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왕불공은 공양실을 신성·청정하게 하기 위함

경북 청도 운문사 조왕단 모습. 불교신문 자료사진
경북 청도 운문사 조왕단 모습. 불교신문 자료사진

 

생명을 양육하는 신
부엌을 다스리는 조왕(竈王)은 동아시아에서 보편적·일상적 섬김의 대상이 되어온 존재다. 도교·불교와 민속신앙은 물론, 유교에서도 군주가 백성을 위한 칠사(七祀)를 지낼 때 음식을 관장하는 조신(竈神)이 일곱 신 가운데 한 분으로 좌정해 있다. 또한 부엌이 있는 곳이면 민가든 사찰이든 조왕을 모셨기에 일상의 나날 속에서 섬김을 받아온 것이다. 이는 불을 신성시하고 한 집안의 불씨를 소중하게 여겨온 토착신앙이, 도교의 조왕신앙과 결합하면서 전승기반을 공고히 해온 것이라 하겠다.


오늘날 한국으로 눈을 돌리면, 조왕신앙은 온전히 불교의 전유물이 된 듯하다. 주거공간은 물론 삶을 지배하는 많은 것들이 변하면서 집안 곳곳을 지켜주던 가신(家神)도 함께 사라졌지만, 사찰에서는 조왕을 모시지 않은 곳이 드물다. 공양간의 모습은 달라져도 승가공동체가 꾸려가는 대중생활의 기반은 변함없이 전승되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후기의 <작법귀감(作法龜鑑)>에는 산신·칠성신과 함께 조왕신을 위한 의식을 따로 정립해 두었다. 이 조왕청(竈王請)을 보면 “안팎을 길하고 융창하게 하며, 걸림돌을 벗어나 편히 머물게 하고, 온갖 질병을 없애주며, 선악을 분명하게 가려내며, 들고남에 자재하고 한곳에만 늘 머물며 집안을 보호하는 조왕”이라 하였다. 부엌은 생명을 이어가게 하는 신성한 영역이기에, 이곳을 지키는 조왕의 능력 또한 확장되어 있다. 건강하고 정갈한 음식으로 심신을 지탱하니, 질병이 없어지고 널리 안팎이 길하여 평안할 것이다.


이러한 능력은 민속신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민간에서는 조왕이 삼신처럼 육아의 기능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운수와 재물을 다룬다고 여겼다. 이는 음식으로 생명을 양육하고, 아궁이의 불이 재물 번성을 상징하기 때문일 것이다. 주부들은 아침마다 부뚜막 조왕중발의 정화수를 갈며 식구의 안위를 빌고, 집안에 일이 생기거나 외지에 나간 이가 있으면 따로 정성을 들였다. 명절이면 솥에 밥을 지어 식구수대로 숟가락을 꽂은 뒤 “어진 조왕님~”으로 시작되는 기도를 올렸으니, 식구와 함께 부뚜막과 밥을 공유하는 참으로 정겨운 신이다.


<작법귀감>에도 조왕단에 “옥 같은 쌀알을 수증기로 찐 음식을 경건히 차려놓고” 모신 연유를 고하도록 했다. 음식 가운데 가장 소중하고 성스러운 공양물을 올리면서, 들고남이 자재하지만 늘 부뚜막에 머물며 지켜주는 조왕의 내호(內護)를 빌었다.

 

안팎을 다스리는 경책의 신


조왕은 ‘선악을 분명하게 가리는 존재’이기도 하다. 예로부터 조왕을 둘러싼 기본담론은 부엌을 삿된 침입으로부터 지키는 동시에, 인간의 행위를 감시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는 <포박자(抱朴子)>에 “인간사를 살핀 조왕이 주기적으로 하늘에 올라가 옥황상제에게 죄를 고해 벌을 내린다”고 기록한 데서 유래하였다. 조왕의 승천시점은 매월 그믐밤으로 보다가 점차 일 년에 한 번으로 여기게 되었다.


이에 우리나라에서는 섣달그믐에, 중국에서는 춘절을 일주일 앞둔 섣달 23일에 집중적으로 조왕을 섬긴다. 맛있는 음식을 차려놓고 한 해의 보살핌에 감사하면서, 아울러 선처를 바라는 뜻의 제사이다. 따라서 민간에서는 제물로 엿을 빠뜨리지 않았다. 여기에는 천상에 가서 엿처럼 달달한 말만 하기를 바라는 마음, 입이 붙어 아무 말도 못하게 하려는 마음이 두루 담겨 있다.


