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 격동 100년] <2> 통도사 독립운동
[한국불교 격동 100년] <2> 통도사 독립운동
  • 이성수 기자
  • 승인 2021.03.01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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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장 사명 구하스님 ‘나라사랑’ 계승한 국지대찰(國之大刹)

1910년 8월 29일 일제의 대한제국 강제병합으로 한반도는 식민지로 전락했다. 전국 각지에서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한 항쟁이 일어났고, 일제는 무력을 앞세워 진압했다. 불교계 상황도 녹록하지 않았다. 일부 친일승려를 앞세워 한국불교를 장악하기 위해 나선 상황에서 만해, 석전, 초월 스님 등이 자주독립 실현에 나섰다. 하지만 막강한 일제를 극복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런 가운데 자장율사가 창건한 통도사는 구국(救國)의 깃발을 높이 올리고 다양한 방법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1919년 3월13일 신평장날을 맞이애 통도사 스님들이 주도해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사진은 신평장의 최근 모습.
1919년 3월13일 신평장날을 맞이애 통도사 스님들이 주도해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사진은 신평장의 최근 모습.

1919년 3월13일 통도사 앞 신평마을 장터.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난지 10여일 지난 무렵이었다. 장날을 맞아 하북면 인근의 주민과 상인이 모여 들었다. 일본 경찰의 감시를 뚫고 거사에 성공한 ‘3·13 신평 장터 만세운동’은 통도사 스님들이 주도했다.

통도사 지방학림 대표 김상문(金詳文, 1893~1951) 스님을 비롯해 양만우(梁萬佑, 1897~1968), 박세문(朴世文, 1894~1920), 이기주(李基周, 1899~1980), 김진오(金鎭五), 신화수(申華秀), 신구담(申九潭) 스님 등 50여 명의 스님들이 주민들과 ‘대한독립만세’를 우렁차게 외쳤다. 서슬 퍼런 일제 치하에서 통도사 스님들이 주도한 이날 시위는 동부 경남에서는 처음으로 궐기한 만세운동으로 평가 받는다.

1919년 8월 조선헌병사령부의 ‘종합보고서’에는 “3월 29일 양산 하북면 신평시장에서 통도사 부속보통학교및 지방학림 생도 4~50명, 동(同) 불교전수부 생도 약 10명, 그리고 불령(不逞) 승려 약 10명이 주모자가 되어 시위운동을 감행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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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통도사는 구하스님을 비롯한 대중이 다양한 방법으로 항일독립운동을 펼쳤다. 사진은 일제강점기 통도사 전경.
일제강점기 통도사는 구하스님을 비롯한 대중이 다양한 방법으로 항일독립운동을 펼쳤다. 사진은 일제강점기 통도사 전경.

1919년 통도사 스님 70명
3·13 신평 만세 운동 주도

이날 만세운동은 통도사 출신의 오택언(吳澤彦, 1897~1970) 스님이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3·1운동에 참여한 후 만해(萬海, 1879~1944) 스님의 밀명을 받고 통도사 스님들에게 독립선언서를 전달했던 것이다. 오택언 스님은 통도사 주지 김구하(九河, 1872~1965) 스님의 후원으로 서울 중앙학림에서 유학하고 있었으며, 앞서 통도사에서 주석하며 <불교대전>을 집필하고 강사(講師)로 학인을 지도한 만해스님과 인연을 맺고 있었다.

통도사 스님들이 주도한 ‘3·13 신평장터 만세운동’은 독립운동의 불길이 경남 전역으로 퍼지는 촉매제가 되었다. 3월27일, 4월1일, 5월4일까지 양산에서 만세운동이 이어졌고, 3월31일 합천 해인사와 4월4일 밀양 표충사에서도 스님들이 주도한 시위가 발생해 호국불교의 전통을 계승했다.

영축총림 통도사 방장 성파 대종사는 “구하 큰스님께서 신평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한 양만우(양대응) 스님을 불러 ‘왜경에 붙잡히면 고문을 당하고 징역도 살 수 있으니 피신하라’며 도피자금으로 100원을 전달했다”면서 “그 스님은 10여년 가까이 통도사를 떠나 몸을 피했다”고 선대 스님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했다.

