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언과 법력으로 왜구 제압 기원했던 호국 화엄도량

678년 문무왕대 의상대사 창건
8세기 중엽 흥덕왕대 크게 중창

현대 禪본찰, 독립운동 산실 유명
眞影, 바위 능선 곳곳 義湘 흔적

사찰은 다양한 신앙과 역사를 품고 있다. 신앙에 따라 관음·약사·나한도량 등으로 구별하며 역사에 따라 능찰·비보사찰 등 다양하게 부르기도 한다. 주제가 있는 사찰 기행은 사찰의 신앙과 전해오는 역사를 중심으로 살펴보는 기획이다.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사고(史庫) 수호사찰에 이어 화엄종 대표 사찰을 소개한다.

원효암 뒤편 원효대에서 바라본 부산 금정산 범어사 전경. 오른쪽이 의상대다. 화엄십찰로 1500년 전통을 이어온 범어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원효암 뒤편 원효대에서 바라본 부산 금정산 범어사 전경. 오른쪽이 의상대다. 화엄십찰로 1500년 전통을 이어온 범어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화엄십찰을 기록한 두 문헌, 최치원의 ‘법장화상전’과 <삼국유사> ‘의상전교편’ 두 곳 모두에 등장하는 사찰은 태백산 부석사, 가야산 해인사, 지리산 화엄사, 금정산 범어사, 비슬산 옥천사다.

부석사는 7세기 말 의상이 창건하고 주석하며 제자를 길러 낸, 화엄종찰이며 최초 화엄대학이다. 부석사에서 발원한 화엄은 낙동강을 따라 점차 남하한다. 성장 동력은 왕실이나 귀족이 아니라 교육과 수행을 통해 대중적 지지를 얻어 자체 성장한 고승과 이를 지원하는 단월이었다. 수행과 교화를 통한 교단 발전이라는 종교조직의 전형적 성장 단계를 의상의 화엄종은 처음으로 이 땅에 선보였다.

➲ 국가 차원 가람 중창 범어사

자체적으로 성장한 화엄교단은 신라 중기를 지나면서 힘이 약화된 왕실과 결합하여 전국화 조직화 된다. 교학 측면에서도 시대 상황과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이며 조금씩 변화한다. 80화엄 수용, 원효 계통 기신론 도입 등이 이에 속한다. 8세기 중엽 남악의 화엄사나 9세기 초의 북악 해인사가 이러한 배경 아래 탄생하고 성장했다.

이러한 경향은 신라 후대로 가면서 더 짙어진다. 왕실 권위가 약화되고 반대로 지방과 귀족의 영향이 강성해질수록 화엄종의 지방 확산과 사찰 건립도 강화된다. ‘화엄십찰’ 금정산 범어사의 탄생 성장 배경이다.

현재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546번지 금정산(金井山)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14교구 본사 범어사(梵魚寺)는 선찰대본산(禪刹大本山)이라는 명칭에서 보듯 한국 선종 가람중심이다. 

경허선사가 기호 지방에서 영남으로 오기 전부터 성월스님이 선원을 열고 참선 정진했으며, 일제 시대에도 대처가 아닌 비구승이 주지를 맡아 부처님 이래의 청정 불교, 민족불교를 지켰다. 그 역사가 3·1운동을 주도하고 해방 후 비구 중심의 조계종 창종 운동을 이끌었다. 계율에 바탕을 두고 화두 정진하는 조계종이 백용성 하동산스님으로 이어지는 범어사의 가풍에서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계율에 바탕을 두고 화두선을 참구하며 민족정신이 깃든 화엄십찰, 범어사의 과거며 현재요 미래다.
 

금정산에서 부산 앞바다를 바라보며 서있는 의상대.
금정산에서 부산 앞바다를 바라보며 서있는 의상대.
신라 흥덕왕 시절 크게 중창할 당시 만든 것으로 보이는 석등.
신라 흥덕왕 시절 크게 중창할 당시 만든 것으로 보이는 석등.

