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동아미타불삼존상, 고려시대 1333년, 불상 69.25cm, 금동관음보살입상 86.42cm, 금동대세지보살입상 88.45cm, 국립중앙박물관 .
금동아미타불삼존상, 고려시대 1333년, 불상 69.25cm, 금동관음보살입상 86.42cm, 금동대세지보살입상 88.45cm, 국립중앙박물관 .

 

아미타불상은 고려에서도 서방정토왕생(西方淨土往生)을 위하여 많이 조성되었다. 아미타불을 봉안하고 90일을 1기(期)로 삼아 삼업(三業, 몸 입 마음으로 짓는 행동 말 생각)의 수행을 통하여 서방정토에 왕생하고자 했던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 1055~1101)에서부터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20년간 아미타불을 염불한 이씨(李氏) 부인(1305~1380)에 이르기까지 고려 전 시대에 걸쳐 아미타불상은 개인적인 염불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아미타불상은 정토왕생신앙을 실천하고자 했던 불교 결사(結社, 뜻을 같이하는 승려와 신도들이 모여 불교를 개혁하려는 모임)에서도 염불의 대상이 되었다.


아미타정토신앙을 비판한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 知訥, 1158~1210)의 조계종(曹溪宗, 선종) 수선(修善) 결사를 제외하곤 거의 모든 결사에서 참회를 통해 적극적으로 서방정토에 왕생하고자 하였다. 1092년(선종 9)에 만일(萬日) 결사를 주도한 인예태후(仁睿太后, ?~1092)는 견불사(見佛寺)에서 아들 의천을 통해 알게 된 천태종의 예참법(禮懺法)을 1만일 동안을 실천하였는데, 이 예참법은 법화삼매참회(法華三昧懺悔, <법화경>과 <관보현보살행법경觀普賢菩薩行法經>을 근거로 죄업을 참회하는 수행법)를 수행하고 아미타불을 예불하여 서방정토에 왕생하는 것이었다. 법상종의 승려 진억(津億)은 1123년(인종 1)부터 1129년(인종 7) 사이에 폐허였던 지리산(智異山) 오대사(五臺寺)에서 서방정토왕생을 목표로 하여 수정(水精) 결사를 주도하였는데, 이 때 승려 법연(法延)은 무량수불상(아미타불상)을 조성하여 금당에 봉안하였다. 수정 결사에 참여한 사람들은 15일마다 <점찰선악업보경(占察善惡業報經)>에 따라 나무 간자(簡子)를 던져 자신의 수행 과보(果報, 인과응보)를 확인하고 악보(惡報, 나쁜 과보)가 나오면 서방정토에 왕생하기 위하여 참회 수행하였다.


1216년(고종 3)에 요세(了世, 1163~1245)가 전라남도 강진의 만덕산(萬德山)에서 주도한 백련(白蓮) 결사에서도 참회와 예불을 통하여 서방정토에 왕생하고자 하였다. 요세는 <법화경>에 근거한 지의(중국 천태종의 개조開祖)의 법화삼매참회와 지례(知禮, 960~1028, 중국 천태종 제 17조祖)의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 해석에 기초한 미타(아미타)정토 왕생을 실천 신앙으로 삼았다. 즉 요세는 선관(禪觀, 참선)을 수행하면서 서방정토왕생을 목표로 하여 매일 <법화경>을 읽고 준제신주다라니(准提神呪陀羅尼)를 1천 번, 아미타불의 명호를 1만 번 염불하였으며, 53체불(體佛)을 12번 예불하면서 자신의 업장(業障, 전생에 지은 악업으로 인해 생긴 장애)을 참회하였다. 그의 수행 방법은 이후 천인(天因, 1205~1248), 천책(天頙, 1206~?)), 정관(正觀), 운묵(雲黙) 등으로 이어졌다. 정화택주(靜和宅主, 왕도인王道人, 강종康宗의 서녀이자 최충헌崔忠獻(1149~1219)의 세 번째 부인)가 백련 결사를 위해 금자법화경(金字法華經)을 사경(寫經)하고 소조무량수여래상(塑造無量壽如來像)을 조성한 것도 이 결사의 실천 신앙이던 법화삼매참회를 통한 서방정토왕생과 무관하지 않다.


