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성성불 가르침 절대 의심하지 않겠습니다”


마음이 과거에 집착하게 되면
현재를 있는 그대로 살지 못해

덕산은 허공 더듬고 메아리를
쫓으면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꿈에서 깨어나라’는 유훈 남겨

덕산의 몽둥이는 잠자고 있는
중생 일깨우기 위한 자비 몸짓

서예가 솔뫼 정현식 ‘불서한담’  가운데 ‘덕산방임제할’.  불교신문 자료사진
서예가 솔뫼 정현식 ‘불서한담’ 가운데 ‘덕산방임제할’. 불교신문 자료사진

 

어느 마음에 점을 찍겠는가?


‘오늘도 마음의 점(點心) 맛있게 잘 찍으세요.’


12시 전후에 문자 보낼 일이 있으면, 인사말 대신 전하는 글귀다. 요즘엔 맛있는 점심 드시라는 의미로 ‘맛점하세요’라는 말을 많이 쓰지만, 개인적으로 ‘마음의 점’을 고집하고 있다. 이런 습관은 오래 전 덕산선감(德山宣鑑, 782~865)과 어느 노파 사이의 인상 깊은 대화를 접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대화를 계기로 덕산은 당대 최고의 학승(學僧)에서 선승(禪僧)으로 질적 전환을 이루게 된다. 도대체 둘 사이에는 어떤 대화가 오고 갔으며, 매일같이 먹는 점심에는 어떤 철학적 물음이 담겨있을까?


덕산은 당나라 때의 선사로 사천성(四川省) 검남(劍南) 출신이다. 그는 일찍이 출가하여 20세에 구족계(具足戒)를 받았으며 대소승을 막론하고 여러 경전에 통달했다고 전한다. 특히 <금강경>에 조예가 깊었기 때문에 속성인 주(周)자를 붙여 ‘주금강’이라고 불렸다. 그는 당시 남쪽 지역에 선불교가 유행한다는 소식을 듣고 몹시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아무리 오랜 시간 경전을 공부하고 계행을 지켜도 성불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선종에서는 ‘교학 이외에 따로 전하는 가르침이 있는데(敎外別傳) 그것은 문자를 세우지 않으며(不立文字), 사람의 마음을 곧바로 가리켜(直指人心) 성품을 보고 부처를 이룬다(見性成佛)’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는 허풍 떠는 귀신들을 모조리 소탕하겠다는 마음으로 남쪽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덕산은 평소 <금강경>에 관해서는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금강경> 박사답게 그는 <금강경소(金剛經疏)>를 걸망에 넣고 길을 떠났다. 길을 가는 도중 그는 자신의 삶을 완전히 바꾸게 되는 떡 파는 노파를 만난다. 마침 점심 먹을 시간이 되어서 떡을 사려 하자 노파는 걸망 속에 있는 것이 무슨 책이냐고 물었다. <금강경소>라고 대답하자 노파가 내기를 걸어왔다. 만약 자신의 질문에 대답하면 떡을 팔고 대답을 못하면 팔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이 제안을 마다할 덕산이 아니었다. 자신 있는 표정의 덕산을 향해 노파는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금강경>에 ‘과거심도 얻을 수 없고 현재심도 얻을 수 없으며 미래심도 얻을 수 없다’고 나오는데, 스님은 어느 마음에 점을 찍겠습니까?”


순간 덕산은 말문이 막혔다. 이런 문제는 어느 책에도 나오지 않기 때문에 답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크게 한 방 얻어맞고 의문의 1패를 당한 덕산은 결국 점심을 굶은 채 용담(龍潭)으로 향했다. 당시 그곳에는 숭신(崇信)이라는 유명한 선사가 주석하고 있었는데, 용담에 산다 해서 용담숭신이라 불렸다. 덕산에게 숭신은 교학(敎學)이라는 무기로 소탕해야 할 첫 번째 표적이었다. 선사를 만난 덕산이 ‘용담이라고 와보니 용도 없고 연못도 보이지 않는다’며 짧은 펀치를 날렸다. 그러자 숭신은 웃으면서 ‘용담에 잘 도착했네’라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또 다시 말문이 막힌 덕산은 의문의 2패를 당한 기분이었다.


용담에 머물게 된 덕산은 숭신으로부터 결정적인 한방을 맞고 선승으로 거듭나게 된다. 어느 날 밤 선사와 대화를 마치고 나오면서 밖이 어둡다고 말을 하자 숭신은 호롱불을 하나 건네주었다. 덕산이 호롱불을 받으려고 하자 선사가 갑자기 불을 훅 하고 꺼버렸다. 그 순간 덕산은 깨침에 이르게 된다. 그동안의 경전 공부가 지식 차원에만 머물렀는데, 선사의 입김 한 방에 알음알이가 사라지고 마음의 문이 활짝 열린 것이다. 큰 절을 올리는 제자를 향해 스승은 무엇을 보았는지 묻는다. 그러자 제자가 답한다.


“지금부터 견성성불의 가르침을 절대로 의심하지 않겠습니다.”