사찰에서 조왕불공을 올리는 뜻은, 대중의 생명과 건강을 책임지는 공양간을 신성하게 여기며 청정하게 다루도록 하기 위함이다. 공양간은 부처님께 올릴 마지와 수행자의 대중공양을 짓는 소중한 영역이기에, 조왕에게 부여된 ‘선악의 감시’는 외부의 삿된 적뿐만 아니라 우리 내면의 삼독도 끊임없이 점검할 것을 깨우치는 가르침이다.


사찰 공양간의 조왕은 대개 탱화로 모시고, ‘나무조왕대신(南無竈王大神)’이라는 위목(位目)을 써서 모시기도 한다. 탱화 속의 조왕은 머리에 관을 쓰고 문서를 든 모습이며, 아궁이 땔감을 대는 담시역사(擔柴力士)와 음식을 만드는 조식취모(造食炊母)를 좌우에 거느리는 경우도 많다. 따라서 천제의 명으로 지상에 파견되어 인간의 일을 엄중하게 기록하는 관리의 역할이 부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조왕은 남신으로 여기지만, 이른 시기의 조왕은 여신인 경우가 많았다. 이는 모계사회를 반영하는 것이자 부엌을 다루는 어머니의 존재가 투영된 것으로, 이후 부계질서의 강화와 함께 점차 남신으로 인식되기에 이른다. 그런가하면 민간에서는 ‘남성중심의 조상제사’와 ‘여성중심의 가신신앙’을 구분하여, 낮은 제사의 신격으로 조왕의 여성성이 부각되기도 하였다. 이렇듯 조왕은 성 정체성에 있어서도 시대와 의례주체에 따라 다양한 양상을 지닌 채 우리와 함께해온 신이다.

 


 

서울 진관사에서 섣달그믐 조왕불공을 올리며 주지 스님이 축원문을 읽는 모습.
서울 진관사에서 섣달그믐 조왕불공을 올리며 주지 스님이 축원문을 읽는 모습.

 

조왕을 섬기는 의례


“이 공양 드시고 성불 하십시오.” 새벽4시가 되면 통도사의 반두(飯頭) 스님과 행자가 공양간 조왕단에 촛불을 밝히고, 오늘 하루의 무사를 기원하며 세우는 발원이다. 사찰 후원의 하루는 이렇게 공양간 소임을 맡은 이가 조왕님께 합장배례 하는 기도로써 열어가고 있다.


예전에는 아침밥을 다 지으면 조왕에게 기도를 올린 다음 큰방으로 들였고, 부처님께 올릴 마지도 불기에 퍼서 조왕단에 먼저 예를 갖춘 다음 내가기도 하였다. 일상으로 되풀이되는 부처님과 제자들의 공양이지만, 늘 감사한 마음으로 끝까지 소홀함이 없는 스님들의 정성을 느낄 수 있다. 사시마지 때면 조왕단에도 마지를 올리거나, 솥뚜껑을 열어놓고 절하는 것으로 대신하기도 한다. 송광사에서는 조왕단에 마지를 올린 뒤 마지뚜껑을 열고 죽비를 치면, 주방의 모든 이들이 일손을 멈추고 합장배례로써 공경의 예를 표한다.


그런가하면 매달 그믐에 조촐한 조왕불공을 올리고, 섣달그믐이면 한 해를 마감하며 본격적인 조왕불공을 올리는 사찰이 많다. 범어사에서는 신도들과 함께하기 위해 날짜를 앞당겨 섣달보름에 사천왕과 조왕을 나란히 섬긴다. 이날 저녁 천왕문에서 기도를 올린 뒤, 사부대중이 다함께 공양간으로 이동해 조왕을 향한 기도를 이어가는 것이다. 외각과 후방에 자리한 천왕문과 공양간은 자칫 소홀하기 쉬운 곳이지만, 한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에 영역과 생명을 지켜주는 존재들에게 감사함을 새기며 회향하는 여법한 의례라 하겠다.