통도사의 독립운동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통도사(옥천사) 출신의 박노영(朴魯英, 1897~1976) 스님은 3·1운동에 가담한 후, 백초월(白初月, 1878~1944) 스님과 더불어 비밀항일조직인 혁신단(革新團)에 참여해 지하신문인 <혁신공보(革新公報)>를 발간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박노영 스님은 1920년 임시정부가 있는 상해를 거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미네소타대를 졸업하고 하버드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최초의 한국인이다.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11월 15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중국 상해에서 발표된 대한승려연합회(大韓僧侶聯合) 선언서에 구하스님이 참여했던 것이다. 이 선언서 말미에 실린 12명의 대표자 명단 가운데 ‘김취산(金鷲山, 김축산)’이 바로 구하스님이다. 축산은 구하스님의 법호이다.

다른 대표자들이 신분을 숨기기 위해 이명(異名)을 사용했지만 구하스님은 굳이 피하지 않았다. 설마 본명(법명)을 사용했겠냐는 측면에서 역발상을 한 것이다. 대한승려연합회 선언서가 처음 공개된 직후인 1970년 3월8일자 <대한불교(지금의 불교신문)>는 “살아계신 스님들의 증언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오만광(오성월, 범어사 주지), 이법인(이회광, 해인사 주지), 김취산(김구하, 통도사 주지), 지경산(김경산, 범어사 고승) 스님”이라고 보도했다.
 

일제강점기 통도사 주지를 여러차례 지낸 구하스님은 항일독립운동에 직간적으로 참여했다. 사진은 1912년 통도사 주지 당시 '화엄대경'회향을 기념해 촬영한 것이다.
일제강점기 통도사 주지를 여러차례 지낸 구하스님은 항일독립운동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다. 사진은 1912년 통도사 주지 당시 '화엄대경'회향을 기념해 촬영한 것이다.

구하스님을 비롯한 대표자들은 대한승려연합회 선언서에서 “한토(韓土)의 수천 승려는 이천만 동포 급(及) 세계에 대하야 절대로 한토에 재(在)한 일본의 통치를 배척하고 대한민국의 독립을 주장함을 자(玆)에 선언하노라”면서 다음과 같이 결의했다.

“대한의 국민으로서 대한국가의 자유와 독립을 완성하기 위하야 이천년 영광스러운 역사를 가진 대한불교를 일본화와 멸절에서 구하기 위하야 아(我) 칠천의 대한승니(大韓僧尼)는 결속하고 기(起)하였노니 시사보국(矢死報國)의 이 발원과 중의경생(重義輕生)의 이 의기(義氣)를 뉘 막으며 무엇이 막으리오 한 번 결속하고 분기한 아등은 대원(大願)을 성취하기까지 오직 전진하고 혈전(血戰)할 뿐인뎌.”

1937년 중일전쟁(中日戰爭)을 계기로 한글 사용을 억압하는 정책을 펼친 일제는 1939년 11월 10일 '조선민사령(朝鮮民事令)'을 개정해 창씨개명(創氏改名)을 강요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통도사는 경전을 한글로 옮기는 역경(譯經) 사업에 나섰다. 1935년 해인사, 범어사 등 경남지역 사찰과 함께 해동역경원(海東譯經院)을 설립한 것이다.

1935년 1월6일자 조선일보는 해동역경원 창립을 ‘조선불교의 획기적 사업’이라고 보도했는데, 당시 해동역경원장은 구하스님이 맡았다. 한글 역경에 대한 식견과 의지가 분명했고, 통도사는 물론 해인사와 범어사 스님들도 구하스님을 존경하고 따랐기 때문으로 보인다. 통도사, 해인사, 범어사는 해동역경원 설립은 물론 1933년 7월 폐간된 <불교>를 복간하는데 힘을 합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통도사, 해인사, 범어사는 해동역경원을 설립해 경전의 한글화 사업을 전개해 우리말을 보급하는데 앞장섰다. 사진은 불교지에 실린 해동역경원 광고. 원장은 구하스님으로 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통도사, 해인사, 범어사는 해동역경원을 설립해 경전의 한글화 사업을 전개해 우리말을 보급하는데 앞장섰다. 사진은 불교지에 실린 해동역경원 광고. 원장은 구하스님으로 되어 있다.

