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세기 초까지 유행한 ‘요나라’의 흔적

강원도 보살상과 비슷한
거란인들의 보살상 ‘눈길’
양국 간 활발한 물적 교류
고려 전기의 시대성 반영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 11세기 중엽, 92.4cm, 국립춘천박물관.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 11세기 중엽, 92.4cm, 국립춘천박물관.

 

고려 전기의 시대성을 반영한 독특한 보살상은 강원도에서 주로 발견되는데, 강릉의 한송사지(寒松寺址)와 신복사지(神福寺址), 평창의 오대산(五臺山) 월정사(月精寺)의 석조보살상이 그 예이다.

이들 보살상은 원통형의 높은 보관(寶冠), 팽창된 양 볼, 통통한 몸 등 형식과 조형적으로 닮아 같은 장인(匠人)과 그 계보에 의해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불전(佛殿)에 봉안된 대리석재(大理石材)의 한송사지 보살상과 탑 공양보살의 모습을 한 화강암으로 만든 신복사지와 월정사 보살상 간에는 분명 도상학적인 차이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 뒷면, 11세기 중엽.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 뒷면, 11세기 중엽.

 

강원도 보살상들은 조성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아서 새로운 불상재(佛像材)로 대리석이 선택된 배경이나 완벽한 조형의 보살상이 탑을 공양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태백산맥 동·서쪽에 위치한 강릉(신복사지)과 평창(월정사)에서 닮은 모습의 탑 공양보살상이 조성된 것은 승려들의 왕래가 자유로울 만큼 이들 사원 간의 관계가 친밀했기 때문이다. 비록 나말여초의 상황이긴 하지만, 신복사에 주석하던 낭공행적(郞空行寂, 832~916)과 신의두타(信義頭陀)가 오대산 수정암(水精庵)과 월정사에 각각 머문 적이 있었다는 사실은 이를 입증해 준다. 이러한 분위기가 11세기 중엽까지 이어져 같은 모습의 공양보살상이 두 사원에서 조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이 출토된 절터에는 현재 사자와 코끼리가 새겨진 석조사자좌(石造獅子座)와 석조상좌(石造象座)의 파편이 남아 있다. 보살상은 밑부분의 형태와 크기가 석조사자좌의 윗면과 일치하여 사자좌를 한 문수보살상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석조상좌 위의 보현보살상은 강릉시립박물관의 석조보살좌상으로 추정되는데, 왼손으로 크고 둥근 지물(持物, 보주)을 잡고 있다.


고려 말, 이곡(李穀, 1298~1351)이 관동(關東) 지방을 여행하고 쓴 <동유기(東遊記)>에는 한송사의 전신인 문수당(文殊堂)의 석조문수보살상과 석조보현보살상에 관한 내용이 있다. 비록 이 기록은 원래부터 두 보살상만 조성한 것인지, 아니면 주존인 불상은 없어지고 두 보살상만 남아 있었는지에 대하여 알려 주진 않지만 보살상들이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일 가능성을 높여 주는 것은 분명하다.


석조문수보살상은 원통형의 높은 보관을 쓰고 귀걸이와 팔찌를 착용하였으며, 오른손으로 연꽃 가지를 들고 있다. 보살상은 길게 묶어 올린 머리카락, 양감 있는 팽팽한 양 볼, 두툼한 턱, 통통한 몸을 가지고 있다. 따뜻한 미소를 머금은 얼굴 표정, 몸의 굴곡을 따라 유기적으로 표현된 법의 자락, 옆면과 뒷면까지 표현한 섬세한 조형도 갖추고 있다.


한송사지 보살상의 보관 형태와 조형적인 특징은 이곳에서 멀지 않은 신복사지 오층석탑 앞의 공양보살상에서도 확인되며, 평창의 월정사 팔각구층석탑(八角九層石塔) 앞의 공양보살상에서도 보인다. 이들 공양보살상은 불탑(佛塔) 앞에서 왼쪽 무릎을 세우고 오른쪽 무릎을 바닥에 댄 채 두 손을 모아 공양물을 바치는 모습을 하고 있다. 신복사지 공양보살상은 두 눈을 지그시 감고 미소를 머금은 채 불탑을 공양하고 있는데, 등 뒤로 늘어진 둥근 모양의 두건에서는 앞면은 물론 옆면과 뒷면까지 신경을 쓴 섬세함을 엿볼 수 있다.


보살상은 조형적인 특징과 절터에서 발굴된 11세기 전반의 해무리굽 청자 파편, 1045년명 서울 홍제동 오층석탑(현 국립중앙박물관)과 같이 신복사지 오층석탑의 각 층마다 있는 방석돌을 통하여 11세기 중엽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보관 위에 올려진 팔각형의 보개(寶蓋)는 석등 화사석(火舍石)의 지붕돌로서 원래는 한 세트가 아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월정사 석조공양보살좌상, 11세기 중엽, 180cm, 월정사성보박물관.사진제공=김민규
월정사 석조공양보살좌상, 11세기 중엽, 180cm, 월정사성보박물관.사진제공=김민규

 

월정사 석조공양보살상은 신복사지 보살상보다 훨씬 크지만, 조형과 형식 면에서는 별반 차이가 없다. 보살상의 보관에는 금속 장식을 부착하기 위해 뚫어 놓은 18개의 작은 구멍이 있으며, 왼손 엄지와 검지 사이에도 공양물을 끼울 용도로 만든 구멍이 나 있다. 보살상에 관한 기록은 고려시대 14세기 이후에야 보이기 시작하는데, 민지(閔漬, 1248~1326)가 1307년에 쓴 <오대산사적(五臺山事蹟)> ‘신효거사친견오류성중사적(信孝居士親見五類聖衆事蹟)’의 “무릎을 괴고 향로를 든 약왕(藥王)보살”과 정추(鄭樞 1333~1382)가 쓴 시(詩)의 “문수보살” 등이 그것이다. 이 중 병향로(柄香爐)를 들고 있는 약왕보살로 묘사된 민지의 기록은 매우 구체적이어서 주목할 만하다.