진관사에서 섣달그믐 저녁, 공양간에 갖가지 공양물을 차려놓고 올리는 조왕불공은 참으로 정성스럽다. 조왕단에는 조왕의 위목을 모셔두고, 두 개의 커다란 가마솥이 있는 부뚜막 위에 공양물을 차린다. 그 가운데 쌀·보리·수수·팥·콩·조 등을 켜켜이 쌓아서 찐 조왕편은 이 날만 볼 수 있는 특별한 떡이다. 조왕편은 시루 째 올리는데, 부엌의 신에게 오곡을 바침으로써 풍요와 오행의 조화를 기원하는 뜻이 담겨있다. 불공을 마친 조왕편에는 가피가 가득하니 고루 나누어 공양하고, 몸이 아픈 분에게 약으로 챙겨 보내기도 한다.


조왕편과 함께, 기름진 음식을 즐기는 조왕을 위해 부각·두부부침·녹두전을 비롯해 갖가지 나물과 과일을 올린다. 부엌을 다스리는 신의 특성과 입맛을 헤아려 정성껏 올리는 공양물이니, 그 가피가 사부대중에 두루 미칠 만하다.

 

제석천과 조왕


“한 톨의 쌀이 버려지면 그 쌀이 다 썩을 때까지 제석천이 눈물을 흘린다.” 스님들은 음식을 조금이라도 소홀히 대하면, 스승이나 노스님들로부터 어김없이 이 말을 들어야 했다. 민간에서 불교의 제석천을 생산신·삼신 등 다양한 신격으로 수용하여 곡식을 넣은 제석단지를 모셨듯이, 사찰에서도 곡식을 다루는 역할로 제석천이 수용된 셈이다.


뿐만 아니라 한국불교에서는 조왕이 섣달그믐에 하늘로 올라가서 대중의 선악행위를 보고하는 대상이, 옥황상제가 아닌 제석천(帝釋天)으로 설정되어 있다. 불교의 우주관으로 볼 때 제석천은 세계의 중심인 수미산 정상의 도리천(忉利天)을 다스리는 우두머리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곡식을 다루는 존재이기도 하니, 부엌을 다스리는 조왕이 섣달그믐 도리천에 올라 제석천께 보고하는 것은 참으로 타당하다.


한때 출가자의 삶을 살았던 시인 고은은, 효봉스님과 잠시 인연을 맺은 적이 있었다. 어느 날 공양주가 병이 나 대신 밥을 짓던 중, 쌀을 일다가 낱알 두어 개를 흘렸는데 때마침 효봉스님이 그것을 보았다. 이에 걸음을 멈추고 엉엉 울면서 “내가 우는 것이 아니라 제석천이 운다. 이 쌀 낱알이 썩을 때까지 울리라”고 하였다. 고은은 이 경책에 온몸의 터럭이 일어났다고 회상했다. 시주에 의지하는 출가자라면 쌀 한 톨도 소홀함 없이 다루어야 했으니, 조왕이 눈여겨보는 것 또한 이러한 철두철미함이 아니겠는가.


그런가하면 부뚜막 위에 자리하며 일상을 함께하는 조왕님은 정겨운 존재이기도 하다. 후원 스님들은 수시로 조왕단 앞에서 크고 작은 바람을 의지했다. 동진 출가한 어느 스님은, “아직 어려서 불 때는 일은 맡기지 않으니, 아궁이 앞에 앉아 부지깽이를 목탁 삼아 두드리며 천수를 치곤 했다”고 한다. 선배 스님들이 조왕 앞에서 반찬 맛있게 해달라며 천수다라니를 외고, 밥에 돌 들어가지 않게 해달라며 천수다라니 외는 걸 자주 보았기 때문이다.


새 행자가 들어오면 조왕단에 함께 절을 올려 보고하고, 아무 장애 없이 식구가 될 수 있도록 빌었다. 또한 “뒷산에 가서 단단하고 곧은 나무로 부지깽이를 만들어 부뚜막 옆에 세워놓고, 새 행자를 좀 보내달라며 조왕님께 기도드렸다”는 진관사 법해스님의 말처럼, 대중이 부족할 때도 조왕님을 찾았다. 막내 스님 첫눈에 들어오는 단단하고 미끈한 나뭇가지로 부지깽이를 올리고 기도하면, 신기하게도 참신하고 진발심한 행자가 들어오곤 했다는 것이다. 이렇듯 조왕과 함께하는 후원의 삶은 더없이 든든했을 법하다.
 

[불교신문3663호/2021년4월2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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