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외전 신구학문 이사(理事) 겸비한 해안스님
내외전 신구학문 이사(理事) 겸비한 해안스님
  • 이성수 기자
  • 승인 2021.04.07 14:14
  • 호수 366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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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전등사, 전자불전콘텐츠硏 
해안스님 자료들 아카이브 구축
불교전등회 법회에서 법문을 하는 해안스님. 옆에서 시봉하는 동명스님.
불교전등회 법회에서 법문을 하는 해안스님. 옆에서 시봉하는 동명스님.

내외전을 겸비하고 근현대 선지식으로 존경받는 해안선사의 자료가 동국대 불교학술원 전자불전문화콘텐츠연구소를 통해 디지털화 작업이 이뤄져 화제가 되고 있다.

전자불전문화콘텐츠연구소(소장 진명스님)와 서울 전등사(회주 동명스님, 조계종 소청심사위원장)는 최근 업무협약을 체결하고 근대불교문화 사진및 자료의 디지털화 작업에 들어갔다. 2017년 한국연구재단 토대연구지원사업으로 선정된 ‘한국의 근대불교문화 사진 아카이브 구축’ 사업의 일환이다.

해안스님 상좌로 평생 스승의 뜻을 기리며 전법에 매진하고 있는 동명스님이 그동안 정성껏 보관해온 것으로 근대한국불교사의 소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지난해 동명스님이 해안(海眼, 1901~1974)스님의 유묵과 서필을 모아 발간한 <해안선사서문집>이 불교신문에 보도되면서 전자불전문화콘텐츠 연구소가 자료 정리의 필요성을 인식했다.

서울 전등사 회주 동명스님과 지난 3월 업무협약을 체결한 전자불전문화콘텐츠연구소는 ‘토대연구사업팀(책임연구자 황순일 동국대 교수)’의 황상준 연구교수가 실무를 맡아 해안스님 사진과 자료를 스캔하여 디지털화 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B 일제강점기 중국 북경대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뒤 해안스님이 부안 내소사 대웅보전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왼쪽에서 다섯번째가 해안스님
일제강점기 중국 북경대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뒤 해안스님이 부안 내소사 대웅보전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왼쪽에서 다섯번째가 해안스님

동명스님이 제공한 자료 가운데는 1961년 해안스님이 대중에게 선보인 ‘생전 장례식’을 비롯해 대중선(大衆禪)을 전하는 법문 장면, 일제강점기 북경대 유학시절과 부안 내소사 시절의 사진 등이 포함돼 있다.

또한 해안스님이 직접 필사(筆寫)하여 기록한 역대 조사와 고승들의 게송및 법문을 담은 수첩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자료들은 일제강점기부터 해안스님이 입적한 1970년대 중반까지 근현대 한국불교의 생생한 역사를 담았다는 점에서 가치가 크다.

해안스님은 장성 백양사 학림(學林)을 졸업한 후에 중앙불교전문학교를 마치고 중국 북경대에서 유학한 경험이 있는 학승(學僧)이다. 지금까지 선사(禪師)의 이미지가 강하게 부각되었지만 선교(禪敎)를 겸비한 수행자다. 특히 한국불교 전통교학을 사찰에서 익힌후 서울(경성)에서 신학문을 이수하고, 외국(중국)의 대학에서 선진문물을 익혔다.

동명스님이 공개한 자료들은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해안스님의 젊은 시절 행적을 구체적으로 확인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해안스님의 자취는 일제강점기 언론에도 다수 확인된다.
 

1974년 해안스님 영결식에서 상좌 동명스님이 영정을 들고 애통해 하고 있다.
1974년 해안스님 영결식에서 상좌 동명스님이 영정을 들고 애통해 하고 있다.

1921년 8월9일자 동아일보는 ‘불교유학생 강연회’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해안스님인 김봉수(金鳳秀)와 이일선(李一鮮) 스님이 장성 백양사 대강당에서 조선불교청년회백양지회가 주최한 강연회에서 연설한 소식을 전하고 있다.

