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후원의 문화사] <4>토굴 일대사 해결의 치열한 구도정신 깃든 독처한거
[사찰후원의 문화사] <4>토굴 일대사 해결의 치열한 구도정신 깃든 독처한거
  • 구미래 불교민속연구소 소장
  • 승인 2021.02.19 10:25
  • 호수 365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육근의 문을 닫고 정진하는 한국불교대학大관음사 감포도량의 무문관. 수행자들이 철저하게 수행하는 토굴수행처의 한 형태다.
육근의 문을 닫고 정진하는 한국불교대학大관음사 감포도량의 무문관. 수행자들이 철저하게 수행하는 토굴수행처의 한 형태다.

 

수행자의 개인 수행처
“생사가 대사이다. 덧없는 시간 신속하게 지나가니 촌음도 아껴 방일하지 말라.” 40여 년간 전국의 선원과 토굴에서 수행 정진한 청화(靑華)스님이 토굴생활을 마치고 태안사에 주석하면서, 대중에게 간곡히 청하는 글을 일주문 앞에 손수 써놓았다. 하루 한 끼 공양에 눕지 않고 장좌불와(長坐不臥)로 평생을 정진한 스님의 삶이 응축된 글로, 수행자의 토굴생활이 일대사를 해결하려는 치열한 구도정신으로 점철되어 있음을 새겨보게 한다.


토굴(土窟)은 스님들의 개인 수행처로, 많은 수행자들이 홀로 정진한 끝에 깨달음을 얻은 상징적 공간이기도 하다. 9년간 면벽한 중국의 달마대사에서부터 한국의 수많은 큰스님들이 대중을 떠나 토굴에서 용맹정진 했듯이, 토굴생활은 깨달음에 이를 때까지 수행에만 전념하겠다는 자기의지의 실현이며 고행의 선택이다. 따라서 수차례 선방안거를 마친 상근기(上根機)의 수행자가 주로 택하는 수행이지만, 구도열정이 넘치는 초발심자들의 도전이기도 하였다.


토굴살이에도 여러 모습이 있으나, 살아가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문제를 홀로 해결하는 모습이 전형을 이룬다. 많은 스님들이 인적 끊어진 산속에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움막을 지어 목숨만 부지할 정도로 먹으며 수행하였고, 외딴 민가나 인법당 형식의 암자에 머물며 수행하기도 했다. 이러한 여러 모습의 수행처를 모두 ‘토굴’이라 부르지만, 사회의 번잡함을 피해 혼자 기거하는 요사와는 구별된다는 데서 그 의미가 뚜렷해진다.


노스님들의 이야기를 듣노라면 토굴생활을 해보지 않은 스님이 드물었다.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절, 토굴살이를 하려면 탁발로 양식을 구해야 했고 한철 먹을거리를 마련하기 위해 일주일 꼬박 탁발을 다녔다. 된장ㆍ고추장은 고급 부식(副食)이라 엄두를 낼 수 없었고, 소금이나 간장을 구해 푸성귀와 섞어 먹는 것이 최선이었다.


특히 생식(生食)은 고행의 마지막 단계라 할 만하다. 밥 짓는 시간을 절약하고 배부르게 먹지 않기 위해 생식을 택하는 데서, 최소한의 육체적 조건으로 정진하려는 수행자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가능하면 불기운을 빌리지 않고 물에 곡식을 불려 먹거나 가루 내어 타먹는 것이니, 생식은 최일선의 수행식이라 하겠다.

어느 토굴의 부엌 모습. 불교신문 자료사진
어느 토굴의 부엌 모습. 불교신문 자료사진

 