만해스님과 지속적으로 연락
해인, 범어사와 역경원 설립

만해스님은 1937년 3월 『(신)불교』 1호에 실린 ‘불교 속간(續刊)에 대하야’라는 글에서 ”경남 3본산 회의의 결과로 역경원이 생겼다“면서 ”역경(譯經) 사업과 <불교> 속간을 다만 3본산의 힘만으로 영원히 지속하겠다는 각오와 준비를 가지고 하는 것인즉 그들의 장도(壯圖)도 또한 경복(敬服)할 만한 것이다“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또한 만해스님은 ”조선불교 전체의 급선무 중의 급무(急務)가 되는 역경 사업이나 불교지(誌)의 속간을 어찌 경남3본산에만 일임(一任)하리오“라며 조선불교 전체의 관심을 촉구하기도 했다. 이처럼 통도사, 해인사, 범어사 등 경남 지역 3본산은 한글수호와 <불교> 매체를 운영하면서 민족의 진로를 모색했던 것이다.

이처럼 통도사는 국내외에서 다양한 형식으로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그 배후에는 구하스님이 있었다. <독립운동사>에 따르면 구하스님은 일제의 눈을 피해 △안창호 임시정부 총리(5000원) △백초월 혁신공보 사장(2000원) △이종욱(3000원) △정인섭(1000원) △오리산(500원) △장재륜(500원) △신정흔(500원) △김포광(300원) △정탁(100원) △양만우(100원) 등 상해임시 정부 요원을 비롯해 독립군과 관련자들에게 자금을 지원했다. 구하스님을 시봉한 현문스님이 2005년 ‘독립자금 관련 영수증 5장과 ‘사변시(3·1운동을 지칭) 출금증’을 공개하면서 세상에 드러났다.

1924년 6월30일 양산경찰서가 경상남도 경찰부에 보고한 자료도 구하스님의 독립운동자금 지원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정 8년(1919)이후 배일(排日)운동자 박노영, 백초월과 연결하여 상해 반정부(反政府)에 거액의 공금을 보냈다고 의심되었다.”

이 보고서는 상해임시정부 송금 가능성을 희박하게 보면서도 백초월 스님에게 2000원을 대여(貸與)한 사실은 분명하다고 밝히고 있다. 비밀을 유지해야 하는 자금의 특수한 상황을 고려하고, 이 무렵 조선총독부가 구하스님의 통도사 주지 임명을 지연시키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독립운동을 암암리에 지원했음은 분명해 보인다.

이밖에도 구하스님은 △창녕 24인 결사대 변호사비 지원(1919) △독립·교육 자금 마련을 위한 양산 의춘신탁(宜春信託) 설립(1920) △불교근대화와 인재양성을 위한 한국사찰 최초의 잡지 <축산보림> 창간 △임시정부 자금 지원 위한 백산상회 참여 △항일운동 펼친 동아불교회 참여 등 다양한 방법으로 독립운동을 후원하였다.
 

구하스님을 비롯한 조선불교 대표 12명이 서명한 대한승려연합회 독립선언서. 1919년 가을 대한민구 임시정부가 있는 상해에서 발표됐다.
구하스님을 비롯한 조선불교 대표 12명이 서명한 대한승려연합회 독립선언서. 1919년 가을 대한민구 임시정부가 있는 상해에서 발표됐다.

