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 영원히 죽지 않는 영혼의 의사일지니”

‘육체는 영혼을 구속하는 감옥’
영혼이 육신을 완전히 벗어나
파라다이스에 이르는 길 꿈꿔

‘이승을 어떻게 살았는냐’가
죽은 후 다음 세상 결정 관건

‘절제와 금욕’이 육체의 자유
구속한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욕망으로부터 자유 얻는 길’

‘아카데미’ 플라톤을 보면서
업과 윤회, 해탈 가르침 오버랩

이탈리아의 화가 라파엘로(Raphaello, 1483~1520)가 그린 ‘아테네 학당’. 중앙에서 오른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있는 인물이 플라톤이다.
이탈리아의 화가 라파엘로(Raphaello, 1483~1520)가 그린 ‘아테네 학당’. 중앙에서 오른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있는 인물이 플라톤이다.

육체적 관계가 아닌 순수하고 고귀한 정신적 사랑을 가리켜 흔히 플라토닉 러브(platonic love)라고 한다. 플라톤은 도대체 어떤 삶을 살다갔기에 가장 숭고한 사랑이란 단어 앞에 그의 이름이 붙은 것일까? 그는 현실보다는 이상을, 감성보다는 이성을, 육체보다는 영혼을 사랑한 철학자였다. 눈에 보이는 사물들이나 인간들은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 소멸하게 된다. 그는 변화하는 세계가 아니라 영원불멸하는 실재, 즉 이데아(Idea)를 꿈꾸고 설계했다.

그 이상적인 세계를 젊은이들에게 전하기 위해 학문의 전당인 아카데미(Academy)를 창립한 인물이기도 하다. 플라토닉 러브와 이데아, 아카데미와 같은 말들이 오늘에도 쓰이고 있다는 것은 플라톤이 사람들의 마음에 살아있다는 방증이다. 그를 기억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되는 것이다.

스승을 기록하는 삶
플라톤(Platon, BC428~BC348)은 아테네의 명문가 집안에서 태어난 전도유망한 청년이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그의 삶을 온통 바꾸어놓았다. 가장 존경하는 스승이 죽어가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본 제자의 마음은 어땠을까? 소크라테스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아무런 저항 없이 묵묵히 독배를 마셨다. 31세의 청년은 진리를 위해 기꺼이 죽음을 선택한 스승을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도대체 진리가 무엇이기에 죽음 앞에서도 그렇게 초연할 수 있는 것일까? 나도 스승처럼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그는 스승을 죽음으로 이끈 아테네의 민주정치에 대해 환멸을 느꼈다. 당시는 외국인과 여성, 노예를 배제한 아테네 시민들이 직접 정치에 참여하여 의사를 결정하는 시스템이었다. 이러한 직접 민주주의가 좋아보일지 몰라도 시민들이 이성적으로 깨어있지 않으면 우민정치로 흐를 위험성이 항상 도사리고 있었다. 플라톤은 아테네 시민들의 무지와 군중 심리가 스승인 소크라테스를 죽였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시민들이 직접 정치에 참여하는 제도를 반대하고 지혜를 사랑하고 선(善)과 악(惡)을 구분할 줄 아는 철인(哲人)이 왕이 되어 정치를 주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스승의 죽음 이후 그는 요즘말로 멘붕에 빠진다. 그는 아테네를 떠나 이집트와 키레네 등 여러 나라를 여행하면서 아픈 상처를 달랬다. 그러나 마음속엔 항상 소크라테스가 자리하고 있었다. 스승을 이처럼 허무하게 보낼 수 없다고 생각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을 후세에 남기기로 결심했다. 그는 스승이 배심원들 앞에서 당당하게 논리적으로 변론하는 모습이나, 죽기 전 사랑하는 벗들과 나눈 이야기를 모두 기억하고 기록했다. 36권에 달하는 방대한 양의 <대화편(The Dialogue)>은 그 흔적들이다.

누군가의 마지막 모습을 눈앞에서 지켜본 사람의 무의식에는 죽음에 대한 생각이 똬리를 틀고 있기 마련이다. 필자가 이 글을 쓰게 된 것도 어린 시절 죽음을 목격한 기억이 무의식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 플라톤은 <파이돈>에서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말을 빌려 ‘철학은 죽음의 연습’이라고 했다. 이 말은 죽음을 준비하는 삶이 곧 철학이라는 의미다. 도대체 죽음이 무엇이며 죽으면 어떻게 되기에 연습까지 해야 하는 것일까? 죽음을 연습하는 삶과 그렇지 않는 삶이 질적으로 다르다는 뜻일까?

플라톤은 여행을 마치고 아테네로 돌아와 아카데미를 설립하고 20년 동안 젊은이들을 가르친다. 그리고 스승을 기록하다가 생을 마감한다. 플라톤의 죽음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전한다. 그는 81세의 나이에 어느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피로연에서 죽었다고 하며, 책상 위에서 조용히 영면했다고도 한다. 이와는 달리 흥미로운 이야기도 전하는데 슬증(蝨症), 그러니까 이에 감염되어 죽었다는 것이다. 그의 죽음에 대해 다양한 이야기가 전하는 것처럼, 여러 버전의 묘비명도 있다. 그 중 플라톤의 삶과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것을 뽑아보았다.

