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식으로 下心 … 물욕 없애는 출가자 본분 유지

청도 운문사 승가대학(강원) 화엄반 학인 스님들의 자비탁발 수행.(2019년)  ⓒ운문사
청도 운문사 승가대학(강원) 화엄반 학인 스님들의 자비탁발 수행.(2019년) ⓒ운문사

 

탁발과 동냥
초기 율장(律藏)에, “비구로서 자기 마음대로 입에 넣을 수 있게 허락된 것은 물과 이쑤시개뿐”이라 했다. 당시의 이쑤시개는 양치용의 작은 나뭇가지를 말한다. 출가자는 오로지 탁발(托鉢)로써 재가자가 발우에 담아주는 음식물에 의지해 살아가야 함을 단적으로 드러낸 표현이라 하겠다. 부처님은 이처럼 걸식을 통해 자신을 낮추고 물질에 대한 집착을 없애며, 최소한의 음식으로 수행에 힘쓰는 것이 출가자의 본분임을 분명히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출가자의 수행정신을 담고 있는 탁발전통이 불교와 역사를 함께해왔다. 수행환경에 따라 탁발의 모습은 조금씩 달라졌지만, 직접 농사를 지어 자급자족하는 삶을 지향해온 선종 교단에서도 탁발은 일상화된 수행법이자 부족한 식량을 충당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탁발’은 음식을 구하고자 ‘그릇(鉢)을 내미는(托)’ 걸식을 묘사한 말이다. 또한 민간에서는 탁발을 동냥, 탁발승을 동냥승이라 불렀다. ‘동냥’은 동령(動鈴)에서 비롯된 말로, 스님들이 탁발할 때 요령을 쓰기도 하여 ‘요령(鈴)을 흔든다(動)’는 뜻에서 생겨난 것이다. 고려시대 <동국이상국집>에는 동냥을 ‘동량(棟梁)’이라 표기하면서, 스님이 불사시주를 권하는 모연(募緣)의 의미로 사용하였다. 이처럼 우리가 쓰는 ‘동냥’이란 말이 오랜 역사를 지녔으며, 하심(下心) 수행의 상징인 탁발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조선말 근대초기의 탁발풍습은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에 전한다. 당시 가짜승려들이 탁발을 흉내 내어 양식을 얻으러 다니는 일이 많아, 탁발승은 스승과 도반의 연대서명을 받아 본사에 청원해서 발부된 증서를 지녀야 했다. 만 스무 살이 되어야 탁발을 할 수 있었고 탁발시간 또한 오전 8시부터 정오까지로 제한했으니,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짜승려들의 무분별한 탁발로 수행자의 위의를 해치는 일이 많았던 듯하다.


또한 탁발승이 목탁을 치며 천수다라니를 외고, 바라를 치며 회심곡을 부르기도 하였다. 이능화는 이에 대해 다소 부정적으로 표현했으나 탁발에는 늘 염불이 따랐고, 염불과 함께 때로 바라가 등장하기도 했을 것이다. 출가자는 염불과 기도로써 재가자를 위한 법시(法施)와 축원을 베풀고, 재가자는 출가자에 대한 보시로 공덕을 지으며 탁발은 이어졌다.

 

자비량(自費糧)의 방편
전답이 많아 도지를 받는 큰절을 제외하면 대부분 절의 경제사정은 궁핍한 서민들의 삶과 다르지 않았다. 광복 전만 해도 절에서 대중에게 의식(衣食)을 제공하지 못해 스님들은 자신의 양식을 직접 마련해야 했다. 따라서 탁발은 대중의 생계를 좌우하는 중요한 수단이었고 자비량(自費糧)을 만드는 유일한 방편이었다. 그 뒤로 점차 젊은 스님들을 양성하고자 사중에서 양식을 대주기 시작했으나, 본방 스님이 아닌 강원학인과 선방수좌는 각자 양식을 지참해야 했던 것이 1960, 70년대까지의 모습이었다.


