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원에 서 있는 절집, 백설의 고요가 춥다

땅 끄트머리로 내달리는데도
산세는 수그러들지 않는다
땅끝 바다내음 두륜산에 걸려
설원의 겨울을 품고
아홉 개의 숲 지난 절집에
초의선사 차향이 그윽하구나

남도의 향기는 바닷내음에서부터 스며든다. 땅끝 어느 바닷가로 백두대간이 흘러내린 해남 땅 바다는 봄의 향기를 흠뻑 머금고 있다. 그래도 바다내음은 두륜산에 걸려 설원의 겨울을 품고 있다. 설원에 서 있는 절집 두륜산 대흥사는 아직도 백설의 고요가 춥다.

땅 끄트머리로 내달리는데도 산세는 수그러들지 않는다. 강진을 지나 해남 땅에 이르자 멀리 두륜산이 떡 하니 버티고 있다. 그 산속에 대흥사가 있다. 신주소가 아닌 과거 행정구역으로는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다. 아홉 개의 숲이 있어서일까. 절집으로 들어가는 길 섶에는 나무가 도열하듯 서 있다. 겨울이니 그렇지 잎이 나고 숲을 이루면 터널을 이루리라.

대흥사 일주문에 이르면 두륜산 대둔사라는 편액이 눈에 들어온다. 대흥사는 한때 대둔사라는 원래 사찰이름을 찾으려 했으나 복잡한 절차가 많아 대흥사라고 했다. ‘새벽숲길’이라는 별칭이 붙어 있는 대흥사의 숲 터널은 템플스테이를 와 본 방문객들이라면 뇌리에 충분히 각인되어 있으리라.

풀 같은 어린 나무가 자라 숲을 이룬다. 그 숲에 절집이 들어서고, 절집 스님들은 숲을 가꾼다. 도량이 들어서고 부처님이 좌정(坐定)하고 기도발길이 이어지고, 길이 만들어진다. 숲은 부처님을 시봉하는 스님들에 의해 가꾸어지고, 스님의 제자, 그 제자의 제자에게로 바통이 넘어간다. 그 역사가 100년이 지나고, 200년, 300년, 500년, 1000년의 역사로 이어진다.
 

절집은 늙어가고, 찬연해지고, 숱한 이야기는 역사가 되었다. 켜켜이 싸인 절집은 역사 그 자체가 되었다. 고목이 도열해 있는 나무 숲 터널 그 하나만으로도 대흥사는 가볼 만한 사찰에 속한다. 여기에 하룻밤을 머물며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진다면 더할 나위없는 행운이겠다.

꽉 찬 나무들 사이로 희끗희끗 보이는 하늘. 그 하늘을 따라 올라 하늘에서 두륜산 봉우리를 본다. 백설이 대지를 감싼 산은 더 이상 산이 아니라 한 폭의 산수화다. 두륜산 대흥사 현판이 새겨진 일주문을 지나 경내로 접어들면 이르게 되는 부도원. 절집을 지켰던 스님들의 무덤이다. 대흥사 부도원은 국내 최대의 부도가 봉안돼 있다고 알려질 정도.

사적비를 비롯해 초의선사 부도탑, 국가보물로 지정돼 있는 서산대사 부도도 이곳에 모셔져 있다. 현재의 대흥사를 있게 해 준 선조들이 잠들어 계신 곳이다. 그 어른들에게 경건하게 지극정성으로 정례삼배를 올린다.

그 어떤 선조보다 대흥사와 인연을 맺고 있는 인사가 초의 의순스님이다. 그의 부도 앞에 선사다. ‘草衣塔(초의탑)’ 이라는 글자가 선명하다. 차의 성인으로 추앙받으며 조선중기 불교의 가르침을 한층 선양시킨 어른이다. 한 시대를 살다 간 인사가 어떤 흔적을 남길까 생각되지만 초의선사의 발자취는 후대에도 그 길이 오롯하게 남아있다.

