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자다운 불자가 많지 않네”

 

불자는 많지만 불자다운 불자가 많지 않다는 말이 무섭다. 부처를 배우고 행한다는 것은 불제자에게 주어진 절대적 자유와 완전한 영적인 삶은 무엇인가를 일러준 그분의 가르침대로 행하여 대자유인의 본래면목인 자신의 길을 주인공으로 걷는 일대사(一大事)이다. 배운다는 데는 도리가 다른 것 없다. 알지 못하면 길 가는 사람을 붙잡고라도 물어보는 것이 좋다는 지극한 말씀처럼 배우는 것은 알기위한 것이고, 익히는 것은 행하기 위함이지만, 배우기만하고 행치 않으면 기뻐할 바가 없다.


<잡아함경>에 이르시길 “내 나이 29세 때 출가하여 도를 구했다. 내가 성불한지 이미 50년이 되었는데 계·정·혜의 삼학을 실천했기 때문이다. 지금 설법의 요점도 이것이다. 삼학을 실천하지 않으면 불교 수행자라고 할 수 없다” 하셨다. 정(定)이란 경거와 동요가 없는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하여 마음을 한곳에 머물게 함이며 몸과 마음과 호흡을 잘 다스려야 한다.


모든 공부에는 순서가 있고 지켜야 할 원칙이 있다. 글씨 공부도 참고본을 그대로 보고 그려내는 단계를 지나고 서법의 골기를 얻고 나면 자신의 수행과 증득된 미적의식으로 자신의 예술로 창작하는 행위는 인문학적 의식의 성숙 문제이지 절대 기능이 아니다. 추사 어르신은 ‘문자향서권기’라 정의했으며 문자향은 ‘고요’이며 서권기는 ‘그윽한 여운의 향기’이다. 서예도 초대작가는 많지만 실력으로 초대받는 작가는 많지 않는 실상이다. 내 자신도 늘 부끄럽고 몇 줄의 약력에 숨어 살지 않기 위해 수행정진 할뿐이다.


큰 스승 만나기 쉽지 않고 큰 스승 나오지 않는 사회적 여건 속에 무엇부터 어떻게 다스려가야 할지 불교수행이나 예술수행 또한 깊은 난제 속에 빠져있다. 대서원을 세워 노력하고 마음을 바르게 유지하며 지혜에 의해 관찰하는 일이 불제자의 몫이다.


진리에 의거한 중도적 삶과 무와 유의 양극단을 넘어선 공의 세계에 이르는 길이 불제자의 궁극이며, 환희심이며, 대자유인의 본래면목을 구족하는 일이다. 가시밭길을 지나야만 꽃도 보고 술 익는 마을에도 이를 수 있다.


같이 손잡고 길나서면 세상의 따스함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이 자리가 시작이고 끝자리이며 가장 좋은 시간이다.
 

[불교신문3655호/2021년3월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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