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 소설가
김영 소설가

 

이른 아침, 운동 겸 산책을 하기 위해 골목의 주택가를 지난다. 굳이 그곳을 지나가지 않아도 되지만 부러 그곳으로 둘러간다. 야트막한 언덕 아래 아담한 정원이 있는 스페니쉬 박공지붕 이층집 정원에서 나를 기다리는 녀석이 있다. 아니, 내가 녀석을 기다린다는 게 맞는 말일 것이다. 내가 기대하며 기다리는 녀석은 눈빛이 초롱초롱한 고양이다.


처음 그 집 앞을 지났을 때 길과 연한 벽의 커다란 창 속에 얼룩 고양이 한 마리가 도도한 자세로 바깥을 내다보고 있었다. 액자 속 그림처럼 꿈쩍하지 않는 모습이 예쁘고도 신기해 다가갔는데, 녀석은 귀찮은 듯 무료한 듯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얀 레이스가 드리워진 기다란 창가에 앉은 녀석의 모습은 유럽의 소도시 공방풍경인 듯 무척 인상에 남았다.


좀처럼 곁을 내주지 않는 녀석의 무관심에 오기라도 생긴 걸까, 오가는 길에 그 집 앞을 지나며 녀석의 고집만큼이나 끈질기게 관심을 보였더니 드디어 녀석이 나에게 다가왔다. 머리와 몸을 내 옷에 문지르며 친밀감을 표현한 녀석은 한참을 달아나지도 않고 야생화가 핀 정원을 배경으로 돌확의 물을 핥으며 몇 컷 사진 찍을 타이밍도 주었다.


어렸을 때 집에서 고양이를 키운 적이 있었다. 어떻게 해서 그 아이가 우리 집에 오게 되었는지는 생각나지 않지만, 새끼고양이였던 그 아이와 장난을 치며 놀았던 기억이 난다. 우리 가족은 그 아이에게 소머즈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아마 그 아이가 똘똘하고 힘이 셌던 모양이다. 어느 날 집을 나가 사라진 그 고양이를 우리는 다시 볼 수 없었다.


요즘은 고양이를 반려동물 삼아 키우는 사람들이 많다. 어릴 적 추억 때문인지 여동생도 러시안 블루 한 마리를 데려와 키우고 있다. 씨니라 부르는 그 아이를 여동생이 얼마나 예뻐하는지 딸들이 ‘엄마, 나도 씨니 할래’라며 웃는다고 한다. 가끔 보내오는 씨니의 사진이나 동영상을 보노라면 비염이나 알레르기 문제만 아니라면 기꺼이 집사 노릇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고양이가 발밑에서 야옹, 하고 올려다보면 삶이 당신에게 미소 짓는 거랍니다.’ 다큐 영화 ‘케디’를 보는 동안 이스탄불의 고양이와 거리풍경에 푹 빠졌다. 나쁜 기운은 흡수하고 좋은 기운을 내뿜는다는 고양이. 비단 고양이뿐 아니라 모든 생명 있는 것들과 교감하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편안하고 따뜻한 세상을 꿈꾸어본다.

[불교신문3660호/2021년4월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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