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 ‘사진자료 공모전’ 통해
되돌아본 부처님오신날 연등회


서기 866년 최초 거행
고려시대 거치며 발전
1975년 공휴일 지정 후
규모와 내용 크게 성장

 

본지는 연등회보존위원회와 함께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이자 국가무형문화재인 연등회(燃燈會)의 옛 모습을 담은 사진과 자료를 공모한다. 1200년 간 존속되며 세계인의 축제로 자리매김한 한국불교의 연등회를 더욱 발전 계승시키자는 취지다. 사진자료 공모전을 계기로 부처님오신날의 상징이자 국민화합의 마당인 연등회의 역사를 살펴본다.

등불을 통해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를 기리고 널리 알리려는 연등회의 시작은 서기 86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경문왕 6(866) 정월 보름과 진성여왕 4(890) 정월 보름에 임금이 경주 황룡사로 행차해 연등을 간등(看燈)했다고 적혀 있다. 이에 근거하면 서기 866년부터 연등회가 열렸음을 알 수 있다.

연등회가 국가 차원의 의례로 정착한 시기는 불교를 국교로 삼았던 고려시대부터다. 등을 만들고 잔치를 준비하는 국가기관인 연등도감까지 설치됐다. “궁궐 마당에 가설무대를 세우고 놀이를 하였고, 악대(樂隊)가 나와 음악을 연주하면 이에 맞춰 무희(舞姬)들이 춤을 추었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나온다. 불교가 억압받은 조선시대에는 민간을 중심으로 연등회가 명맥을 이었다. 문화재청의 설명에 따르면 사자놀이, 탈놀이, 농악놀이 등 민간에서 전승되는 놀이가 행해졌다. 오늘날에도 각 불교단체의 연희단과 율동단이 노래와 춤으로 어울림마당을 펼쳐지며, 흥겹고 정다웠던 풍경을 재현하고 있다.

나라를 잃은 일제강점기에도 연등회의 광명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경성(서울) 시내가 화려한 연등으로 불야성을 이루었고, 이를 보기 위해 부녀자와 어린이들이 지방에서 올라왔다는 기록이 있다. 연등회의 하이라이트인 제등행렬이 등장한 때도 이 시기다. 1920년대부터 스님과 불자들이 등을 손에 들고 거리를 행진했다. 시련도 있었다.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은 불교계에도 적용됐다. 1937년부터 부처님오신날을 양력으로 바꾸고 축제 형식을 자국의 하나마쯔리(花祭)’로 변형해 연등회의 일본화를 시도했다. 다행히 8.15 광복을 맞았고 부처님오신날은 음력으로 환원됐다.
 

1971년 연등회 풍경.
1982년 연등회 풍경.

1955년 부처님오신날 제등행렬을 현재 진행되는 연등회 모습의 효시로 본다. 불자들은 조계사종로3을지로3시청중앙청안국동로터리조계사를 연등을 들고 돌면서 부처님의 탄생을 축하했다. 거리에는 만등(萬燈)이 달렸고 곳곳에 아치(Arch)를 세워 분위기를 돋우었다. 1975년 부처님오신날이 국가공휴일로 지정되면서 연등회 규모도 크게 확대됐다. 공휴일 제정 이듬해인 1976년부터 불자들은 여의도광장에서 종로 조계사까지 9km의 차도를 당당히 활보할 수 있게 됐다.

1996년 종단 차원의 봉축기획단이 출범하면서 연등회의 내용은 한층 성장했다. 전통연등회와 현대거리축제의 적절한 조화를 이룩했다. 제등행렬 장소는 여의도에서 동대문운동장으로 변경하고, 행렬종착지에서 해산하지 않고 곧바로 놀이마당으로 연결함으로써 극적인 감동을 주었다. 이후 외국인의 참여가 꾸준히 늘어났다. 이에 등 만들기와 전시, 놀이마당과 불교체험마당 등을 신설해 현재 연등축제의 기본 틀을 완성했다.

이처럼 연등회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2012년 국가무형문화재에 지정됐다. 2020년 연말에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면서 국제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조계종 총무원 문화부장 오심스님은 연등회는 찬란하고 유구한 한국불교문화를 대표한다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연등회를 적극 홍보하는 등 전 세계인들이 즐기는 화합과 평화의 축제로 영원히 이어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하겠다고 역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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