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시청, 쇼핑, 잠 줄이고 자기 계발해서 만든 행복”

용기 내 도전하는데 늦은 나이 없어
행복도 불행도 모두 자기가 할 나름
마흔 중반 넘어 나를 찾고 무용 매진

혼자되신 엄마 5남매 키우시며 고생
일찍 철들어 서로 배려하며 우애 깊어

축제2. 116cm×80cm.
축제2. 116cm×80cm.

 

생명나눔실천본부와 인연을 맺어 활동한 지 벌써 9년이 지났다. ‘생명나눔을 몰랐다면 나는 어떤 모습으로 9년이라는 세월을 채웠을까?’ 상상이 안 될 정도로 생명나눔 활동과 인연은 일상으로 자리 잡았다.


코로나19로 집안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여러 해 동안 활동한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생명나눔 소식지를 자주 들춰 본다. 매월 발간하는 <행복한 빈손> 이라는 따뜻한 제목의 소식지에는 생명나눔 소식과 정보, 여러 활동이 실려 있다. 어려운 이웃에게 치료비를 전달하고 여러 행사에서 펼쳤던 다양한 공연 모습에서 생명나눔의 마스코트라고 자부하며 나눔의 꽃을 피워내려 애썼던 나를 보며 뿌듯하면서 쑥스럽다. 지난날을 되새기며 웃음 지어보고 활발하게 활동했던 그 시간이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한 지 새삼 느끼며 1분1초, 하루, 한 달을 값지게 보내야겠다는 각오를 더 간절하게 새기는 요즘이다.


전라도 끝자락 여수 돌산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는 농부의 딸이자 섬 처녀였다. 5남매 다복한 가정이었지만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어머니는 젊은 나이에 5남매를 홀로 키워야했다. 우리 5남매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연스레 일찍 철이 들었다. 서로 양보하며 각자의 자잘한 욕심은 일찌감치 포기했던 것 같다. 하루하루가 녹록치 않았기에 꿈을 꿀 처지도 못 됐다. 그래도 꿈을 꾸었을까? 나는 무슨 꿈을 꾸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우리 5남매는 남에게 불평하지 않고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온순한 성품을 가졌다. 다만 유년시절, 학창시절 힘들었지만 가장 힘들 어머니 속 썩이지 않으려 욕심내거나 불평하지 않았으며 서로 배려하는 우애가 남달랐다. 결혼하고 세 아이를 기르면서도 나를 내세우기보다 양보하며 살았다. 그렇게 또 25년이 흐르고 막내가 성인이 된 뒤 평생 처음으로 여유라는 것이 생기고 ‘나’를 살피게 됐다.


마흔 중반 무렵부터 제2의 인생이 시작되었다. ‘생명나눔’을 알게 되고 갑상선암 투병하며 생명의 소중함을 절실히 깨달았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나’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내가 건강해야, 내가 즐겁고 행복해야, 가족도 살필 수 있음을 그제야 알았다.


취미와 운동으로 시작한 무용은 이제 직업이 되었다. 일주일에 3~4일을 무용 수업하니 일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집안 옷장을 가득 채운 무용의상이 그런 나를 말해준다.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 새는 줄 모른다’더니 내가 딱 그 짝이다. 늦은 나이에 시작한 무용이 정말 재미있고, 내가 생각해도 자질도 갖춘 것 같다. 천재가 노력하는 사람 만 못하고 노력하는 사람은 좋아하고 즐기는 사람을 못 쫓아간다고 했는데, 나는 무용을 좋아할 뿐만 아니라 주변에서 자질도 갖췄다고 인정하니 이만한 복도 없다.


땅 끝 섬에서도 어렵고 형제 많은 가정에서 평범하게 자라 결혼하고 아이 낳고 이제 어느 정도 자리 잡았나 했더니 암까지 그것도 두 번이나 생사를 넘나드는 고통을 겪었는데도, 형제간 우애 깊고, 어머니 건강하시며 주변과 사이좋게 지내며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일 하면서 지내는 이 행복이 어디에서 왔을까? 생각하면 정말 모르겠다.


