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이, 그 사람이, 그 모든 것이, 원래 다 내 것이었다”


건강을 한 번 잃은 이가 다시 건강해지게 되었을 때,
그는 행복을 느끼게 된다.
우리가 이 세상 전부를 가졌을 때 행복해지게 되는 이유는,
이 세상 전부가 원래 우리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행복은 언제나 재회의 속성을 갖는다.
곧, 다시 만나게 된 것이 행복이다.
원래 내 것이었던 것을 다시 찾게 된 것이 바로 행복이다.

이제 이 시냇물이 자신의 것이라는 것을 이해한 자는,
더는 시냇물을 가지려 하지 않는다.
시냇물의 주인으로서 그 자신을 증명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시냇물을 흐르게 한다.
시냇물이 그저 시냇물로서 자유하게 한다.
그럼으로써 목이 마를 때는, 그저 자유롭게 시냇물을 마실 뿐이다.

삽화=손정은
삽화=손정은

 

불교상담은 사람들의 일상생활 이야기다. 임인구의 ‘어엿한 그대’는 사람들이 일상에서 체험하는 마음이, 또 그 마음을 체험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온전한지를 묘사함으로써, 우리가 이미 어엿하게 서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연기법에 근간하여 역설과 상호관계성의 원리로 안내한다. 마음으로 살아가는 이들을, 그리고 마음 자체를 친구처럼 또는 연인처럼 대하는 직접화법으로 구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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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떠한 때 행복을 느끼는가? 가질 때다. 원하는 것을 가질 때 우리는 행복해진다. 이 말은, 욕망이 이루어질 때 우리는 행복해진다는 것이다.


우리가 불교라는 종교적 전통을 생각할 때, 함께 떠올리게 되는 오해가 있다. 그것은, 불교는 욕망을 극복하고, 나아가서는 금지하고자 하는 전통이라는 오해다. 이에 따르면, 욕망은 고통의 원인이나, 동시에 살아가는 데 있어 필요악과 같으니, 다만 최소한도로 욕망함으로써 욕망이 이루어지지 않는 데서 오는 고통을 줄이는 것이 참된 삶이 된다.


대단히 많이 양보해서, 이것을 불교라고 해도 좋다. 그렇다면 극단적으로 말해서 선(禪)은 불교가 아니다. 그렇게 선은 불교가 아님으로써, 역설적으로 더욱 불교가 된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스승을 만나면 스승을 죽인다는, 살불살조의 정신은 여기에서 나온다.


선은 욕망하고자 하는 길이다. 곧, 가지고자 하는 길이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행복하고자 하는 길이다. 다만 스케일이 다르다. 선은 가장 크게 욕망하는 것이다. 작게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다 소유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모든 것이 행복한 것이다.


우리가 소유할 때 행복하다면, 우리가 다 소유할 때 그 행복은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귀하다고 보는 것들을 소유하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세상 전부를 다 소유하려고 할 때, 그것은 이 세상 전부를 귀하게 보고 있다는 뜻이 된다. 어느 것도 하찮은 것이 없다는 뜻을 드러낸다.


이것은 상대적 문법에서 절대적 문법으로의 전환이다. 선은 이처럼 행복의 절대적 문법으로 이행하는 길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행복의 절대적 문법으로만 정말로 행복할 수 있다. 다 소유하려는 것, 이것은 욕망의 본모습이다. 우리가 이 욕망의 본모습을 잊고서, 욕망을 상대적이고 부분적인 것으로 만들어 그 기준에 따라 선별된 특정한 몇 가지만을 소유하고자 할 때, 우리는 사실 충분히 행복하지 않다. 그 몇 가지를 소유하더라도 만족감은 이내 사라지며 다시 또 새로운 것을 소유하고 싶어진다. 이것은 실증적인 이야기다.


우리는 고작 그 정도로 행복해질 수 없다. 우리는 가장 크게 텅 빈 그릇과 같기 때문이다. 우리의 빈 공간은 정확하게 이 세상 전부에 대응된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 전부를 다 가져야 비로소 행복해진다.