➲ 기도로 왜구를 물리치다

범어사 역사를 전하는 가장 오래된 기록은 최치원의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이다. 최치원은 범어사를 신라 하대 화엄십찰(華嚴十刹) 중 하나로 거명했다. 이후 고려 중엽에 편찬된 <삼국유사> ‘의상전교’조에 다시 등장한다. 조선 중기 1530년(중종 25)에 완성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보다 자세한 설명이 들어있다. 금정산과 절 이름의 유래가 나온다. 통일신라 시대에 창건돼 금정산 우물에서 살았다는 물고기로 인해 범어사라고 지었다는 이야기다.

“(금정산은) 현의 북쪽 20리 지점에 있다. 산마루에 바위가 있으니 높이가 세 길쯤 된다. 위에 우물이 있는데 둘레가 10여 척이고, 깊이가 7촌 쯤이다. 물이 항상 가득 고여 있어 가뭄에도 마르지 않으며, 빛이 황금과 같다. 세상에 전해 오기를 한 마리의 금색 물고기가 오색 구름을 타고 하늘로부터 내려와 그 속에서 헤엄치며 놀았기 때문에 산 이름을 이렇게 지었다. 여기에 인연해서 절을 짓고 범어사라 불렀다고 한다.”

그런데 사중에 전해오는 역사는 이 보다 훨씬 자세하고 다른 문헌에 없는 내용이 나온다. <고적(古蹟)>(1700년)과 <범어사창건사적(梵魚寺創建事蹟)>(1746년) 등 조선시대 후기 기록이 그것이다. <고적>에 따르면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의상대사가 흥덕왕에게 비책(秘策)을 제시하고 왕이 이를 받아들여 835년(흥덕왕 10)에 의상대사가 창건했다.

“왜인이 10만의 병선을 거느리고 신라를 침략하려 하였으므로 대왕이 근심하고 있었는데, 문득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서 의상을 청하여 화엄신중기도를 올릴 것을 권했다. 신인은 ‘태백산 속에서 의상이 3000명의 대중을 거느리고 화엄의지법문(華嚴義持法門)을 연설하며, 화엄신중(華嚴神衆)이 항상 그 옆을 떠나지 않고 수행하고 있다. 또 동국해변에 금정산이 있고, 그 산정에 높이 50여 척이나 되는 바위가 솟아 있는데, 바위 위 우물은 항상 금색이며 사시사철 언제나 가득 차 마르지 않고, 범천으로부터 오색구름을 타고 온 금어(金魚)들이 헤엄치며 놀고 있다. 대왕이 의상을 청하여 함께 금정산 아래로 가서 7일 동안 화엄신중을 독송하면 왜병이 자연히 물러갈 것’이라고 했다. 왕이 그대로 했더니 왜선들끼리 서로 공격하여 모든 병사가 빠져 죽고 살아남은 자가 없었다. 왕이 매우 기뻐하여 의상을 예공대사(銳公大師)로 삼고 범어사를 창건하였다.”
 

범어사 성보박물관에 소장한 의상 진영. 사진제공=범어사 성보박물관
범어사 성보박물관에 소장한 의상 진영. 사진제공=범어사 성보박물관

➲ 화엄 밀교 호국관 결집 범어사

설화형식을 띠고 있지만 화엄사찰로 중창한 범어사의 유래를 알 수 있다. 흥덕왕과 의상의 시대가 맞지 않는 부분은 화엄사찰로 중창하면서 의상의 권위에 기대기 위한 역사서술의 한 형태로 볼 수 있다.