이에 앞서 1920년 8월31일 백양사에서 창립한 조선불교청년회백양지회에 해안스님은 ‘문예부(文藝部)’ 임원으로 선출되는 등 청년불교운동에 앞장섰다. 1922년 7월 조선불교청년회가 주최한 전국 순회강연단의 제4대(第四隊) 일원으로 오대산 월정사, 양약 낙산사, 설악산 신흥사, 금강산 건봉사·유점사·표훈사·장안사·신계사, 안변 석왕사 등에서 연설을 했다.

한용운(韓龍雲), 박한영(朴漢永) 스님의 영향을 받은 조선불교청년회 활동을 한 해안스님은 자연스럽게 조선불교개혁과 식민지 극복에 대한 열망을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젊은 시절의 해안스님. 중국 북경대 유학에서 돌아온 후에 촬영한 것으로 보인다.
젊은 시절의 해안스님. 중국 북경대 유학에서 돌아온 후에 촬영한 것으로 보인다.

동명스님은 “생전에 은사스님께서는 만해스님은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굳은 의지를 지닌 분으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찾아뵈었다고 말씀하셨다”고 회고했다. 해안스님은 서울에서 유학하면서 유심회학우회(唯心會學友會)에 참여하는 등 일제강점기 식민지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했다.

중앙불전을 졸업한 해안스님은 1923년 중국 북경대에 유학을 떠나 신세계(新世界)에서 견문을 넓혔다. 조선에서 유학온 불교청년들이 조직한 북경불교유학생회(北京佛敎留學生會)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해안스님(김봉수)을 비롯해 한봉신, 김성숙, 김규하, 김정완, 윤정묵, 윤금, 김봉환, 차응준 등이 참여한 북경불교유학생회는 1924년 4월 기관지 <황야(荒野)>를 창간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학업을 마치지는 못하고 1924년 가을 귀국한 해안스님은 부안군 산내면 석포리 주민들의 문맹퇴치 운동에 나섰는데, 내소사 자장암에 신명야학(新明夜學)을 설립하였다. 계명학원(啓明學院)을 만들었다는 기록도 전한다. 1925년 1월 17일자 동아일보는 “북경에 유학하다가 병으로 인하야 귀가한 김봉수군이 야학을 설치하기 위해 열심 활동하였다”면서 “40여 명의 남녀학생을 열성으로 교수(敎授)하였다”고 보도했다.
 

1971년 1월 전주 정혜사에서 열린 불교전등회 제9회 특별정진 회향식. 앞줄 가운데가 해안스님.
1971년 1월 전주 정혜사에서 열린 불교전등회 제9회 특별정진 회향식. 앞줄 가운데가 해안스님.

이밖에도 해안스님은 불교개혁을 취지로 한 철우회(鐵牛會), 소작농의 권익을 옹호하기 위한 소작동우회(小作同友會) 등에 참여하는 등 불교 가르침을 실생활에서 구현하기 위해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이후 참선수행에 전념하여 36하안거를 성만하면서 김제 금산사 주지, 서래선림 조실, 불교전등회 대종사, 대원정사 조실 등으로 정진하며 전법에 혼신을 다했다. 해안스님은 1974년 3월 9일(음) 부안 내소사에서 세수 74세, 법랍 57년으로 원적에 들었다.

전자불전문화콘텐츠연구소는 “사진자료의 취합에 있어 코로나 19의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동명스님과의 업무협약을 통해 기존에 형성된 결과물과 연계하여 이번 사업의 목적을 이루고자 노력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전등사 회주 동명스님은 “은사스님이 간직하셨던 자료는 그 자체로 스승의 분신(分身)이라 여기며 소중하게 보관해 왔다”면서 “스님 개인의 자취를 확인하는 자료를 넘어 한국불교의 근현대사를 증명하는 가치로 보존될 수 있도록 각별히 유념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앞으로 해안 큰스님에 대한 행화(行化)를 체계적으로 정리할 계획”이라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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