생식과 된장 맛
조계종 전계대화상 무관스님은 1960년대 초반, 김제 금산사로 갓 출가한 행자 신분이었으나 불교정화로 어수선하던 시절이라 백 일간 토굴수행을 할 수 있었다. 당시 금산사가 자리한 모악산의 중턱은 범이 출몰하는 곳이었지만, 수행자들이 양식을 짊어지고 들어가 한철씩 수행하는 토굴이 많았다. 스님 또한 탁발로 대두 한말 반의 쌀이 모이자, 토굴에 올라 한 끼에 한 홉씩 물에 불린 쌀을 씹으며 수행을 시작했다. 쌀만 먹어서 생목이 올라오면, 솔잎과 쑥을 뜯어 잘게 다진 다음 단지에 담아놓고 한 숟갈씩 함께 떠먹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지내다보니 십 리 이상 떨어진 마을에서 된장 끓이는 냄새가 토굴까지 올라왔다. 생쌀만 먹으니 간이 먹고 싶어서 후각이 예민해진 탓이었다. 피부에도 탄력이 떨어져 손가락으로 살을 누르면 한참 만에 올라오곤 했지만, 몸은 아주 가볍고 잠도 더 잘 왔다. 출가했으니 오로지 공부로 무언가를 꿰뚫고 싶어, ‘문구멍으로 황소가 드는 걸 보려는 간절한 마음’으로 관법(灌法)에 몰두했다니 행자의 기개가 놀랍기만 하다.


이처럼 생식을 할 때 가장 힘든 관문은 ‘된장 맛을 극복하는 일’이다. 꿀밤가루 생식으로 토굴생활을 하던 스님이 산나물을 팔아 소금을 사려고 시장에 들어섰을 때, 어떤 산해진미보다 절실하게 발동한 식욕이 바로 된장국이었다. 그리하여 “창자가 뒤집히면서 구역질이 일어났다. 된장국 냄새가 물씬 풍겨 나오는 집으로 뛰어 들어가 한 그릇 얻어먹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는 것이다. 지허스님의 수행기 <사벽의 대화>에 나오는 내용이다.


발효식품 된장이 토종한국인에게 유전인자처럼 배어있는 아미노산 맛임을 실감하게 되는 대목이다. 이에 지허스님은 생 무를 씹으며 속을 다스렸고, 토굴에 돌아와서는 꿀밤으로 주린 창자를 달래자 시장에서 느꼈던 잔혹한 된장 맛이 씻은 듯 사라졌다. 된장 한 덩이를 구해서 먹는 일이 수행 아닐 리 만무하지만, 자신이 세운 규범을 지키고 스스로를 다스리기 위함일 것이다. 몸이 반응하는 그 모든 것을 찬찬히 관찰하면서 몸을 다스려나가는 일이 얼마나 귀한 수행이며, 된장 맛을 극복한 다음에 먹는 된장 맛은 또 얼마나 환희로울 것인가.

혼자만의 청규(淸規)
“들판의 봄은 보릿고개를 안고 오지만, 산골의 봄은 나물을 안고 온다.” 토굴 수행하는 어느 스님이 시처럼 읊은 한 줄의 자연찬미이다. 중생의 눈으로 보자면 홀로 산중에 머물며 모든 걸 감내하는 토굴수행은 고행의 나날이지만, 수행자들은 자연과 함께 걸림 없는 마음으로 그윽한 즐거움을 길어 올린다.


고사목을 채취해 아궁이의 불을 지피고, 탁발양식이 떨어져도 지난 가을 지천에 가득한 꿀밤과 산밤을 주어 가마니가 가득하다. 봄비가 한번 내릴 때마다 갖가지 산나물과 버섯이 쑥쑥 솟아나니, 산중의 토굴수행자는 눈이 녹으면서부터 다람쥐처럼 바빠진다. 허술한 듯 얽어지은 토굴이지만 그들이 꾸려가는 삶은 자연의 일부인 양 결코 허술하지 않다. 땔감과 식량을 구하는 일심삼매의 노동 또한 수행의 연장이요, 혼자만의 청규(淸規) 속에서 방일함 없는 정진이 이어지는 것이다.


누군가 청화스님에게 물었다. “꼭 이렇게 토굴수행을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까.” 이에 “삼매수행의 인연조건은 독처한거(獨處閑居)”라는 답이 돌아왔다. 반드시 깨달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면 대중을 벗어나 홀로 수행함이 바람직하다는 뜻이다. 아무도 없는 한가한 독처에서 더욱 엄하게 스스로를 다스릴 수 있는 동력은 깨달음을 향한 절박함에서 나온다. 노스님들이 토굴에서 생사를 초탈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던 시기를 ‘내 삶의 꽃’, ‘내 인생의 황금기’라고 소회하는 이유이다.