이들 결사의 예불 대상이었던 아미타불상들은 남아 있지 않으나, 불사(佛事)를 위해 구성된 또 다른 결사에서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아미타불상들이 확인된다. 서울 개운사(開運寺) 목조아미타불좌상(1274년 중수), 충청남도 서산의 개심사(開心寺) 목조아미타불좌상(1280년 중수),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금동아미타불삼존상(1333년), 서산 문수사 금동아미타불좌상(1346년)이 이러한 예이다. 한편 서방정토왕생과는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지만, 충청남도 청양의 장곡사(長谷寺) 금동약사불좌상(1346년)도 불교 결사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서 주목된다.

개운사 목조아미타불좌상, 고려시대 1274년 중수, 높이 118.0cm, 원 봉안처 서산 취봉사.
개운사 목조아미타불좌상, 고려시대 1274년 중수, 높이 118.0cm, 원 봉안처 서산 취봉사.

 

원래 충청남도 서산의 취봉사(鷲峯寺)에 봉안되어 있던 개운사 목조아미타불좌상은 중간(中幹) 대사가 돌아가신 부모와 친척의 서방정토왕생과 자신이 임종 후 곧바로 극락(서방)정토에 태어나기를 바라면서 1274년(원종元宗, 15)에 중수한 것이다. 취봉사에서 멀지 않은 개심사의 목조아미타불좌상은 1280년(충렬왕 6)에 승재색(僧齋色, 경전 간행, 사찰 중수, 불상 개금과 보수를 담당하던 기관)의 주관 아래 내시시흥위위(內侍試興威衛)의 장사(長史) 송씨(宋氏) 등이 아주(牙州, 충청남도 아산)의 동심접(東深接, 불사佛事를 위해 결성된 지방 조직의 하나)에서 중수한 것이다.

개심사 목조아미타불좌상, 고려시대 1280년 중수, 높이 120.5cm, 개심사.
개심사 목조아미타불좌상, 고려시대 1280년 중수, 높이 120.5cm, 개심사.

 

개운사와 개심사 불상은 통견 방식으로 법의를 입고 설법인을 결한 채 가부좌하고 있다. 목을 앞으로 내민 채 얼굴은 살짝 숙였으나 허리는 꼿꼿이 세워져 있다. 불상들은 부은 듯한 눈두덩, 강인한 눈매, 오뚝한 코와 엄숙한 표정을 갖춘 둥글고 통통한 얼굴을 가지고 있다. 왼쪽 어깨 위의 법의 표현과 왼팔 팔꿈치 앞의 Ω 모양이 뒤집혀진 법의 주름은 이전에는 볼 수 없던 새로운 특징이다. 이러한 공통점과 함께 두 불상에서는 미묘한 표현의 차이도 엿볼 수 있는데, 개운사 상의 둥근 콧등과 달리 개심사 상은 면(面)을 이루고 있으며, 개운사 상이 개심사 상보다 얼굴의 양감이 적고, 법의 주름이 간략한 편이다. 두 불상의 조성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강도(江都) 시기(13세기 전반)에 조성된 강화도 출토의 금동탄생불입상과 얼굴 모습이 닮아서 편년에 참고가 된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1333년명 금동아미타불좌상은 금동관음보살입상, 금동대세지보살입상과 함께 조성되었는데, 보살상들의 밑바닥을 막고 있는 나무 봉함판 안쪽의 묵서명(먹 글씨)과 금동아미타불삼존상에서 수습된 발원문을 통하여 조성 상황을 엿볼 수 있다. 즉 보살상들의 묵서 내용에는 장현(張鉉)과 그의 처 선씨(宣氏)가 시주자로, 동량(棟梁, 불사를 일으킨) 승려로 행인(行因), 영전(永全), 계환(戒桓)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으며, 발원문에는 복장(腹藏)을 주관한 승려 오회(烏廻)와 정길(鄭佶), 김진(金稹, 1292~?), 이겸(李謙), 허영(許穎) 등 불사에 참여한 약 200명의 다양한 계층의 인명(人名)이 기록되어 있다. 불상은 통견 방식으로 법의를 입고 설법인을 결한 채 가부좌하고 있는데, 오른손은 올리고 왼손은 살짝 내려서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다. 불상은 작고 촘촘한 나발, 둥근 형태의 중앙 계주, 가늘고 긴 눈, 짧고 오뚝한 코, 작은 입을 가지고 있다. 미간에는 얼굴에 비해 큰 편인 백호가, 목에는 삼도가 표현되어 있으며, 턱 아래에는 턱선이 음각되어 있다. 불상은 적절한 신체 비례와 자연스러운 법의 주름을 갖추고 있다. 왼쪽 가슴 옆에 표현된 모서리에 구슬 장식이 달린 꽃문양의 금구(金具)는 14세기 불상에 많이 보이는 특징이다. 무릎 양옆에서 가운데로 모인 법의의 끝단이 대좌 윗면에 펼쳐진 모습은 원 간섭기(13세기 후반과 14세기 전반)부터 보이는 특징이다. 보살상들은 높은 보계(寶髻)와 몸 전체를 덮고 있는 영락 장식을 갖추고 있다.

