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는 길조차 아름다운 ‘평화통일 기원도량’

별천지와 같은 북한산길 걸어
절 당도하면 이미 자비심 가득
노적봉 맞이하는 경치에 감탄

감로수 같은 부처님 법 넘치는
중생구제 원력 실천하는 사찰
“행복과 평화는 불가분 관계
통일로 평화 오길 항상 기도“

자동차로 못 가는 곳이 없는 세상이다.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이면 도로가 깔려 있고 자동차는 당연히 도달할 수 있다. 서울 인근이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라는 생각이 깨진 건 이 사찰을 찾아가면서였다. 북한산 노적사. 시민들에게 무척 익숙한 북한산에는 수많은 사찰이 있고, 이 사찰들의 일부만이 자동차로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안 것은, 참 그동안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았다는 깨달음을 얻게 했다. ‘등산 준비를 해야 하나?’ 걱정이 앞선 무지렁이 중생을 꾸짖은 건 산과 사찰, 그리고 그 안에 계신 부처님이었다.

‘별천지’, 사전적인 뜻은 이렇다. ‘속세와는 달리 경치나 분위기가 아주 좋은 세상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3월12일 단단히 채비를 하고 찾은 북한산은 그야말로 ‘별천지’였다. ‘멀면 어쩌지, 가파르면 어쩌지, 힘들면 어쩌지….’ 온갖 번뇌는 눈 녹듯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 빈 공간을 환희심으로 채워갔다. 완만한 산길, 그 옆으로 길게 늘어선 계곡, 투명하다 못해 없는 것 같은 냇물, 허허로운 공간을 채우는 계곡물 흐르는 소리와 산새 소리까지….
 

북한산 오르는 아름다운 길만으로도 환희심이 나는 노적사의 백미는 따로 있다. 바로 웅장한 노적봉이 그것이다. 노적봉과 사찰의 조화를 보노라면 탄성이 절로 나온다.
북한산 오르는 아름다운 길만으로도 환희심이 나는 노적사의 백미는 따로 있다. 바로 웅장한 노적봉이 그것이다. 노적봉과 사찰의 조화를 보노라면 탄성이 절로 나온다.

먼 과거에도 이런 풍경은 여전했을 것이고 찬탄을 쏟아냈을 것은 당연지사.

‘노적봉이 더없이 깨끗하여 티끌하나 없고 
만고의 청풍이 노적봉을 불어와 맑고 밝은 기운 돌아오는구나. 
산영루를 던지고 험악한 산길을 이리저리 찾아 북으로 가면 
세 길쯤 되는 돌에 ‘백운동문’이라 새겨져 있어 
돌길을 따라 진국사 절문에 당도하니 
붉은 나무와 흰 돌이 구렁을 이루며 물소리 맑게 들리어라.’

조선시대 실학자 이덕무가 노적사의 전신인 ‘진국사’를 읊은 시다. 가는 길만 조금 평이해졌을 뿐, 예나지금이나 그 빼어난 경치는 달라진 것이 없음이 여실하게 느껴진다.

그러한 북한산 산길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져 길을 걷다보면 어느새 ‘노적사’라고 적힌 커다란 표지석이 반긴다. 오히려 조금 더 자연을 감상하고 싶다는 아쉬움이 들 정도다. 절로 가는 길조차 번뇌를 버리게 하는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곳, 그래서 절에 당도하면 이미 마음속에 화사한 꽃 한송이를 피워내는 곳, 북한산 노적사다.

노적사로 가는 길은 노적교를 지나 사찰 입구까지가 가장 힘든 구간이다. 촘촘하고 살짝 가파른 계단을 오르다보면 숨이 가빠진다. 그나마 작은 번뇌도 사찰에 들어서면 바로 잊힌다. 사찰로 오르자마자 탐방객을 반기는 ‘노적봉.’ 탄성이 절로 나온다. 노적봉이 따스한 눈길로 내려다보는 곳에 노적사는 자리하고 있다.

노적사는 한자로 ‘露積寺’라고 쓴다. 노적봉 아래에 위치한 사찰이라서 그렇다는 말도 있지만, 불교적인 의미도 있다. 노(露)는 ‘감로(甘露)’를 말한다. 부처님의 법과 가르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감로수가 가득 쌓여있는 절, 부처님 가르침이 넘쳐흐르는 절이 바로 노적사다.
 

노적사의 또 다른 자부심은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사찰이라는 것이다.
노적사의 또 다른 자부심은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사찰이라는 것이다.

노적사는 천년고찰은 아니다. 풍전등화와 같았던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고 전쟁이라는 광기에 가장 큰 피해를 입는 중생들을 구제하겠다는 일념으로 세워진 호국불교 상징 도량이다. 창건 당시 이름이었던 ‘진국사(鎭國寺)’가 이를 증명한다. 그야말로 나라를 지키는 사찰이라는 의미다.

조선 숙종 38년인 1712년, 전국의 승군을 통솔하는 직책을 부여받은 팔도도총섭 성능(聖能)스님이 창건한 절이다. 북한산성을 축조하고 중요한 거점 10여 곳에 사찰을 세워 나라를 지키는 호국불교를 실현한 인물이 성능스님이다. 애초부터 노적사는 나라가 위기에 처하면 언제든지 백성을 구제할 수 있는 승병, 승군들이 머무는 승영사찰로서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그래서 노적사는 ‘평화통일 기원도량’이다. 진국사로부터 비롯된 호국불교의 역사를 현재에 맞게 적용한 것이 ‘평화통일’이다. 조선 당시에는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전쟁이 세상을 피폐하게 만들고 중생의 안전을 위협했다면, 지금은 남과 북으로 갈린 분단 상황이 중생들의 이익과 안락에 장애를 주고 있다. 그러므로 ‘평화통일’은 호국불교를 실현하고 중생을 구제하는 방편이다. 노적사가 ‘평화통일 기원도량’이 된 까닭이다.

