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상계 열 가지 평등함을 보다


형상도 자상도 생겨난 적 없어
분별 이전 청정한 자성 알기에
크나 큰 연민으로 세상사 관찰

등현스님
등현스님

 

분별(vikalpa)은 사물을 인식할 때 필요한 도구이기는 하지만, 분별 때문에 다시 이 세계는 본래의 평등성을 잃어버리고 차별의 세계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마음이 개념 사이를 헤엄쳐 다니다가 선정에 들어 개념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 모든 법이 본래 평등하였고 지금도 평등함을 본다. 그러므로 분별 있음(savikalpa)의 상태에서 분별 이전(nirvikalpa)의 사물을 있는 그대로 주시하면, 마음에 의해 만들어진 모든 차별과 분별되어진 세계가 사라지고 청정한 본래 상태가 드러난다. 이러한 분별 이전의 상태가 바로 4선정 이후에 체험되는 세계이다. 이것을 바로 평등성이라 하고 이러한 10가지 평등성이 보이면 난승지의 보살은 바야흐로 6지 보살의 수행에 입문하게 된다.


제5 난승지의 도를 원만히 닦은 보살이 적멸의 체험으로 인하여 현상계(법)가 본래 열 가지로 평등함(samata)을 보면서 보살 제6지에 든다. 현상계는 본래 ‘무자성’이라서 여러 가지 조건을 만나면 생(生)이라 하고, 조건이 흩어지면 멸(滅)이라 하나, 본래의 상태에서는 만들어진 적도 소멸한 적도 없다.

그러므로 현상계의 본질은 본래 형상(nimitta)도 자상(自相, lakṣaṇa)도 생겨난 적 없고, 생겨난 적이 없으므로 의존할 바 없으며, 본래 청정하고 분별 이전의 것이므로 한 법도 취사(取捨)할 것이 없으며, 환영과 같아서 있음과 없음(有無)의 이원성을 떠났음을 보는 것이 바로 법의 열 가지 평등함을 보는 것이다. 보살은 법에 대한 예리한 관찰력(猛順忍)으로 일체법의 자성이 이러함을 보지만 아직 ‘일체 법이 본래 생겨난 것이 없다는 체득함(無生法忍)’에는 도달하지 못한 상태이다. 무생법인은 오직 제8지 이상에서만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보살은 일체법의 이러한 자성(自性)을 알기에 크나큰 연민으로 세상을 관찰하며, 관찰할 때 세상의 발생과 소멸은 모두 자아(自我)에 대한 애착에서 생겨나고 자아에 대한 애착을 제거하면 세상에서 인연 따라 생겨나는 것은 존재하지 않음을 보게 된다. 또한 중생들의 마음이 자아에 집착하여 무지의 암흑에 뒤덮여 사랑하지 않아야 할 것을 사랑하고 미워하지 않아야 할 것을 미워하기에, 행복과는 반대의 길로 가면서 선ㆍ 악ㆍ 무기의 행위를 반복하면서 그에 따른 여러 가지의 생을 일으키는 것을 본다. 이러한 그들의 행위 때문에 심어진 마음의 종자가 집착과 함께 태어남ㆍ늙음ㆍ죽음과 다음 생을 초래함으로써 생사에 유전하게 되는 것이다.


즉, 업이라는 땅의 바탕 위에 무명이 어둠이 되어 갈애의 물로 적셔주고, ‘내가 있다’는 아만의 물길을 대어주어서, 견해의 그물(잔뿌리)이 성장하는 까닭에 명색(名色)의 싹이 터 성장하게 된다. 명색의 싹이 성장하면 여섯 가지 감각기관(六根)이 작용을 일으키고, 감각기관의 작용이 대상과 서로 부딪치는 까닭에 접촉(觸)이 발생하고, 접촉에 의해서 느낌(受)이 일어난다. 느낌에 의해서 기쁨이 발생하고, 기쁨에 대한 갈애(愛)로부터 집착(取)이 늘어나고, 집착이 늘어나면 존재(有)가 발생하고, 존재(有)가 발생하면 오온이 발생한다. 발생한 오온은 다섯 가지 길(五趣)을 따라서 점차적으로 쇠퇴해지고, 쇠퇴해진 것은 소멸한다.


쇠퇴와 소멸에서 고뇌의 번열이 일어나고, 고뇌의 번열을 원인으로 일체의 슬픔, 비탄, 고통, 우울, 절망이 생겨난다. 그러나 그것들 가운데 발생하게 하는 어떠한 자도 없고, 스스로 성질에 의해 저절로 소멸하지만, 또한 그것들 가운데 소멸하게 하는 어떠한 자도 없는 연기(緣起)를 고찰하면서 진리를 깨닫게 된다.


보살은 또한 ‘행위자에 의해 행위가 알려지리라, 그러나 행위자가 없으므로, 궁극적으로 행위(작용) 역시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행위자뿐만 아니라 행위자의 작용 또한 얻을 수 없으므로 일체의 작용이 쉬어진 적멸이 현전(abhimukhī)하므로 현전지라 한다.

 

[불교신문3660호/2021년4월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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