여기에서 행복의 중요한 속성이 알려진다. 예를 들어, 건강을 한 번 잃은 이가 다시 건강해지게 되었을 때, 그는 행복을 느끼게 된다. 이와 같다. 우리가 이 세상 전부를 가졌을 때 행복해지게 되는 이유는, 이 세상 전부가 원래 우리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행복은 언제나 재회의 속성을 갖는다. 곧, 다시 만나게 된 것이 행복이다. 원래 내 것이었던 것을 다시 찾게 된 것이 바로 행복이다.


그것이, 그 사람이, 그 모든 것이, 원래 다 내 것이었다. “넌 내 사람이다.” “이것은 내 것이다.” 특정한 대상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모든 대상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선이다. 이것이 곧 선에서 말하는 주인됨이다. 주인은 상대적인 부분만이 아닌, 절대적인 통째를 다 갖는 자를 지칭하는 것이다. 이러한 선의 기획이 얼마나 놀라운지는 바로 검증해볼 수 있다.


우리가 싫어하는 사람을 떠올려본 뒤, 그에 대해 “넌 내 사람이다”라며, 그가 내 사람이었음을 한번 표현해보자. 그렇게 그도 내 사람이었음을 한번 기억해보자. 그는 내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한번 받아들여보자. 그러면 그 사람에 대한 느낌이 완전히 달라진다. 그가 전적으로 이해가 가게 된다. 그리고 눈물이 흐른다. 재회의 온기로 녹은 얼음이 시냇물이 되어 흐른다.


선은 마법과 같다. 분명하게, 선은 행복의 마법이다. 우리가 그동안 힘들었던 것은, 그것이 자기 것이었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것을 당당하게 가져도 되는 자로서의 자신을 차마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져도 된다. 얼마든지 “내 것이다”라고 선언해도 된다. 지금껏 내 것이 아닌 것처럼 홀대하며 소외했던 그것을 이제 소중히 대해도 된다. 원래 내 것인 것을 가장 소중히 대해도 된다. 그리고 이에 따라, 그것이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라는 고백은 바로 이렇게 이루어진다. “자유로우렴.” 사랑하는 나의 것아, 자유롭거라. 네가 너로서 그 무엇이더라도, 너는 영원한 나의 것이니, 너로서 얼마든지 자유롭거라. 선의 일관된 뜻은 언제나 자유다. 자유는 사랑의 결과다. 사랑은 절대적으로 다 가지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이처럼 이제 이 시냇물이 자신의 것이라는 것을 이해한 자는, 더는 시냇물을 가지려 하지 않는다. 시냇물의 주인으로서 그 자신을 증명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시냇물을 흐르게 한다. 시냇물이 그저 시냇물로서 자유하게 한다. 그럼으로써 목이 마를 때는, 그저 자유롭게 시냇물을 마실 뿐이다.


우리가 어떠한 것을 끝없이 가지려고 욕망했던 이유는, 그것이 정말로 자신의 것이며, 자신이 그것을 가질 정당한 자격을 가진 주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물에 대한 추구 속에서, 또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추구 속에서 상대적이고 부분적인 소유권을 주장하며, 이로 인해 스스로를 부자유하게 만들고, 또 이 세상 모든 것을 부자유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어설프게 소유하면 결국 부자유해진다. 반면, 절대적인 소유는 절대적인 자유를 낳는다. 이처럼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은 내려놓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의 본모습 그대로 절대적인 실현의 표현으로 내놓아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욕망의 실현이란 곧 자신의 실현을 의미한다.


우리가 어떠한 것을 가지려고 할 때, 실상 우리는 그것을 가지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진 자신을 가지고 싶어하는 것이다. 우리가 제일 가지고 싶어하는 것은 바로 자신이다. 우리는 자신을 온전하게 가지고 싶어한다. 온전한 자신이고 싶어한다.


이러한 이해에 따라, 우리가 무엇인가를 소유하려는 이유는, 그것을 자신의 조각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자신의 조각들을 찾아, 자신을 온전한 모습으로 다시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조각들만을 끝없이 모으고 있기에는, 우리의 삶이 너무나 짧다. 결국 우리가 조각들을 모으는 이유가, 그 모든 조각을 다 가질 수 있는 우리 자신을 100%로 갖고 싶기 때문이라면, 단 하나의 조각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통해 이미 100%로 온전한 우리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는 길이 훨씬 신속한 길이다. 더욱 실용적인 길이다.