“절제와 정의로운 성격의, 죽은 자 가운데서도 뛰어난 신과도 같은 플라톤, 여기에 잠들다.”

 

현실보다는 이상을, 감성보다는 이성을, 육체보다는 영혼을 사랑한 철학자 플라톤(Platon, BC428~BC348).
현실보다는 이상을, 감성보다는 이성을, 육체보다는 영혼을 사랑한 철학자 플라톤(Platon, BC428~BC348).

철학, 죽음의 연습
플라톤은 서양철학이라는 건물의 뼈대를 세운 인물이다. 그는 단순히 스승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철학적 체계를 완성했다. 그가 세운 철학적 기초는 지금까지 많은 이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영국의 철학자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 1861~1947)가 “서양철학사는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고 말한 이유다. 마치 팝의 황제 비틀즈 이후의 음악은 그 아류에 불과하다고 평가하는 것과 비슷하다. 지나친 면이 없지 않지만, 그만큼 영향력이 컸다는 의미가 된다.

그렇다면 플라톤이 강조한 이데아란 무엇일까? 집을 짓는 데 사용하는 벽돌을 예로 들어 설명해보기로 하자. 하나의 벽돌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만드는 사람과 재료, 벽돌을 찍어내는 틀이 필요하다. 그런데 벽돌의 재료인 모래나 만드는 사람은 소멸하거나 변할 수 있지만, ‘벽돌’이라는 형상(form) 자체는 영원히 남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 폼만 기억한다면 언제 어느 곳에서든 벽돌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이는 벽돌뿐만 아니라 의자나 책상 할 것 없이 모든 사물에 적용된다. 사람도 마찬가지로 재료에 해당하는 개별 인간은 언젠가는 죽게 되지만, ‘사람’이라는 형상만은 영원하다. 그 형상이 바로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다. 이데아가 원본이라면, 현실 세계는 복사본이라고 할 수 있다.

플라톤은 인간의 육체는 언젠가 소멸하지만 영혼은 불멸한다고 생각했다. 사람이 죽으면 그가 이승에서 어떻게 살았는가에 따라 다음 세상이 결정된다고 한다. 만약 선하게 살았다면 영혼은 예전과는 좀 더 나은 환경에서 태어나지만, 악하게 살다 죽으면 좋지 않은 몸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마치 자신이 저지른 죄의 경중에 따라 형벌이 정해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육신은 전생에 지은 잘못으로 갇히게 되는 일종의 감옥과도 같은 곳이다.

영혼이 다음 세상으로 가는 여정 또한 꽤나 흥미롭다. 사람이 죽으면 영혼은 뜨거운 태양이 이글거리는 들판을 건너야 한다. 들판이 끝나는 지점에 강이 하나 나타나는데, 바로 레테(Lethe) 강이다. 흔히 ‘망각의 강’이라 불리는 곳이다. 그 강물을 마시면 전생의 기억은 모두 사라지고 다음 세상에서 새로운 몸으로 살아가게 된다. 윤회적 사유가 플라톤의 마음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육체는 ‘영혼을 구속하는 감옥’이다. 그는 영혼이 이 세상으로 돌아오지 않고 육신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행복이 가득한 파라다이스에 이르는 것을 꿈꿨다. 그런데 영혼이 해방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죽어야 한다. 그것도 아주 잘 죽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음 생을 받아 또 다른 감옥살이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잘 죽기 위해서는 이승에서 아주 잘 살아야 한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 우리의 육체는 선하고 이성적으로 살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방해를 한다. 예컨대 성적인 쾌락이나 많은 것을 소유하려는 탐욕 등이 영혼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방법은 하나뿐이다. 바로 육신으로 더렵혀진 영혼을 깨끗이 정화하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절제와 금욕적인 생활, 선하고 정의로운 삶이 수반이 되어야 한다. 절제와 금욕이 육체의 자유를 구속하는 것이라 생각할지 몰라도 그에게는 오히려 욕망으로부터 자유를 얻는 길이었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의 영혼은 더 이상 윤회하지 않고 행복만이 가득한 파라다이스로 가는 것이다. 그곳은 정화된 영혼만이 갈 수 있는 구원의 세계다. 플라톤의 묘비명 가운데 ‘절제와 정의로운 성격’으로 묘사한 글을 소개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죽는 연습, 아니 잘 사는 연습을 실천했던 철학자였다.

오랜만에 플라톤을 펼쳐보면서 불교의 업과 윤회, 해탈의 가르침이 자꾸만 오버랩 됐다. 지은대로 받는 시스템이나 윤회로부터 벗어나는 해탈이 불교의 궁극적 목표라는 점에서 그랬다. 그런데 궁금하기는 하다. 플라톤은 과연 ‘그곳’으로 가서 스승과 영원한 삶을 누리고 있는지 말이다. 아차, 중생심이 발동했다. 디오게네스가 쓴 플라톤의 비문 마지막 문장이다.

“플라톤, 영원히 죽지 않는 영혼의 의사일지니.”

마음의 상처로 고통 받고 있는 누군가에게 플라톤은 여전히 영혼을 치유하는 의사로 남아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는 이유다.

[불교신문3655호/2021년3월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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