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는 사람이 책이라면’
그런 재밌는 상상을 해 본다
표지는 무슨 색, 내용은
활자의 여백과 간격은?

그렇게 스스로를 하나의
사물이라고 생각하니
좀 더 객관적으로
나를 판단할 수 있었다

살아가면서 많은 책들을 만나지만 또 은근히 버리기 아까운 것이 책이다. 책을 일단 소지하고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벌써 해박해진 기분이다. 내게로 쏙쏙 흡수되려고 예약된 삶의 보고들. 그런데 그것을 버린다니. 중요한 이야기들을 눈앞에서 잃어버리는 기분이 들어서, 책을 버리는 일이 싫다. 학교를 졸업할 때는 비교적 깨끗했던 책들이나 재미있게 공부했던 책들이 아까워서 졸업하고도 한동안 그 책들을 버리지 못했다. 다 읽은 소설, 다 읽지 못하고 오랫동안 책장에 꽂혀있는 책들도 마찬가지이다. 이제는 쓸모를 다했으니, 미련 없이 보내주어야 함을 안다.

책들을 한 권씩 조심스럽게 펼쳐 손끝으로 책장을 쓸어 주루룩 훑어보면, 그마다 종이의 질감과 글씨가 주는 느낌이 다르고, 그 책을 읽었던 시기의 각기 다른 향수를 떠올리게 한다. 그 이야기와 지식들을 마주하면 또 역시나 미련이 생겨서 다시 책장 속에 밀어 넣고 마는 일이 반복되었다. 하지만 그런 ‘미련의 시간’도 일정 기간이 있는 듯하다.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책들을 버릴까 말까 그렇게 고민했던 긴 시간들이 지나자 드디어 마음먹고 책들을 과감히 정리할 수 있는 날이 오게 되었다. 책과의 이별은 간단했다.

이제는 설렘이 없는 책들을 골라, 바코드를 찍고 중고 매장에 판매를 하겠다고 등록을 했다. 몇 몇 책들은 아직 완전히 읽지 못해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책이 판매되기 전에 한 번 더 읽어보는 건 어떨까 싶었지만, 그러기도 전에 갑작스런 주문이 들어왔다. 이제는 당장 이 책을 보내주어야 했다. 처음에 내가 이 책을 골랐을 때는 분명 내게 어필되는 매력이 있었을 텐데, 이제는 의미가 없어졌다는 것이 씁쓸해졌다. 이 책은 더 이상 내 마음을 바꿔줄 힘이 없는 책이 된 것이다. 세상에는 많은 책이 있어. 괜찮아. 또 좋은 책이 오겠지. 이 책은 다른 누군가에게는 또 최고의 책이 될 수 있을 거야. 그렇게 아꼈던 책들을 정리했다.

어떤 책은 소장한지 10년이 지나도 여전히 내 마음을 사로잡아서, 평생 소장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내용을 봐도 봐도 마음에 든다. 어떤 책은 그 당시 내게 큰 도움이 되었지만 많은 시간이 지나고 다시 읽어보니 너무나 시시해져버렸다. 오래 설레는 책, 다 읽어도 질리지 않고 또 읽는 책, 제목과 표지에 끌렸지만 초반까지만 읽고 재미가 끝나버린 책, 읽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버리기는 싫은 책, 유명한 베스트셀러지만 내게는 매력 없는 책, 누가 읽어도 재미있게 읽을 좋은 책, 쉽고 편안한 책, 어렵고 지루하지만 똑똑한 책, 이 많은 책들은 마치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연과 같지 않은가? 나라는 사람이 한 권의 책이라면 어떤 책일까, 그런 재미있는 상상을 해본다. 표지는 무슨 색일까? 내용은? 활자의 여백과 간격은? 그림과 글의 비율은?

그렇게 스스로를 하나의 사물이라고 생각하니, 좀 더 객관적으로 나를 판단할 수 있었다. 비록 대중적인 베스트셀러가 아니더라도, 어떤 단 한 사람에게 계속 읽고 싶은 책, 가슴 한켠의 책장 속에 따스하게 소장하고 싶은 책처럼, 그렇게 좋은 인연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겨울밤이다.

[불교신문3655호/2021년3월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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