금관가야의 주역인 김해김씨의 족보를 편찬하거나 열람하는 것조차 범법조치로 취했다고 전한다. 조선사편수회를 만들어 우리의 사서 수십만 권을 수집하여 불태우거나 일본으로 빼돌렸다.

기존에 전해오던 조선의 역사는 철저히 말살하고 총독부 관할 하에서 편찬한 일본관점의 조선사를 조선학생들에게 주입시켰다. 유목민들이 짐승의 불알을 까서 수컷들을 순치시켰다면 제국주의자들은 정복한 국가민족의 역사를 없앰으로서 그들의 뿌리의식을 거세시켰던 것이다. 이것은 일본제국주의 뿐 아니라 고금을 막론하고 승자는 패자의 역사와 종교를 지워나갔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조선의 기상으로 상징되는 웅주(雄州) 고녕가야 역사를 말살시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조치였을 것이다. 고녕가야를 비롯한 가야사 회복운동은 단순히 지나간 역사를 되찾자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바로 미래영토에 대한 역사적 증거에 관한 부분이기에 결코 국내외 식민사학자들의 간계에 넘어가서는 안된다.

지난 1970년대 경주 대릉원 고분에서 발견된 왕관 중에서 금관은 왕비의 것으로 판명되고 은관은 왕의 것으로 확인된 바 있다. 경상도의 양대 세력이자 삼국통일의 두 축인 경주에는 금척(金尺)이 있고 상주에는 은척(銀尺)이 있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성 성(姓)을 나타내는 금자가 묻혀 있는 경주는 우리 역사상 유례가 없을 만큼 화려한 불교문명을 꽃피웠다.

이에 비해 남성성을 상징하는 은자의 고장 상주는 조선의 역사를 바꾸는 큰 전쟁을 수없이 치렀다. 전쟁은 어느 지역을 막론하고 벌어졌지만 삼국이 국운을 걸고 치러지는 대다수의 전쟁은 상주 문경을 근거지로 치러졌다는 점도 주목할 부분이다. 일본제국주의 설계자들은 이러한 역사적 맥락을 치밀하게 계산했으며 고녕가야의 실체를 왜곡함으로서 웅주의 호연지기를 차단하고자 했던 것이다. 함창고녕가야의 기반인 상주 문경은 낙동강과 한강을 이어주고 백두대간이 지나가는 삼국의 접경이자 요충지다.

마한이 백제에 병합되는 과정에서 최후까지 항전한 곳이 문경 옆에 있는 용궁의 원산성이었다. 신라가 여러 가야를 정벌하고도 오랫동안 완전히 굴복시키지 못하고 신라의 양대 축으로 남은 세력 또한 상주세력이었다. 그 후 삼국통일의 완성과정에서 당의 소정방이 신라의 김유신에게 목 베인 곳은 함창과 점촌사이에서 벌어진 당교전투에서다. 후삼국이 창궐할 때 후백제의 기수로 등장한 견훤의 출생지는 현재 문경시 가은읍이다.

견훤과 왕건이 사활을 걸고 싸울 때 결정적으로 왕건이 기선을 잡은 곳은 문경시 산양벌에서의 싸움이다. 이때 근품성(近品城)을 뺏음으로 상주 문경의 많은 호족들이 왕건으로 넘어갔다. 고려말 30만 홍건적을 물리칠 때 정몽주와 이성계 등을 발탁하고 끝내는 상주에서 전사한 김득배 장군이 출생한 곳은 문경시청이 소재한 점촌(店村) 깃골이다. 몽고군이 내려올 때 백화산 전투에서 몽고장수 자랄타를 저격하여 물리친 홍지스님이 활동한 곳은 상주시 은척에 소재한 황령사이다.

이 뿐 아니라 임진란 시(時) 바다의 이순신 장군과 쌍벽을 이루며 육지에서 활약한 정기룡 장군의 활동영역과 유택이 마련된 곳도 바로 상주다. 구한말 이강년 의병장을 비롯한 숱한 영웅들이 조선의 척추격인 상주 문경에서 이 나라의 운명을 결정짓는 많은 전투를 수행한 것이다. 일제가 고녕가야 역사를 말살시킨 결과 우리 고대사는 전반적으로 왜곡되어 표류하고 있다. 지역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전국에서 열 손가락에 들만큼 큰 고을이었던 상주가 지금은 50위 안에도 들기 어려운 인구 9만의 지방 소도시로 전락하였다.

일제는 ‘임나일본부’라는 요물을 만들어 과거 3~4세기에 한반도 남부를 지배경영했다는 허구의 역사작업을 1세기 이상 진행해왔다. 그들은 ‘고토회복’이라는 명분을 만들어 언제든지 침략할 수 있는 구실을 마련하고자 하는 것이다. 고녕가야를 비롯한 가야사 부정은 한국입장에서는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중대한 사안이다. 중국의 동북공정과 함께 한국의 과거뿐 아니라 미래의 운명과도 뗄 수 없는 긴밀한 역학관계를 갖고 있는 것이다.