<사벽의 대화> 저자 지허스님은 이곳저곳의 토굴생활을 일기처럼 기록으로 남겼다. 어느 절에서 농사일을 두어 달 거들어주고 받은 토굴생활비로, 토굴 지을 연장과 냄비, 쌀·소금·간장을 구해 평창 백석산에 올라 움막을 짓고 겨울을 났다. 한파로 우물이 고갈되자 눈을 녹여 식수로 썼는데, 한 아름의 눈을 뭉쳐 솥에 넣어도 몇 종발의 물이 나올까 말까였다. 물이 귀하니 사흘 치 밥을 한목에 지어 바랑에 담아 걸어두고 끼니마다 꺼내 먹었다.


간장은 동짓달을 못 넘겼고 소금도 끝을 알려올 때쯤 마지막 밥을 지어먹었다. 한 말 정도 착실히 남은 쌀과 냄비와 연장을 방에 두고, 글 한 줄을 써둔 채 토굴을 떠났다. “이 모든 물건은 이곳을 처음 들여다본 사람의 몫이오.”

다음 수행자를 위한 토굴양식
지허스님의 행보처럼 토굴에는 늘 식량이 떨어지지 않았다. 토굴수행을 마치고 떠날 때는 다음에 올 수행자를 위해 장작과 식량을 남겨두기 때문이다. 토굴생활의 일과가 혼자만의 질서와 규범이라면, 이는 토굴수행자들 간에 말없이 지켜져 온 불문율의 전통이다.


오늘날과 달리 예전에는 깊은 산속에 작은 토굴이 많았다. 어쩌다 폭설로 산에 갇힌 이들이 토굴을 발견하여 들어가면 그곳엔 반드시 식량이 있어 얼마동안 머물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토굴에 머물다가 나서는 나그네 또한 무심히 토굴을 떠날 수 없듯이, 이전 수행자가 남긴 따뜻한 흔적은 다음 수행자에게 이어져 토굴에는 늘 식량이 떨어질 수 없었던 것이다.


갑사 대자암으로 출가한 어느 스님은, 행자시절 도반들과 함께 냄비에 보리밥과 고추장을 챙겨서 인적이 드문 토굴 근처까지 올라가곤 했다. 그곳 밭에는 늘 감자가 있었기 때문인데, 겨우내 토굴에 살던 스님이 봄이 되어 내려가면서 씨감자를 심어둔 것이었다. 행자들은 그 감자를 캐어 삶아서, 바위에 놓고 부처님과 산신님께 먼저 올린 다음 보리밥을 고추장에 비벼 삶은 감자와 함께 꿀맛으로 먹었다.


한두 철씩 인적 없이 비어있던 그 토굴은, 떠나는 이가 채마밭에 씨를 뿌려놓은 덕에 행자들의 놀이터도 되었고 노루와 멧돼지가 먹잇감을 찾아드는 곳이 되기도 했다. 주인 없는 토굴 헛간에 차곡차곡 쌓인 불쏘시개 나뭇가지와 채마밭의 푸성귀는, 누구든 찾아들어도 된다는 이정표처럼 정겨운 온기였다. 저절로 여문 산감자 특유의 아린 맛은, 떠나는 이가 뿌려놓은 선한 공덕의 씨앗과 함께 잊지 못할 추억으로 스님에게 남아있다.


다음에 올 그 누군가의 수행을 위해 토굴양식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듯이, 따뜻한 배려는 주변에 널리 확산되는 힘이 있다. 부처님의 별칭 가운데 ‘양족존(兩足尊)’이란, ‘지혜(智慧)와 복덕(福德)을 족하게 갖춘 분’이라는 뜻이다. 지혜와 복덕이 함께 해야 원만한 법을 성취할 수 있으니, 철두철미한 정진 속에 복덕의 온기를 남기며 토굴 수행한 스님들이야말로 깨달음의 자리에 성큼 다가설 법하다.

[불교신문3654호/2021년2월23일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