청양 장곡사 금동약사불좌상, 고려시대 1346년, 높이 90.2cm, 장곡사.
청양 장곡사 금동약사불좌상, 고려시대 1346년, 높이 90.2cm, 장곡사.

 

금동아미타불좌상과 닮은 불상으로는 서산 문수사 금동아미타불좌상과 청양 장곡사 금동약사불좌상이 있다. 문수사 금동아미타불좌상은 1993년에 도난된 후 그 행방을 찾을 수 없으나, 왕실 측근 사람들이 조성에 참여한 것으로서 수준 높은 조형을 갖추고 있다. 장곡사 금동약사불좌상은 친전사(親傳師) 백운화상(白雲和尙)과 도인(道人, 승려) 인겸(忍謙)의 주도 하에 대공덕주(大功德主)인 낙랑군부인(樂浪郡夫人) 최씨(崔氏)와 금산군부인(金山郡夫人) 김씨(金氏)를 비롯하여 관료 13명, 관료 부인 29명, 거사 22명 등 1079명으로 구성된 결사에서 대원(大元) 제국의 바얀테무르((伯顔帖木兒, 공민왕恭愍王의 몽고식 이름)와 자신들의 무병장수를 기원하기 위해 조성한 것이다.


불상은 통견 방식으로 법의를 입고 가부좌하고 있는데, 오른손은 어깨까지 들어 올려 엄지와 중지를 교차하고 있으며, 왼손은 배 앞에서 약기(藥器)를 받쳐 들고 있다. 눈썹 밑은 각이 져 있으며, 좁고 편평한 콧등과 살짝 당겨 올라간 윗입술 지니고 있다. 손은 가늘고 길지만 발은 통통한 편이다. 나비 매듭으로 묶은 군의(裙衣, 치마)의 끈 중에서 왼쪽 자락은 대의 속으로 들어가 감춰진 다음 왼발의 발등 아래로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고 있다. 대좌 윗면에는 1333년명 아미타불좌상과 같이 무릎 양옆에서 나온 대의 끝단이 가운데를 향하여 펼쳐져 있다. 왼쪽 어깨 위에서 내려온 법의는 Ω 모양이 뒤집혀진 모습을 하고 있으며, 왼쪽 발목을 감싼 법의 주름은 S 자 형태를 이루고 있다. 불상에 보이는 적절한 신체 비례, 균형 잡힌 안정된 자세, 자연스러운 법의 주름, 군의의 띠 매듭 형식, 금구 장식 등은 문수사 금동아미타불좌상과 매우 닮아서 같은 공방이나 장인에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조형적인 유사성 외에 같은 해에 제작된 금동불상이라는 점과 불상이 봉안된 두 사원 간의 거리가 멀지 않다는 점도 그 가능성에 힘을 실어 준다.

 

[불교신문3664호/2021년5월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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