“우리 절은 평화통일 기원을 멈추지 않습니다. 통일이 될 때까지 절대 멈출 수 없습니다. 전쟁은 절대 일어나선 안됩니다. 행복과 평화는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인류의 행복을 위해 평화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기도를 멈추지 않아야 되는 이유입니다.” 노적사 주지 종후스님의 설명이다. 평화통일을 이루기 전까지 한시라도 기도를 멈추지 않겠다는 원력은 노적사를 사시사철 누구든 언제든 기도할 수 있는 기도도량으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고양 노적사 석사자상. 지역 유일의 석사자상으로 가치가 높다.
고양 노적사 석사자상. 지역 유일의 석사자상으로 가치가 높다.

깊은 산에 위치한 절인만큼 전각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 또한 노적사의 특징. ‘있어야 할 것은 다 있고 없을 건 없다’는 노래가사가 있지만, 노적사는 평탄하고 너른 곳에 세워진 여느 절처럼 갖출 수 있는 전각을 모두 갖추고 있다. 대웅전을 필두로 적멸보궁, 나한전, 삼성각, 삼보전, 동인당, 범종각, 보림루(保任樓)까지. 

이런 신도 친화적인 갖가지 배려에도 혹여나 절에 오기까지 어려움이 있을까? 인근 사찰 가운데 유일하게 셔틀버스를 운영하고 있다. 서울 지하철 3호선 구파발역에서 매일 오전8시부터 오후4시까지(낮12시는 제외) 1시간마다 출발하는 차량을 운행하고 있다. 이 셔틀버스는 노적사에서 가장 가까운 곳까지 불자들을 실어 나르고 참배를 마친 불자들을 태우고 다시 구파발역으로 향한다.

이같은 노적사의 자비심은 오직 하나를 위함이다. “부처님 가르침 잘 배우고 수행해서 그 말씀대로만 살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은 평화롭게 되고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노적사가 그 씨앗을 뿌리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주지 종후스님의 말씀이 북한산 아름다운 경치와 더없이 어울려 보였다.
 

종후스님

인터뷰 | 노적사 주지 종후스님

“불자다운 불자, 불교다운 사찰 만들기”

노적사의 역사를 제대로 알려면 세 분의 스님을 기억하면 된다. 노적사의 전신인 진국사를 창건한 성능스님과 1960년대 흔적도 없던 사찰을 다시 세운 무위스님, 그리고 빈한했던 사찰을 현재와 같이 크게 중창한 종후스님이 바로 그들이다.

특히 1977년부터 주지 소임을 맡고 있는 종후스님이 이룬 가람불사를 바라본 불자들은 혀를 내두른다. 법당과 삼성각, 요사채가 전부였던 빈궁한 사찰을 현재와 같이 일으켜 세웠을 뿐 아니라, 중요한 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는 ‘전통사찰’로 등재시켰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종후스님에게 가람불사는 중요한 업적이 아니다. 스님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일은 노적사를 종단에 등록했다는 것이다. 스님이 일군 모든 불사는 모두 불교를 위해, 종단을 위해 했다는 자부심이 가장 크다. “절 전각과 땅, 그리고 소임을 보시는 스님네까지 모두 조계종 소속입니다.” 인터뷰하면서 이 대목에서 스님의 목소리가 가장 크게 들린 이유는 진실이었기 때문이다.

주지 부임 후 40년 넘게 하나하나 일군 도량. 팔순을 넘긴 연세에도 셔틀버스를 내려 절까지 수십 분을 오롯이 걸어 오르는 스님에게서 ‘원력’이란 낱말이 떠올랐다.

“우리 절 누각이름이 ‘보림루(保任樓)’입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후 중생을 위해 법을 설파할까 말까를 고민하다가 결국 중생구제를 결심하기까지의 기간을 보림이라고 합니다. 과분한 이름이지만 그렇게 붙인 건, 공부 열심히 해서 부처님처럼 보림할 수 있는 수행자가 나오길 바라는 마음에서였습니다.”

노적사에서 이같은 수행자가 탄생했으면 바라는 마음이 원력이 돼 가람불사도 하고 정진도 하며 40년 세월을 오롯이 살아온 스님이다.

그럼에도 종후스님이 항상 버릇처럼 하는 말씀이 있다. “부끄럽다.” 40여년을 사찰불사에 매진하고 세상을 위해 다양한 보시행을 펼쳐왔음에도 스님은 공부를 더 많이 못했음을, 중생을 위해 더 많이 일하지 못했음을 부끄럽게 여기고 매일 참회한다.

“노적사가 불자다운 불자, 불교다운 사찰로서 역할을 영원히 해나가기를 바라고 또 바랍니다. 제가 더 열심히 정진했더라면 그 공덕의 씨앗을 심고 가꾸었을 텐데 그렇지 못해 한탄스럽습니다.” 스님의 말씀에서 하심(下心)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느껴졌다.

고양=김하영 기자 hykim@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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