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초 보광사 목조지장보살좌상 이야기

병자호란의 참화로 인한
지장신앙 유행의 증거
아픈 역사 보여주는 ‘성보’

속초 보광사가 소장하고 있는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88호 목조지장보살좌상.
속초 보광사가 소장하고 있는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88호 목조지장보살좌상.

지장보살은 지옥에서 고통 받는 중생을 구제한다는 신력(神力)의 존재다. 17세기 중반 조선에서는 지장신앙이 크게 유행했다.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88호인 속초 보광사 목조지장보살좌상은 이때 조성됐다. 초안(草安)이라는 조각승이 조선 효종 5(1654)에 제작했다. 본래는 금강산 안양암에 봉안되어 있었다. 안양암이 폭우로 유실되자 1937년 화담스님이 보광사로 옮겨왔다. 목조지장보살좌상이 유명해진 까닭은 그 속에서 어느 여인의 발원문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보살상을 시주한 청주 한씨(韓氏) 부인은 내시가 된 남편 나업(羅嶪)의 극락왕생을 빌고 있다. 사람들은 고자라는 신체적 약점에 착안해 이들의 해로(偕老)를 가십거리로 즐기기를 좋아한다. 그런데 의지할 대상으로 왜 굳이 지장보살을 택했을까? 발원문의 애절함과 간곡함을 보면 남편이 지옥에 가길 바라는 심보에서 그런 건 아니었던 것 같다. 살아서 고되었던 남편을 위로하기 위한 일이었는데, 사실 그때는 나라 전체가 지옥을 견뎌내던 시절이다.

나업(1596~1654)은 임진왜란 전란 중에 태어나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참화를 다 겪고 죽었다. 그건 한씨(1595~1675)도 마찬가지다. 161210대 중반의 나이에 내시부에 들어간 나업은 단순한 내관은 아니었다. 벼슬이 종1품 숭록대부(崇祿大夫)까지 이르던 상선(尙膳)이었다. 특히 비선실세로서의 면모가 돋보인다. 인조와 효종 재위기에 조선과 청나라를 수차례 오가며 외교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청 황제의 노여움을 풀기 위한 칙사로도 갔으며, 황실이 신부 감으로 원하던 효종의 딸을 직접 중국으로 데려가기도 했으며, 청의 사신(使臣)이 고관대작이 아닌 그를 불러 모종의 메시지를 전하기도 했다. 임금이 신임하는 최측근이었던 만큼 대신들의 시샘으로 파직당하기도 한다. 탄핵과 복직이 반복되던 삶은 죽어서도 본가가 아닌 처가의 묘역에 묻혔다. 물론 개인의 정치적 부침보다 훨씬 더 끔찍한 것은 그가 목격한 세상이다. 나업의 출장길은 병자호란의 패전으로 인한 삼전도의 굴욕이 터놓은 길이고, 수많은 백성들이 무참히 죽은 길이며, 청군은 전리품 삼아 잡아간 수십만 피로인(披露人)들이 굴비처럼 엮여서 걸어가던 길이다.
 

속초 보광사 전경
속초 보광사 전경

<연려실기술>에는 심양에서 속환되어 온 사람이 60만 명이라고 적혀 있다. 욕으로 일반명사화()화냥년은 환향녀(還鄕女) 곧 고향으로 돌아온 여성 피로인에 대한 멸칭이다. 3대 전쟁범죄는 살인 약탈 그리고 강간이다. 오랑캐들은 유독 사대부 양반집의 규수들을 골라서 유린함으로써 승전의 쾌락을 극대화했다. 피해 여성들은 막대한 몸값을 지불한 뒤에야 풀려나거나 구사일생으로 도망쳐 나왔다. 그리고 적국이나 조국이나 이들에 대한 시선은 싸늘했다. 성폭행당한 부녀자가 있는 가문은 자손 대대로 요직에 등용하지 않았고 과거에 응시조차 못 하게 했다. ‘더럽혀진아내와의 이혼을 요구하는 상소도 빗발쳤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두가 맛봐야 했던 정신적 괴멸은 지장신앙 성행의 결정적 이유다. 김성순 동북아불교미술연구소 연구위원은 20176월 열린 지장보살좌상 관련 세미나에서 병자호란의 시대에 전국적으로 많은 지장보살상과 지장시왕도 등이 제작되었던 것은 민초들이 죽음과 구원의 문제를 불교에서 찾으려 했음을 대변해준다고 지적했다.

나업과 한씨는 경기도 양주에 함께 묻혀 있다. 속초 보광사는 330일 묘소 앞에서 추모재를 봉행했다. 평소에도 홍수로 인해 쓰러진 비석을 일으켜 세우는 등 꾸준히 관리해주고 있다. 아울러 목조지장보살좌상의 국가문화재(보물) 지정을 추진하고 있다. 보광사 사업국장 진관스님은 조선 후기 불교조각의 지역적 특성과 시기적 양식을 잘 보여주는 데다 <제불여래보살명칭가곡> 등 발굴된 복장유물도 그 가치가 우수하다무엇보다 어두운 역사를 생생하게 증언하는 성보(聖寶)라는 점에서 더 많은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업의 생애는 정사(正史)에서는 거의 지워져 있다. 오직 한씨의 발원문을 통해서만 그 실체가 입증될 뿐이다. 그래서 보광사 목조지장보살좌상의 의미는 개인적 로맨스보다 더 폭넓은 관점에서 다뤄야 할 것으로 보인다. 모두가 처참하게 당하던 시대였고 실절(失節)을 고통이 아니라 죄악으로 여기던 시대다. 국가는 무능하고 비겁했다. 살아남음이 죽음보다 못했을 때, 결국 가장 뜨거운 눈물은 불교가 닦아주었다.

속초=장영섭 기자 fuel@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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