구하스님 독립자금 전달도
1941년엔 통도중 강제폐교

일제의 폭압통치가 정점에 달했던 1941년 9월3일 통도중학교 교사로 재직하고 있던 조병구(曺秉球, 1907~2003), 김말복(金末福, 1909-1985) 스님은 상해임시정부 요인 김창숙(金昌淑, 1879-1952)의 ‘고종황제 만장시(詩)’와 김규식(金奎植, 1881-1950)의 ‘독립기원 시(詩)’를 배포해 체포되었다. 이 사건으로 교장 양만우, 조병구, 김말복 스님을 비롯해 교사와 학생 등 50여 명이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고, 통도중학교는 강제 폐교되고 말았다.

방장 성파스님은 “구하스님은 밖으로는 항일을 표방하지 않았지만 은밀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했다”면서 “양산 출신의 상해임시정부 재무차장 윤현진에게 자금을 전달했다”고 증언했다. 이어 성파스님은 “미리 연통을 받은 후에 습격을 받아 뺏긴 것으로 위장하여 독립자금을 전달하기도 하고, 기방을 출입하여 사찰 재정을 탕진한 것으로 꾸미기도 하였다”면서 “구하스님은 ”수행자인 동시에 사상가, 정치인, 행정가로 민족의 현실을 직시하고 해방이라는 미래를 예견한 분“이라고 밝혔다.

구한말 일제강점기 격동의 한복판에서 통도사는 구하스님을 중심으로 한 대중스님들이 항일독립운동의 전면에 나서거나 아니면 은밀한 활동을 통해 민족의 암흑을 타파하기 위해 노력했다. 최근 방장 성파스님이 공개한 ‘일제강점기 징용자 명단’도 같은 정신을 담고 있다.

성파스님은 1993년 6월 일본 체류시 <교토신문(京都新聞)>이 보도한 ‘조선인 군인 군속(軍屬) 3000명 명단(복사본)’ 기사를 보고 재일교포 소장자를 직접 만나 명단 복사본을 입수해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다. 이 명단은 일제말기에 강제 징집되어 태평양 전쟁에 투입된 조선인들이 일본 패망후 미군의 하와이 수용소에서 1년간 생활하면서 작성한 것이다.
 

일제에 타협하지 않고 끝까지 항일운동을 펼친 만해스님은 통도사 강사를 지내기도 했다. 만해스님은 구하스님과 가까운 사이였다.
일제에 타협하지 않고 끝까지 항일운동을 펼친 만해스님은 통도사 강사를 지내기도 했다. 만해스님은 구하스님과 가까운 사이였다.

성파스님 조선징용자 명단 입수해
호국 정신 변함없이 계승하고 있어

방장 성파스님은 “일제에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들이 미군 포로수용소에서 <자유한인보(自由韓人報)>를 만들면서 부록으로 게재한 명단”이라면서 “또 다른 경로로 국가보훈처에 같은 명단이 게재되어 있는 것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방장 성파스님은 “신라의 대국통(大國統)으로 삼국의 대통합을 염원한 자장율사가 창건한 통도사는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한 사명대사와 대한제국 선포 당시 대장경 출판을 발원한 호국의 정신, 그리고 독립운동을 음양으로 후원한 구하스님의 정신을 이어 지금도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다”고 밝혔다.

출가 직후 구하스님을 직접 시봉한 통도사 주지 현문스님은 “구하 스님은 ‘큰산’이었다”면서 “그런 어른이 계셨기에 통도사가 어려운 난관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던 것”이라고 회고했다. 이어 현문스님은 “월하스님이 열반하신 후 구하스님이 안창호 선생에게 독립자금을 지원한 내용을 담은 ‘영수증’을 ‘극비문서’라고 봉인하여 보관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면서 “다른 귀한 문서와 자료들이 많았을 텐데 대부분 사라져 아쉬움이 크다”고 안타까워했다.

한편 통도사의 호국과 독립운동 정신은 한국전쟁 당시 경내에 부상병을 치료하는 31육군병원이 설치되고, 코로나 19 이후에도 방역수칙을 준수하면서 국가와 국민의 평안을 기원하는 정신으로 이어지고 있다.

통도사=이성수 기자 soolee@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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