그 뿐이 아니다. 청허당 휴정스님(서산대사)도 부도와 함께 남아 있다. 외세의 침입에 대항해 민초들의 안위를 구한 호국불교(護國佛敎)의 이름으로 분연하게 일어난 수행자. 불교계율의 개차법(開遮法-조건과 상황에 따라 적용하고 적용하지 않는 열고 닫는 법칙)에 따라 “악을 행하는 자는 정법의 칼로 물리치라”는 <열반경(涅槃經)>의 가르침과 연결돼 있다.

차(茶)를 통해 선(禪)의 경지를 각성시켜 준 초의스님과 다시 조우한다. 스님의 형상 앞에 새겨진 행적이 산하의 눈발에 휘날리며 영롱하게 빛난다.

초의스님은 대둔사와 그 부속암자인 일지암에 머물면서 한국 차의 고전으로 일컬어지는 <동다송>을 편찬해 우리 차 문화의 역사와 우수성을 복원해 냈다. 또한 단순한 역사의 복원 뿐만 아니라 차를 손수 만들어 당대 사상가들에게 한국 차의 다선일미(茶禪一味)의 정신과 맛은 오늘까지 이어오고 있다.

걸출한 예술인으로서 초의스님은 글(詩), 글씨(書), 그림(畵)에도 탁월한 경지를 보여주었다. 한 사람이 쌓아올린 아름다운 정신의 향기는 천리와 만리를 가고 시공을 초월한다. 저 허공에서 바라보는 대흥사의 설경처럼 내가 서 있는 대둔사와 멀리 바라다보는 일지암은 초의선사의 차 향기가 가득하다. 가만히 눈을 감고 그 향기를 듣는다. 문향(聞香)!
 

➲ 대흥사(大興寺)는…

우리 국토의 최남단에 위치한 해남 두륜산(頭崙山)의 빼어난 절경을 배경으로 자리한 사찰. 대한불교 조계종 제22교구의 본사다. 해남, 목포, 영암, 무안, 신안, 진도, 완도, 강진, 광주 등 9개 시군의 말사를 관할하며, 서·남해 지역 사찰을 주도하고 있다. 두륜산을 대둔산(大芚山)이라 부르기도 했기 때문에 원래 사찰명은 대둔사(大芚寺)였으나, 근대 초기에 대흥사로 명칭을 바꾸었다.

일찍이 서산대사가 “전쟁을 비롯한 삼재가 미치지 못할 곳(三災不入之處)으로 만년동안 훼손되지 않는 땅(萬年不毁之地)”이라 하여 그의 의발(衣鉢)을 보관한 도량이다. 넓은 산간분지에 위치한 대흥사는 향로봉, 고계봉, 노승봉, 가련봉, 도솔봉, 혈망봉, 연화봉의 8개 봉우리로 둘러 싸여 있으며, 크게 남원과 북원 그리고 별원의(표충사, 대광명전, 박물관) 3구역으로 나뉘어져 건물들이 자리하고 있다. 북원에는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명부전, 응진전, 산신각, 침계루, 백설당, 대향각, 청운당, 선열당 등이 위치하고 있으며, 남원에는 천불전을 중심으로 용화당, 봉향각, 가허루, 세심당, 적묵당, 정진당, 만월당, 심검강 등이 자리하고 있다.
- 대흥사 홈페이지 인용


◼ 손묵광 사진작가는…
1956년 경남 밀양에서 출생하여 대학과 대학원에서 보도사진을 전공했다. DAF 국제아트페어 우수작가상을 비롯해 국내외 공모전에서 100여 회 이상 수상했으며, 32회의 개인전과 200여 회의 단체기획전에 초대받았다. 일간지 사진기자를 거쳐 현재 창원대학교 등에서 후학을 양성하며 온빛다큐멘터리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전국에 산재한 아름다운 사찰을 촬영하기 위해 2년간 지구 한 바퀴가 넘는 거리를 누볐다.

사진=손묵광 사진작가
글=여태동 기자

[불교신문3654호/2021년2월2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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