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생멸심 중생심으로 인식되는 것”

무명을 없애면 윤회하지 않아
끝없는 순환의 시간은 멈추니
열반적정에서 시간은 무의미

“존자 나가세나여! 지금 당신은 ‘전체 시간의 최초의 시원(始原)은 인식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에 관해 비유를 들어 설명해 주십시오.” 
“대왕이시여! 예를 들면 사람이 작은 종자를 땅에 심으면 그로부터 싹이 생기고 점차 증대하고 성장하고 광대하게 되어서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그 열매에서 또 종자를 취하여 다시 땅에 심으면 그 열매에서 싹이 생기고 점차 증대하고 성장하고 광대하게 되어서 열매를 맺듯이 그와 마찬가지로 이 개체의 연속에는 끝이 있겠습니까?” 
“끝이 없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시간의 최초의 시원(始原)도 또한 인식될 수 없습니다.”

“다시 비유를 들어 설명해 주십시오.” 
“예를 들면 닭이 알을 낳고 알에서 닭이 생기며 또한 닭에서 알이 생긴다고 하는 것처럼 이 연속에는 끝이 있습니까?” 
“끝이 없습니다.”
나가세나 존자는 땅 위에 동그라미를 그려놓고 다시 말했다.
“대왕이시여, 이 동그라미에 끝이 있습니까?” 
“끝이 없습니다.” 
“대왕이시여! 그와 마찬가지로 위대한 스승이신 붓다께서는 ‘육근(六根, 여섯 가지 감각기능)과 육경(六境, 여섯 가지 감각대상)을 원인으로 해서 촉(觸, 감각기능과 감각대상의 접촉)이 일어나고, 촉(觸)을 원인으로 수(受, 느낌)가 일어나고, 수(受)를 원인으로 애(愛)가 일어나고, 애(愛)를 원인으로 취(取)가 일어나고, 취(取)를 원인으로 업(業)을 짓는다. 그리고 업(業)은 다시 육근(六根)을 일으킨다’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순환구조의 연속에 끝이 있겠습니까?” 
“끝이 없습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시간의 궁극적 시원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삽화=손정은
삽화=손정은

시간은 의식의 변화로 인식할 수 있다. 의식의 변화로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을 인식할 수 있으며 이것의 근원은 이전의 대화에서 무명(無明)이라 정의했다. 무명은 12연기의 시발점인 동시에 중생이 일으키는 생멸심, 분별심 등의 근본번뇌이다.

부처님께서는 정각(正覺)을 이루시고 난 후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한량없는 세월의 생사윤회 속에서 집을 짓는 자가 누구인지 알려고 찾아 헤매다 찾지 못하여 계속해서 태어났으니 이것이 고(苦)였네.” “아, 집을 짓는 자여! 나는 이제 너를 보았노라! 너는 이제 더 이상 집을 짓지 못하리라! 이제 모든 서까래는 부서졌고 대들보는 산산이 조각났으며, 나의 마음은 열반에 이르렀고, 모든 욕망은 파괴되어 버렸느니라.”<법구경>

부처님의 오도송에서 알 수 있듯이 ‘나’라는 인격적 개체는 무명으로 인해 중생이라는 집을 짓고 고(苦) 속에 침잠되어 무구한 세월 헤매고 있다. 육근(六根)과 육경(六境)으로 현상세계를 인식하고 애취(愛取)로 끝없는 욕망을 불러일으키며 여러 생(生)을 전전(轉傳)하며, 그런 가운데 시간은 인식되어질 뿐이다.

집을 짓는 자(者), 즉 무명(無明)을 보았다면 그 허상을 떠받치고 있는 촉(觸), 수(受), 애(愛), 취(取), 유(有)를 멸하여 드디어 모든 것이 적정(寂靜)한 열반(涅槃)의 세계에 드는 것이다. 무명을 멸했기에 다시는 윤회하지 않으며 끝없는 순환의 시간은 드디어 멈추는 것이다. 시간은 생멸심, 분별심의 중생심으로 인식되는 것이며 열반적정의 세계에 시간은 무의미하다.

[불교신문3687호/2021년10월1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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