<묘법연화경> ‘약왕보살본사품(藥王菩薩本事品)’에서는 약왕보살이 탑 앞에서 팔을 태워 공양했다는 내용이 있는데, 실제 ‘약왕보살본사품’의 내용을 그린 고려시대 14세기의 법화경변상도(法華經變相圖)에서는 탑을 향하여 향로를 든 약왕보살이 그려져 있다. 즉 소비(燒臂, 팔을 태우는) 공양이 아닌 향을 공양하는 약왕보살로 표현된 것이다. 현존하지는 않으나 당시 민지가 친견했던 향로가 보살상 조성 당시의 것이 분명하다면, 보살상은 약왕보살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한편 보살상의 팔각연화대좌(八角蓮華臺座)는 앙련(仰蓮)이 조각된 상대, 팔각형의 낮은 중대, 복련(覆蓮)과 안상(眼象)이 표현된 팔각형 하대로 구성되어 있다. 상대보다 폭이 넓은 하대, 활달하게 넓게 펼쳐진 하대의 연판(蓮瓣), 안상 중앙의 동그란 꽃머리 장식 등은 대좌가 11세기 중엽에 조성되었다는 것을 알려 준다. 보살상의 조형적인 특징, 팔각구층석탑의 형식, 석탑에서 수습된 금동불입상·사리기(舍利器)·동경(銅鏡) 등도 이러한 추정에 힘을 실어 준다. 한편 보살상 밑바닥의 타원형 받침과 맞물리게끔 파낸 대좌 윗면의 홈은 한송사지와 신복사지 보살상에서도 확인되어 역시 같은 장인 계보에 의해 조성되었음을 알려 준다.


11세기 중엽에 조성된 이들 강원도 보살상의 독특한 조형은 나말여초의 보살상과는 다른 모습이다. 즉 원통형의 높은 보관, 양감이 넘치는 조형, 대좌의 상대 윗면보다 솟아올라온 앙련 윗부분 등이 그러한 특징이다. 그런데 이러한 형식과 특징은 요(遼)나라 1036년에 조성된 산서성(山西省) 대동(大同)의 하화엄사(下華嚴寺) 보살상 등 요나라 보살상과 친연성을 보이는데, 특히 한송사지 보살상은 요나라 불상과 불탑 조성에 많이 사용되던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조형적으로나 재질적으로 유사한 것을 볼 수 있다.

신복사지 석조공양보살좌상, 11세기 중엽, 보살상 121cm, 대좌 47cm, 신복사 절터.
신복사지 석조공양보살좌상, 11세기 중엽, 보살상 121cm, 대좌 47cm, 신복사 절터.

 

강원도 보살상과 친연성이 있는 요나라 보살상들은 한족(漢族) 문화의 전통이 남아 있던 연운십육주(燕雲十六州, 산서성 대동과 하북성(河北省) 북경(北京)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주로 확인된다. 사실 강원도 보살상의 조형적인 특징은 이 지역이 요나라에 편입되기 전인 당말(唐末) 오대(五代)의 보살상에서 이미 나타나고 있어서 11세기 중엽에 요나라의 공식적인 교류에 의해 그 영향이 미쳤다고 하더라도 그 전통은 한족 문화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공양보살상이 공식적인 교류에 의해 요나라의 영향을 받았다면, 한 세트를 이루고 있는 불탑과 공양보살상이 요나라에서도 유행해야 하는데 지금까지 그 유례를 확인할 수 없고, 요나라 불탑 형식을 온전히 답습했을 법한 신복사지와 월정사 석탑이 전혀 그렇지 않다는 점에서 독특한 조형의 강원도 보살상이 조성된 또 다른 배경이 있었을 가능성을 생각하게 한다.


11세기 중엽부터 많은 거란인(契丹人)이 고려에 투하(投下)하여 살기 시작하면서 요나라 문화가 고려 사회 전반에 걸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비록 이들 중에 포함되어 있던 거란 장인들이 강원도 보살상 조성에 참여했다는 기록은 확인되지 않지만, 당시 고려 사회에 팽배했던 이러한 분위기는 그 가능성을 추정하게 한다. 1067년, 문종(文宗, 1046~1083 재위)이 남경(南京, 한양) 천도를 계획하고, 다음 해에 남경에 궁궐을 조성할 때 거란 장인들이 참여했다는 기록은 이러한 사회적인 분위기를 알려 준다.


11세기 중엽부터 유행하는 쌍룡문(雙龍文), 태극화염문(太極火焰文), 포류수금문(蒲柳水禽文), 범자문(梵字文), 연판 꽃술문, 천개문(天蓋文) 등의 문양, 다중정(多重釘)으로 새긴 어자문(魚子文)과 고육각(高肉刻)의 타출(打出) 기법, 1085년에 조성된 강원도 원주 법천사(法泉寺) 지광국사현묘탑(智光國師玄妙塔)의 독특한 조형은 이들 거란 장인들과 무관하지 않다.


1123년에 송(宋)나라 사신의 일행으로 고려에 온 서긍(徐兢)은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1124년)에서 거란 장인이 만든 요나라풍의 그릇과 옷이 당시 고려 사회에 만연하고 있다고 기록하였는데, 이는 12세기 초까지 거란 장인의 활동과 그 영향이 지속되고 있었음을 알려 준다.
 

[불교신문3660호/2021년4월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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