최초의 비구니강원(승가대학)을 세운 공주 동학사는 당시 이루 말할 수 없이 가난했고, 학인들은 해마다 쌀 한 가마니를 학비로 냈다. 1960년대에 동학사강원을 다녔던 어느 스님은 여름철 보리추수와 가을철 나락추수 시기에 맞춰, 도반들과 함께 계룡산 너머 논산으로 탁발을 나가곤 했다. 시골집이 드문드문 떨어져 있는 데다 살림이 빈한하니, 작은 접시에 담아주는 쌀로 한 되를 모으려면 수십 집을 다녀야 했다. 마을마다 짖어대며 따라오는 개 또한 공포의 대상이라, 스님이 기억하는 탁발은 출가자의 실존적 현실이 집약된 고행이었다.


선방 스님들도 석 달 양식을 준비해서 방부(房付)를 들였다. 이에 해제를 하고나면 틈틈이 탁발을 나가서 다음 결제 양식을 마련하는 것이 참선수행을 위한 산철의 주요임무였다. 1960년대 초의 선방 가운데는 선방을 다닐 때는 석 달 치 양식을 한 번에 내지 않고, 공양주가 ‘서홉’이라는 용기를 들고 다니며 쌀을 거두러 다녔다고 한다. 그러면 다음 끼니에 공양할 스님만 쌀을 내주었는데, 손잡이가 달린 작고 네모난 나무용기에 쌀을 깎아 담으면 일인분이라 스님들이 먹는 밥을 ‘서홉밥’이라 불렀다.


가난한 절에서는 본방 스님들의 탁발 또한 어느 시기동안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당시 절에서는 수행의 일환이자 양식마련을 위해 공식적으로 탁발을 내보내기도 했지만, 각자탁발 또한 규정 내에서 허락해주는 분위기였다. 따라서 스님들은 탁발을 해서 필요한 책을 구할 수 있었고, 공양주를 살며 깨뜨린 그릇도 채워 넣을 수 있었다.


그런가하면 비구니 스님들 중에 수행경험으로 탁발을 하고 싶었지만 은사 스님의 반대로 하지 못한 경우도 많았다. 예전에는 내전(內典)인 불교경전만 배우고 세속의 학문은 외전(外典)이라 하여 배우지 못하게 했듯이 자칫 사회의 물이 들 수 있다는 염려 때문이었고, 제자들에게 고생을 시키고 싶지 않은 스승의 마음이었다.

 

9세기 후반의 기산풍속도(箕山風俗圖) 중 탁발승을 그린 ‘빈승걸립(貧僧乞粒)’. ⓒ민속원
9세기 후반의 기산풍속도(箕山風俗圖) 중 탁발승을 그린 ‘빈승걸립(貧僧乞粒)’. ⓒ민속원

 

노스님과 짝 이루어 탁발
공식적인 탁발은 물론, 자유롭게 보이는 각자탁발에도 분명한 규범이 있었다. 탁발을 나갈 때는 가사·장삼을 수하여 수행자의 위의를 갖추어야 했고, 두 명씩 짝을 지어 나가되 젊은 스님은 노스님과 짝을 이루도록 하였다. 재가자와의 관계에서 자칫 실수를 하지 않도록 잘 이끌어주기 위함이다. 탁발시간 또한 이른 아침과 늦은 오후는 피하고 대개 열한 시부터 시작하여 서너 시에 마치도록 했다.


탁발을 나갈 때면 노스님은 목탁을 들고, 젊은 스님은 발우를 들었다. 집 앞에 다다르면 먼저 목탁을 쳐서 방문을 알리고 염불을 하는데, <반야심경>이나 신묘장구대다라니 등이 주를 이루었다. 시주 여부와 무관하게 염불을 끝까지 마치고, 성불을 바라는 축원으로 재가자에게 복을 지어주게 된다. 1960년대 초 공주 마곡사에서는 사미계를 받기 전에 의무 탁발을 두어 수행자의 본분을 익혀나가도록 하였다. 탁발규범을 제대로 잘 지키는지 확인하는 스님도 따로 두었다니, 출가자로서 재가자와 첫 만남인 탁발수행의 조심스러움을 짐작하게 된다.