<금강경> 박사가 선승으로 거듭나는 순간이다. 그는 짊어지고 왔던 <금강경소>를 모두 불태워버렸다. 지금까지 공부한 것들은 바다에 떨어진 한 방울의 물과 같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그는 번쇄한 지식의 세계에서 벗어나 선사로서 수많은 제자들을 마음의 세계로 인도하게 된다. 그는 불교의 핵심을 묻는 제자들을 향해 몽둥이를 휘두르는 독특한 방법으로 일가를 이루었다. 이른바 덕산방(德山棒)이 그것이다. 그는 84세에 이르러 다음의 열반송을 남긴 채 고요 속으로 떠났다.


“허공을 더듬고 메아리를 쫓는 것은 그대들 마음을 괴롭힐 뿐이다(捫空追響 勞汝心神). 꿈에서 깨어나면 그릇된 것임을 깨칠 것인데, 다시 무슨 일이 있겠는가(夢覺覺非 竟有何事).”

 

덕선선감이 마음의 눈을 뜨고 경전을 태우는 장면. 불교신문 자료사진
덕선선감이 마음의 눈을 뜨고 경전을 태우는 장면. 불교신문 자료사진

 

미망을 깨는 몽둥이


선(禪)의 세계에서는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종종 벌어진다. 누군가 ‘불교란 무엇인가?’라고 물으면, ‘산에는 꽃이 피네’라고 하거나 ‘차나 한잔 마시고 가라’는 등의 엉뚱한 답을 하곤 한다. 질문과 전혀 관계없는 대답을 하는 경우 선문답과 같다고 하는데,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동문서답이 선에서는 일상적인 일이다. 제자의 질문에 ‘악!’하고 큰소리를 지르거나 몽둥이로 상대를 때리는 과격한 행동을 보이는 선사들도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임제의현(臨濟義玄, ?~867)과 덕산선감이다. 제자를 가르치는 이들의 방법을 흔히 ‘임제할덕산방(臨濟喝德山棒)’이라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고함소리를 듣거나 몽둥이를 맞은 제자들이 실제로 마음의 눈을 뜬다는 사실이다. 특히 당나라 때 선의 독특한 방식으로 깨침에 이른 인물들이 매우 많이 나온다. 그래서 이 시기를 가리켜 선의 황금시대라 부른다.


덕산은 허공을 더듬고 메아리를 쫓으면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꿈에서 깨어나라는 마지막 유훈을 남겼다. 우리가 미망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허공과 메아리에 집착하는 이유는 그것이 실재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술에 취해 길을 걷다가 전봇대에 머리를 부딪치면 하늘에서 별이 보이는 것과 비슷하다. 누구나 그 별이 착각임을 알지만, 당시에는 그것이 실재한다고 믿는다. 눈병이 났을 때도 환화(幻花), 즉 눈앞에 아른거리는 허공 꽃이 마치 진짜로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늘의 별이나 환화 모두 덕산이 말한 허공(空)과 메아리(響)에 해당된다. 중생은 이것들에 얽매어 스스로를 괴롭히면서 살아가는 존재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마음이 지나간 과거에 집착하게 되면 우리는 현재를 ‘있는 그대로’ 살지 못한다. 예컨대 운전을 하다 접촉사고가 일어났다고 해보자. 안타까운 일이긴 해도 이미 벌어진 일을 돌이킬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런데 우리는 교통사고라는 불쾌한 사건을 무의식에 간직한 채 다음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 집에 도착해서 아무 일도 아닌 일에 화를 내기도 하고 홧김에 술을 마시다가 옆 테이블의 사람과 시비가 붙어 경찰서에 연행되기도 한다. 접촉사고라는 첫 번째 화살이 원인이 되어 두 번째, 세 번째 화살을 계속 맞고 있는 것이다. 과거는 이미 지나가고 없는데, 허공과 메아리에 사로잡혀 현재를 망치고 있는 모습이다.


이와 달리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불안과 걱정으로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회사에서 언제 잘릴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불안한 오늘을 사는 직장인들의 마음은 벌써 저 먼 미래에 가있다. 미래의 무언가를 위해서 오늘의 행복을 유보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모두 아직 오지 않은 허공과 메아리를 붙잡고 있는 형국이다. 요즘 유행하고 있는 욜로(YOLO)족의 경우 자신의 인생이 소중하기 때문에 현재를 즐기는 것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그런데 일부의 지적처럼 욜로가 꿈과 희망의 상실에서 오는 소비 형태, 그러니까 열심히 일을 해도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는 절망감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이 역시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을 뿐이다.


경우는 달라도 모두 과거와 현재, 미래에 지나치게 집착하여 자신의 삶을 망치고 있는 것이다. 이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바로 중생의 미망을 깨우는 덕산의 몽둥이다. 이것으로 세게 한 대 맞으면, 나를 괴롭히는 것은 다름 아닌 자신임을 알게 된다. 하늘의 별이나 환화 역시 본래 존재하지 않는다는 실상 또한 이때 드러난다. 그러니 무슨 일이 다시 있겠는가. 덕산의 몽둥이는 잠자고 있는 중생들을 일깨우기 위한 자비의 몸짓이었던 셈이다.


이제 우리도 떡을 파는 노파의 물음에 답을 해야 하지 않을까. 어느 마음에 점을 찍을 것인지 말이다. 그런데 삼독의 술에서 아직 깨지 않아 쉬이 말문이 열릴 것 같지 않다. 어떻게 살 것인지 고민하는 이들에게 여전히 덕산의 몽둥이가 필요한 이유다.

 

[불교신문3664호/2021년5월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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