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은 ‘무아’라는 인문학적 사유로 탄생”

“두 왕이여, 부디 잘 계시오
슬퍼하거나 그리워하지 마오
열반은 청정해지는 것이니
모든 존재가 없기 때문이오”

아난이 남긴 마지막 유훈은
붓다의 핵심 가르침인 ‘무아’
여기에서 나(我)는 본질이나
자기 동일성, 혹은 정체성 …

휴대전화를 통화하는 데 쓰는
본질만을 고집했더라면 과연
첨단 스마트폰이 생겨났을까

아난의 열반송을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철학적 메시지는 붓다의 핵심 가르침인 ‘무아에 대한 자각’이다. 사진은 중국 낙양 용문석굴의 아난존자상.
아난의 열반송을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철학적 메시지는 붓다의 핵심 가르침인 ‘무아에 대한 자각’이다. 사진은 중국 낙양 용문석굴의 아난존자상.

마음으로 존경하는 스님이 있다. 그분은 가끔 자신의 인물이 잘나지 않아서 지금까지 중노릇 하고 있는 것이지 만약 미남이었다면 수행 생활이 쉽지 않았을 것이라 말하곤 한다. 물론 우스갯소리로 하는 얘기지만, 실제로도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 주제인 아난존자의 경우 잘 생긴 외모로 숫한 고초를 겪었으니까 말이다. 당시 천민 출신의 마등가라는 여인이 존자에게 첫눈에 반해 상사병에 걸리자 그 어머니가 주술(呪術)을 사용하여 아난을 집으로 끌어들인 사건이 있었다. 붓다가 이를 알고 무사히 구출하긴 했지만, 아난의 잘생긴 외모는 교단에 이런저런 소란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여인들의 질투가 불러온 사건도 있다. 승가에 공양물로 들어온 찹쌀떡을 가난한 이들에게 1개씩 나눠주는 과정에서 아난이 무심코 어느 예쁜 소녀에게 2개를 건넨 적이 있었다. 사소한 실수인데도 뭇 여인들의 항의가 빗발치자 붓다가 직접 나서서 해명해야 했다. 이처럼 수행자의 잘생긴 외모는 복이 아니라 때로는 장애로 작용하기도 한다. 물론 아난존자는 이를 잘 극복하고 아라한의 경지에 이르렀으며 붓다의 10대 제자에도 이름을 올렸다.

 

진리의 길에 남녀는 없다


잘 알려진 것처럼 불교의 모든 경전은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如是我聞)’라는 문구로 시작한다. 붓다가 언제 어느 곳에서 누구에게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직접 보고 들었다는 내용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내가’ 바로 아난이다. 평생을 붓다 곁에서 시봉했기 때문에 제자 가운데 가장 많은 말씀을 들은 인물이기도 하다. 그래서 다문제일(多聞第一)이라는 타이틀이 항상 따라다닌다. 붓다 입멸 후 열린 경전 편집회의에서 그가 중요한 역할을 맡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아난은 붓다가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성취한 날 밤에 태어났다. 그러니까 사촌형인 붓다와는 34살 차이가 나는 셈이다. 그는 붓다가 성도한 매우 기쁜 날 태어났다고 해서 아난다(Ananda)라는 이름이 주어졌다. 아난다란 ‘환희’, ‘기쁨’이란 뜻으로 붓다의 아버지인 정반왕이 직접 지어준 이름이다. 그는 어린 나이인 여섯 살에 출가하였으며 스무 살 무렵부터 붓다가 입멸할 때까지 곁에서 정성껏 시봉했다. 아난은 붓다와 갈등 관계에 있었던 데바닷타의 친동생이기도 하다. 그는 친형이 아니라 사촌형인 붓다의 길을 따랐다. 그러니 인간적 고뇌도 매우 컸을 것이라 짐작된다.


아난은 여성 출가의 길을 열었다는 점에서 불교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당시 인도사회는 카스트로 알려진 신분 간의 차별뿐만 아니라 남녀 간의 차별 또한 엄격했다. 그런 상황에서 천대 받는 여인이 출가사문이 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혁명에 가까운 일을 이루어낸 사람이 바로 아난이었다. 당시 붓다의 이모인 마하파자파티를 비롯한 500명의 석가족 여인이 출가를 간청했지만, 붓다는 이를 거절했다. 여성의 몸으로 나무나 바위 아래서 잠을 자는 사문(沙門)의 생활을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아난이 붓다께 직설적으로 물었다.


“부처님, 여성들도 수행하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까?”


붓다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물론 그렇다”라고 대답했다. 아난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즉각 한 마디를 던진다.


“그렇다면 여성의 출가를 허락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진리의 길을 가는 데 남녀가 따로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 붓다는 마음을 바꾸고 여성의 출가를 허락한다. 다만 출가한 여성들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비구가 없는 곳에서는 안거를 나지 말아야 한다는 등의 안전장치를 마련했다. 남녀평등의 가치가 불교라는 새로운 종교 안에서 실현되는 역사적 순간이다. 그 주역이 바로 아난이었던 것이다.


아난은 붓다 입멸 후 마하가섭의 뒤를 이어 교단을 이끌게 된다. 기록에는 무려 120세까지 살다가 열반한 것으로 되어있다. 그는 갠지스강 중류에서 아사세(阿闍世) 왕과 비사리(毘舍離) 왕에게 이 말을 남긴 채 조용히 고요 속으로 들어갔다.