굳이 답을 찾을 필요도 없고 정답도 없다. 그냥 매일매일 최선을 다하며 살아왔을 뿐이다. 절대 불평하거나 남 탓하지 않고 욕심 내지 않고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했다. 자식으로 형제로 아내로 며느리로 또 엄마로, 40중반 넘어서는 그 많은 사람 중에 ‘나’를 추가한 것뿐이다. 그 ‘나’가 ‘무용’이라는 옷을 입고 찾아왔다.


정말 열심히, 즐겁게 배웠다. 입시생처럼 뜨거운 열정을 쏟아 부었다. 먼 거리를 전철을 갈아타며, 동영상을 눈이 쓰릴 정도로 보고 음악을 수백 번 들으며 시간투자, 열정투자로 우직하게 무용에만 매진했다. 우리 춤 지도자 자격증을 취득하고, 강남에서 영등포로. 수원으로, 용인으로, 살풀이. 승무 이수과정을 마쳤다. 아르메 무용단 단원이 되면서 또 한 번 도약하는 계기가 되었다. 아르메 무용단 예술감독님이신 천재적 춤꾼 김충한 선생님의 가르침과 이수향단장님, 김애경 선생님 그늘 아래서 공연기획, 안무, 연출 등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고 아르메 선배님, 동료 단원들 속에서 성장 할 수 있었다. 나의 모습을 보는 주변 지인들이 무용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배우겠다는 사람이 하나둘씩 생기며 지금의 마하무용단이 탄생했다.

지금은 대학교 사회교육원 우리 춤 체조 지도교수로 남을 가르치는 위치에 섰다. 현역으로 왕성하게 활동하는 여러 스승님과의 교류와 가르침으로 아름다운 우리 춤을 계승 보급시키는 일에 열정을 불태우고 있다.


올해는 행복나누리 문화예술단과 마하무용단이이 함께하는 행사와 공연을 구상 중이다. 해외공연도 계획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소중한 문화유산인 태권도와 우리 춤의 협연을 해외에 선보일 생각에 지금부터 설렌다.


김영란 화백님과 인연으로 시작해 바쁜 일상 속에서도 화실 가는 길은 또 하나의 기쁨이 된지 오래다. 물빛 가득 머금은 붓 끝에서 피어나는 향기에 점점 더 매료된다. 화실 넒은 테라스로 가득 쏟아지는 눈부신 햇살을 받으며 찰랑거리는 붓질 소리를 듣다보면 더 없는 행복에 젖는다. 화실 선생님의 권유로 소박한 개인전을 준비 중이다. 그동안 틈틈이 그려온 그림을 세상에 내 놓으려니 부끄럽기도 하고 부족함도 많이 보인다. 그러나 그 또한 노력의 흔적이고 결과물이니, 도전은 ‘나이’가 아니라 ‘용기’라는 말에 힘을 얻어 용기를 낸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며 좌우명이다. 거저 얻어지는 것은 없다. 이 세상에 당연한 것 또한 없다. 공짜 없고,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은 진리다. 존재감 없이 꿈이 뭔지도 몰랐던 시골아이가 가장 화려하며 의미 있는 중년을 보낸다. 풍요로운 지금의 일상은 그냥 얻어지지 않았다. 잠을 줄이고, 텔레비전 보는 시간 줄이고, 쇼핑 줄여 시간을 만들고 그 시간을 또 쪼개고 쪼개 내일은 없는 듯 열정을 쏟으며 나의 계발에 힘 써온 결과다.


큰스님들의 훌륭한 법문으로 채우는 귀한 지면을 저에게 내준 불교신문의 뜻도, 행복도 불행도 오직 자신이 만든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평범한 보살을 통해 전하고자 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귀한 지면 주신 불교신문에 감사드리며 괜한 글로 업만 쌓은 것 같아 송구스럽다. 다만, 저런 보살도 하는데 내가 못할까. 용기 내어 박차고 일어나는 불자님이 있다면, 큰 복으로 삼겠다.
 

[불교신문3655호/2021년3월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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