그래서 선은 뜬구름 잡는 소설이 아니라, 철저한 실용론이다. 행복의 실용론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그토록 모으고 있는 자신의 조각이란 곧 마음을 가리킨다. 때문에, 현재 수집 가능하게 드러나 있는 마음을 100%로 갖는 것, 그렇게 “이것은 내 마음이다”라고 말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온전한 자신을 즉각 실현하는 길이다.


지금의 한 마음만 가지면 다 가진 것이다. 영원히 가진 것이다. 이 또한 실증적인 이야기다. 우리가 연애를 하는 동안, 불안과 조바심에 떠는 이유는, 좋아하는 마음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는 역설적인 표현이다. 이러한 경우, 좋아하는 대상은 우리의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좋아하는 마음은 아직 우리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좋아하는 마음이 그 상대에 따라 좌우될 수 있다고, 그래서 잃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좋아하는 마음은 아직 전적으로 우리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연애를 통해, 누군가를 좋아하며 가슴뛸 수 있는 그러한 우리 자신의 면모를 발견하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가 감히 누군가를 좋아해도 되는 자격을 갖춘 자라는 사실을 알고 싶었던 것이다. 좋아하는 마음이라고 하는 그 조각은 우리가 갖고 싶었던 바로 그러한 우리 자신을 우리에게 선물해준다. 그것은 100명을 좋아해야 얻게 되는 100/n의 자신이 아니라, 단 하나의 마음으로 바로 얻게 되는 100%의 자신이다.


불교에서는 마음이 자유롭지 못한 것이 고통이라고 말한다. 이 말을 역으로 하면, 마음이 자유로운 것이 곧 행복이라는 말이다.


우리가 마음을 붙잡고 있기에 마음은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마음을 붙잡는 이유는, 마음을 제대로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그 마음이 전하는 자신의 면모를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신을 갖지 못했으니, 행복하고 싶어도 행복할 주체가 없는 것이다.


일어나는 이 세상 모든 것에 대하여, “이것은 내 마음이다”라고 소유할 때, 그렇게 나에게 전적으로 소유된 마음은, 전적으로 자유로워진다. 그 마음이 알려준 자신의 모습 또한 자유로워진다. 이를테면,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이 들 때, 그 마음이 자신의 것으로 승인되면, 우리에게는 누군가를 미워할 마음의 자유가 생겨난다. 곧, 누군가를 미워해도 되는 자신이 아무 문제없는 자유로운 존재로서 드러나게 된다.


그리고 그 결과, 우리는 행복해진다.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미워해도,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미워하는 우리 자신으로서 행복해진다. 앞서 말한 것처럼, 어떠한 마음을 가진 자는, 그 마음을 귀한 것으로 보고 있는 자이기 때문이다. 곧, 그는 귀한 것을 가진 자며, 그 귀한 것으로 말미암아 함께 귀한 바로 그 자신이다.


이처럼, 이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우리 자신이 귀해지는 길, 이것이 선의 길이다. 우리가 행복을 직접적으로 실감하는 순간은, 우리 자신이 좀 더 소중한 존재처럼 느껴지는 순간이다. 때문에 우리 자신이 언제나 귀한 자일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언제나 행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이 세상 모든 것으로 우리가 귀해질 수 있다는 것은, 우리의 행복이 그 어떤 조건 속에서도 실현될 수 있다는 절대적 가능성이다.


선은 이 절대적 가능성만을 노래한다. 선은 우리가 절대적으로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진실로 선은 스케일이 다르다. 이 정도면 행복할 수 있겠지, 라는 그 모든 이야기는, 어림도 없다.


우리가 꿈꾸는 것보다 더 거대하게 우리의 행복을 꿈꾸는 것, 우리가 언제나 가장 행복하기를 꿈꾸는 것, 그것이 바로 선이다. 그렇게 선은 행복한 우리의 모습을 그 자신의 것으로 영원히 가지려 한다. 그래서 선은 행복하다.

[불교신문3664호/2021년5월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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