일본식민사학자들의 고녕가야 말살정책을 보좌하고 앞장서서 집행한 국내 학자로는 이병도 박사가 단연 으뜸이다. 그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나오는 고녕가야 역사를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해석했다. 천자문을 뗄 정도의 삼척동자라도 범할 수 없는 실수 아닌 실수를 범해서 고녕가야 역사뿐 아니라 가야사 전체를 파괴하는 식민사학의 첨병으로 활약했다. 예를 들면 <삼국사기>에는 분명히 함녕(현 함창)이 나오고 문경, 가은, 호계 등 현재 우리들이 살고 있는 지명들이 적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경남의 ‘진주’를 고녕가야의 터전으로 비정했다.

이것은 이병도 박사 개인의 실수나 의지가 아니라 식민정책당국자들의 의지를 반영한 것임에 틀림없다. <삼국유사>에도 고녕가야는 “금(今) 함녕(현 함창)”이라고 선명하게 적혀있다. 이것을 두고 이병도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잘못됐다”면서 “함창 고녕가야는 부자연스러우니 진주 고녕가야라 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했다.

이병도 박사의 ‘비정하고 싶다’는 한마디 말에 의하여 반드시 거쳐야하는 충분한 검토와 고찰 없이 지금까지 함창 고녕가야는 진주 고녕가야로 둔갑했다. 교과서는 물론이고 각종 학술지에도 버젓이 진주 고녕가야로 기술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 사이 수천 기의 함창 고녕가야 고분은 방치되고 도굴되었으며 왕관을 비롯한 각종 부장품들은 세상도처에 족보를 숨긴 채 떠돌고 있다. 우리들을 더욱 안타깝게 하는 것은 함녕(함창) 고녕가야를 부정하는 것이 이병도 한사람에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고대사 학자들의 통설이라는 점이다.

이제는 한 발 더 나아가 금관가야를 비롯한 가야사 전체를 왜곡하고 일본서기의 임나지명을 우리 역사지도에 집어넣으려는 시도가 막바지에 달했다. 그들은 일본식민사학자들의 지론을 받들어 <삼국유사>의 허황후 도래설과 가야불교 자체를 부정하려한다. 파사석탑을 비롯한 광유화상의 도래(渡來) 그리고 수로왕 7왕자의 칠불사 출가와 수도설을 일연선사의 허황된 소설로 각색시키고 있다. 단군성조를 기록한 부분역시 승려들의 망령된 낭설로 취급하며 일본학자들의 논리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뼈아픈 현실이다.

광복된 지 80년이 다가오지만 가야사의 현실은 위험천만한 식민사학이 점점 고착화되고 있다. 일본이 침략과 합방의 근거로 삼는 임나일본부 작업은 지금도 쉼없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것은 일본 우익학자뿐 아니라 우리나라 주류학자들에 의해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 우리로 하여금 잠 못 들게 한다. 역사의 주권은 바로 영토의 주권으로 이어지기에 중국은 동북공정을 고집하고 일본은 허망한 ‘임나일본부’의 전략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 우리나라 주류학자들 대부분이 일본식민사학의 관점에서 우리 고대사를 해석하고 있다. 당연히 동북공정과 임나일본부에 대하여 묵시적 인정을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국가이익과 진실규명은 외면하고 학자들 개인과 파벌의 명리(名利)에만 급급하고 있는 현실이다. 나라가 나라다우려면 최소한 장차관이나 역사학자들은 개인의 영달보다는 애국심과 보살심이 선행되어야 한다.

필자는 지난 8월 함창에서 함창고녕가야 역사회복을 위한 학술대회를 주관하였다. 주최는 동국대학교 한국불교사학회 한국불교사연구소(소장 고영섭)가 맡았다. 그동안 수년 간 고녕가야의 사료와 유적조사를 위해 ‘고녕가야선양회원’ 여러분들과 동분서주하였다. 어느 교수가 건의하기를 불교가 앞서고 스님이 전면에 나서면 참여하는 사람들의 범위가 적어질 수 있다고 염려의 의사를 비쳐왔다.

이에 대해 “나라가 해방된 지 100년이 다가오는데 고녕가야사 부분에 있어 여전히 일본식민사학을 답습하고 있는데 누군가는 나서서 밝혀야 한다. 이러한 중차대한 문제를 정부에서 외면하고 국립대학에서 방기하고 있지 않느냐? 더군다나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 국사학계는 오히려 식민사학을 공고화하는데 전력을 쏟고있지 않느냐? 나는 승병의 심정으로 대한민국 정부와 사학계가 방치하고 외면한 고녕가야사 왜곡을 바로잡으려 나선 것이다.

더군다나 <삼국유사>는 일연스님이 저술했으며 <삼국사기>도 불교가 국교인 고려시대의 유작이 아닌가? 심지어 <삼국유사>에 나오는 가야불교사나 단군고기를 승려들의 망설(妄說)이라고 폄하하는데 어찌 눈뜨고 보고만 있겠는가? 또 말 많은 <일본서기> 내용 중 상당 부분이 불교내용이기 때문에 불교대학과 승려가 나서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고 강변했다.
 

지정스님
지정스님

■ 필자 지정스님은…

1965년 영덕 출생. 1984년 봉암사 출가. 1986년 서암대종사를 은사로 자운대종사를 계사로 사미계 수계. 법주사 승가대학, 실상사화엄학림, 전국선원에서 10하(夏) 성만,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졸업. 법주사승가대학 강사, 장안사 주지, 직지사 교무 역임. 현 문경 봉천사 주지이자 고녕가야선양회 대표.

[불교신문3691호/2021년11월1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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