“두 왕이여, 부디 잘 계시오. 너무 슬퍼하거나 그리워하지 마오. 열반은 내가 청정해지는 것이니, 모든 존재(有)가 없기 때문이오(二王善嚴住 勿爲苦悲戀 涅槃當我淨 而無諸有故).”

 

가섭존자와 아난존자(오른쪽)가 부처님을 협시하고 있는 화순 쌍봉사 대웅전 삼존불.
가섭존자와 아난존자(오른쪽)가 부처님을 협시하고 있는 화순 쌍봉사 대웅전 삼존불.

 

무아를 자각하는 삶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나오는 아난의 마지막 모습을 그려보았다. 그런데 그는 왜 갠지스강 중류에서 열반에 들었을까? 그것은 어느 한 지역에서 입멸하게 되면 여러 나라가 서로 다툴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떠나는 마지막까지 갠지스강을 둘러싸고 있는 나라들이 혹여 자신으로 인해 싸움이 벌어지지 않을까 염려했던 것이다. 아마도 붓다가 입멸했을 때 여덟 나라에서 사리를 자신의 나라로 가져가려고 다퉜던 기억을 떠올렸던 것 같다. 참으로 마음이 따뜻하고 배려심이 깊은 인물이다.


당시 마가다국의 아사세 왕은 붓다와 가섭존자의 입멸을 보지 못했다. 왕은 아난존자의 마지막 모습만은 지키고 싶어서 이승을 떠날 때 미리 알려달라고 부탁을 했었다. 아난은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왕궁으로 갔지만, 마침 왕은 자리를 비우고 없었다. 뒤늦게 이를 알게 된 왕은 갠지스강으로 달려가서 존자의 마지막을 보게 되었다. 그 자리에는 비사리의 왕도 함께 했기 때문에 두 임금에게 유훈을 남긴 것이다. 그렇다면 아난의 열반송을 통해 우리는 어떤 철학적 메시지를 배울 수 있을까?


아난은 두 임금에게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달래면서 열반이란 내가 고요하고 청정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자신을 비롯한 모든 존재가 무아(無我)이기 때문이다. 결국 아난은 붓다의 핵심 가르침인 무아를 자각하라는 유훈을 마지막으로 남긴 것이다. 무아를 흔히 내가 없다고 해석하는데, 여기에서 나(我)란 요즘말로 본질이나 자기 동일성, 혹은 정체성 등으로 표현할 수 있다. 예컨대 의자의 본질은 ‘앉는 것’이며, ‘책을 보는 데 쓰는 것’이 책상의 자아다. 지극히 상식적인 일을 붓다는 부인했다. 한마디로 ‘책을 보는’ 책상의 본질을 부정한 것이다. 왜 그랬을까?


평소 무아를 쉽게 설명하기 위해 스마트폰을 예로 들곤 한다. 스마트폰은 아무리 많은 기능을 가지고 있어도 그 본질은 ‘전화를 하는 데 쓰는’ 것이다. 한마디로 기능이 다양한 휴대용 전화기다. 그런데 전화를 하는 데 쓰는 본질을 고집했더라면 과연 스마트폰이 탄생할 수 있었을까? 전화기라는 자아를 해체했기 때문에 본질이 전혀 다른 텔레비전이나 내비게이션, 신용카드 등을 그 안에 담을 수 있었던 것이다. 무아적 사유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혁신의 아이콘 스티브 잡스는 “우리가 아이패드를 만든 것은 애플이 항상 기술과 인문학의 갈림길에서 고민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스마트폰은 단순히 기술의 진화에서 나온 성과가 아니라 무아라는 인문학적 사유로 탄생한 결과다. 전화기의 본질을 고집하지 않아서 스마트폰이 버스를 탈 때 교통카드로 변신하는 것처럼, 학창시절을 돌이켜보면 수업시간에 공부하던 책상은 점심시간이 되면 밥상으로 화려한 변신을 했다. 무아의 가르침이 현실에서 힘을 발휘하는 순간이다.


이러한 무아의 철학은 사람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장인은 ‘아내의 아버지’라는 본질을 가지며, 며느리는 ‘아들의 아내’라는 자기 정체성을 지닌다. 그런데 이러한 자아에만 집착한다면 장인과 사위,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의 소통이 어렵게 된다. 흔히 얘기하는 고부갈등은 시어머니라는 상(相), 즉 자아에 집착해서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불교의 무아는 바로 이러한 집착을 깨트리는 강력한 무기다. 그래서 고부 사이가 때로는 모녀의 관계로 이어지고, 장인과 사위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깊어질 수 있는 것이다. 전화기이면서 라디오가 되는 것처럼 며느리이면서 딸인 관계로 새롭게 전환되는 것이다.


아난은 두 왕에게 최고 권력자이자 통치자라는 자아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때로는 이를 해체하고 백성들에게 다가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럴 때 비로소 국민과의 진정한 소통이 이루어지고 국가의 안녕이 보장될 것이기 때문이다. 꿈보다 해몽이라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내겐 그렇게 읽힌다. 모든 존재가 무아임을 자각할 때 열반에 이르는 것처럼, 임금이 자신을 버릴 때 나라가 청정해지고 고요해질 테니 말이다. 흔히 얘기되는 것처럼 꽃을 버려야 열매가 맺히는 이치와 같다 할 것이다.


오늘날 정치, 경제를 막론하고 모든 분야에서 소통이 어려운 것은 서로 자아에 대한 집착이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무아의 가르침이 관념으로만 머물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생생하게 작동해야 한다. 아난의 열반송을 오늘에도 여전히 음미하는 이유다.
 

[불교신문3654호/2021년2월2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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