1950년대 초반 합천 해인사 약수암에 머물던 한 스님은 은사 스님과 짝을 이루어 처음 탁발 나가던 날을 잊을 수 없다. “늙고 깡마른 은사 스님 뒤에서 앙상한 다리를 보며 걷는데 눈물이 쏟아졌다. 그 뒤론 은사 스님 몫까지 내가 해온다며 탁발을 다니시지 못하게 했다.” 당시 열일곱밖에 되지 않았던 스님이 자신의 몫에 은사 스님 몫까지 탁발을 하려니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탁발승이 짊어진 걸망에는 대개 두 개의 자루가 있어 재가자가 주는 쌀과 보리를 구분해서 담았다. 가난한 마을에서는 보리쌀과 잡곡이 주를 이루니 쌀자루는 아예 꺼낼 일이 없었고, 잡곡이 섞이는 걸 꺼려하는 절에서는 자루를 네 개씩 가지고 다니기도 했다. 형편이 나은 마을에서는 탁발을 마치고 돌아올 때쯤이면 걸망이 묵직해졌고, 곡식뿐만 아니라 철따라 고추나 감자ㆍ나물 등을 주기도 했으니 걸망을 맨 어깨와 등이 아프기 일쑤였다.


탁발을 다녀오면 며칠씩 몸살을 앓는 스님들도 있었다. 속가에서 짐을 져보지 않다가 무거운 곡식을 짊어진 채 몇 시간씩 걷는 일이 힘들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님들은 탁발한 짐이 무거울 때면 마을 신도 집에 맡겨뒀다가 나중에 지게로 짊어지고 왔다.


첫 탁발의 기억들 뚜렷
“처음 탁발 나갔을 때 부끄러워서 그릇을 내밀지 못했다. 발우를 장삼소매 속에 넣었다가 딱 내야 하는데, 그것이 안 나갔다.” 1950년대 해인사에서 공부했던 어느 원로 스님은 목탁을 치는 사형스님 뒤에서, 차마 발우를 내밀지 못했던 당시를 떠올렸다.


“은사 스님이 강원을 보내주지 않아서 학비와 차비를 탁발로 마련했다. 나는 절실해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시장 가게마다 반야심경을 하며 다녔는데, 혼자 보낼 수 없다고 따라나선 두 도반은 전봇대 뒤에 숨어서 울었다.” 갓 행자생활을 마친 새내기 스님이 강원학비를 마련하려고 시장에서 탁발에 나섰는데, 그 모습이 안쓰러워 도반들이 눈물을 흘리고 만 것이다. 지금도 만남을 이어가는 당시의 세 비구니 스님들은 설익고 힘들었던 그 시절이 수행의 소중한 디딤돌이었다고 말한다.


이처럼 스님들은 모두 첫 탁발의 순간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난생 처음 타인에게 보시를 구걸하고자 발우를 내밀기까지, 참으로 진땀나는 시간이었다는 것이다. 1960년대 공주 갑사 대자암에 살던 한 스님은 첫 탁발을 나가기 전날, 긴장이 되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에 “집집마다 그들이 어떻게 사는지 보노라면 세상과 자신을 비춰보는 데 그만한 공부가 없다”는 상노스님의 말씀을 듣고 용기를 내었다. 실제 첫 집에서 힘겹게 탁발을 하고나니 그 뒤부터는 점차 편안해지면서, 수행자이기에 가능한 값진 체험임을 절감하였다.


경기도의 어느 노스님 또한 사미계를 받고나서 상주에서 처음 탁발을 나갔는데, 부끄러운 첫걸음을 떼고 나니 몇 시간 만에 걸망 가득 쌀이 모아질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그 뒤 서울 화계사에서 다시 탁발수행을 할 때는 은행이든 다방이든 거르지 않으면서, 부처님이 부자와 빈자를 가리지 않고 칠가식(七家食)으로 복을 심어주었던 뜻을 흉내 낼 수 있었다.


그런가하면 1950년대 범어사의 어느 스님은 도감 소임을 살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탁발수행을 딱 한번 해보았다. 스님이 앞에서 요령을 흔들며 염불하고 원주스님이 뒤에서 발우를 들고 부산 국제시장에 탁발을 나갔는데, 염불소리가 좋다며 너도나도 시주를 했다. 탁발이 잘 되는 걸 보고 걸인들이 뒤따라왔기에 남김없이 그들에게 나눠준 뒤 돌아올 수 있었다. 스님들의 두타행(頭陀行)은 다양한 탁발내력이 함께하는 가운데 삶의 현장 속에서 그렇게 단련되어왔다.
 

[불교신문3657호/2021년3월1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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