범어사 사중에 전해지는 문헌을 비롯한 여러 기록과 시대 상황을 고려할 때 범어사 창건은 몇 가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첫째 문무왕대에 의상이 초창했거나 인연을 가졌다가 신라 흥덕왕 대에 기존에 있던 사찰을 크게 중창하면서 국가 차원의 대가람으로 일신했을 가능성이다. 범어사 대웅전 앞의 석등 석탑 원효암 탑 등 범어사를 중창했을 당시 유물이 상당수 남아있고 금정산의 원효암 의상대 의상능선 등 이름이 현존하는 것은 범어사의 역사와 전통을 전해준다. 지형을 따라 일주문에서 점차 위로 올라가며 장엄하게 펼쳐지는 화엄사찰 특유의 가람구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신라 수도 경주와 멀지 않은 지리적 위치, 범어사 인근 양산 등지에 의상 원효 관련 전설이 많은 것 등을 볼 때 678년 의상 창건설이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두 번째는 범어사가 국가 차원에서 건립되었다는 사실이다. 기도와 의상의 법력에 기대 외침을 막으려는 영험담에서 이를 알 수 있다. 통일 왕조를 수립한 문무왕의 해상왕릉설, ‘만파식적’ 같은 설화는 모두 외적, 특히 동해 바다 건너 왜구와 관련 있다. 그만큼 신라 대부터 왜구는 나라의 큰 근심이었다. 

범어사가 자리한 동래와 금정산은 왜구의 해상 침투로 초입이다. 이 곳이 뚫리면 수도 경주 배후가 노출된다. 울산이 경주로 곧장 향하는 직선로라면 동래는 그 배후로 돌아가는 입구다. 흥덕왕은 해상로의 중요성을 알고 이를 개척한 인물이다. 

장보고로 하여금 청해진을 개척해 동북아 서해 제해권을 장악하는 길을 연 인물이 흥덕왕이다. 그 역시 백성들의 지지를 받고 뛰어난 학승이 많았던 화엄종파와 손잡고 약화된 왕실을 강화하려고 했다. 이러한 점들을 볼 때 흥덕왕은 동해와 남해의 중간 지대며 낙동강에 면한 금정산을 전략적 요충지로 삼으면서 화엄으로 왕실 번영을 꾀하고자 했을 것이다.
 

화엄십찰로 1500여년 역사를 자랑하는 범어사 전경.
화엄십찰로 1500여년 역사를 자랑하는 범어사 전경.
범어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만나는 화엄종찰 표지석.
범어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만나는 화엄종찰 표지석.

➲ 1500년 역사 자랑

세 번째는 밀교적 요소다. ‘기도로 왜적을 물리치는 비책’은 밀교에서 나왔다. 밀교 계통에서 가장 유명한 신라 고승은 신인비법(神印秘法)으로 당나라 군대의 침공을 물리쳤다는 명랑법사와 진언(眞言)을 외워 신문왕의 등창을 낫게 했다는 혜통을 들 수 있다. 

밀교의 소의 경전인 <대일여래경>의 주불이 법신 비로자나불이라는 사상적 근거와 신라후기에 화엄종파의 성장과 함께 밀교도 번창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범어사는 두 불교사상이 결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미 오대산에서 <화엄경>의 문수보살과 밀교 전통 산악신앙이 결합하여 오대산신앙을 낳았다는 점에서 화엄과 밀교의 결합은 낯선 광경이 아니다.

의상이 창건하고 제자 표훈(表訓)이 주석했으며 왜구를 진압하는 비보사찰(裨補寺刹) 범어사는 이처럼 당시 시대 상황과 국가적 부름, 불교사상 등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진 말 그대로 화엄의 결정판이었다. 

이러한 뿌리 깊은 역사와 오랜 전통이 임진왜란으로 불탔지만 다시 일어나 수많은 고승을 배출하고 민족불교 정통성을 유지하며 튼튼한 계율에 바탕을 둔 선찰대본산(禪刹大本山)으로 우뚝 서는 원천으로 작용했다.

부산=박부영 논설위원 chisan@ibulgyo.com

[불교신문3677호/2021년8월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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