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가 코로나 시대에
지친 이들 위로와 감동 줘
스님법문, 목사 설교보다
임영웅 노래가 더 따뜻
각종 노래 경연이
가슴 설레게 하고 열광케 한다

공감 않으면 감동 없고
감동 없으면 감화 안돼
깨달음 추구 보다
이웃 향한 자비가 감동 감화

윤재웅 논설위원
윤재웅 논설위원

종교계가 앞날 걱정으로 심란하다. 날이 갈수록 수행자가 줄어들고 신도 숫자도 감소한다. 첨단 과학기술 시대에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설명이 아니면 사람들이 납득하지 않는다. 초월적 가치를 지녔던 종교의 신비로운 영역은 이제 과학의 언어로 대체되고 있으며, 삶의 개선에 실질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종교가 아니라 기술이다. 냉정하게 바라보라. 종교의 효용가치는 점점 떨어지는 중이다.


코로나 창궐의 엄중한 상황에서 일부 개신교의 탈선과 비협조가 기독교 전체를 욕 먹인다. ‘교회라면 지긋지긋하다’라는 반응이 어찌 개신교만의 문제일까. 종교가 변질하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타락하기 마련이다. 불교도 예외가 아니다. 입으로는 육바라밀과 팔정도를 말하면서 실제로 실천하지 않는다. 사자후 토하는 대덕스님은 드물고, 탐진치 삼독을 벗어나지 못해도 스스로 경책하지 않는다. 안주하는 데 익숙해지면 계율에 둔감해지고 점차 무기력해진다. 이래서는 희망이 없다. 시민들 곁으로 가까이 다가가야 하고 그들을 감동시켜야 한다.


종교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지 못하는 사이에 노래가 코로나 시대에 지친 이들을 위로하고 감동을 준다. 스님 법문이나 목사님 설교보다 임영웅 노래가 더 따뜻하다. ‘미스트롯’이, ‘싱어게인’이, ‘트롯전국체전’이 국민들을 가슴 설레게 하고 열광케 한다. 내 삶의 현실적 어려움을 다독이고 아픔을 함께 나눈다. 가슴 절절한 노래를 들으며 코로나 우울증을 이겨낸다는 이들이 많다. 공감하지 않으면 감동이 없고 감동이 없으면 감화되지 않는다. 의사소통의 중요한 법칙이다.


의사소통의 주요한 방편은 언어다. 말을 근사하게 잘해야 청중이 귀를 기울인다. 긴 말은 번거로우니 극도로 축약해서 간결하게 만들기도 한다. ‘부처님처럼’, ‘우리도 부처님 같이’가 대표적이다. 부처님을 본받자는 뜻일 테다. 간단하고 담백해서 좋은데 모호하고 추상적이다. ‘더 없이 높고 바른 깨달음’을 얻자는 것인지, 무소유의 삶을 살자는 것인지,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지 말자는 것인지 두루뭉술하다. 현대 일상인이 감당할 수 있는 ‘부처님처럼’으로 다시 만들어야 한다.


부처님의 본질은 무엇인가? 깨달음이다. 이 깨달음은 깨달음의 여러 단계 중에서도 최고의 깨달음이다. 부처님의 성도 과정을 묘사한 경전을 보면 한 단계 한 단계의 모습이 자세하다. 초선(初禪)부터 최상의 단계인 멸진정(滅盡定)에 이르기까지 자기 마음 들여다보기에서부터 우주의 시공간을 통째로 꿰뚫어버리는 초월적 현상이 잘 나타난다.


일반인도 열심히 참선하면 부처님처럼 되는가? 화두를 참구하다가 어느 날 크게 깨치면 그것으로 부처님처럼 되는가? 나는 ‘부처님처럼’의 참된 뜻이 깨달음에 있지 않다고 본다. 부처님은 현생의 고행과 노력만으로 깨달은 이가 되지 않았다. 전생부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보시를 해 오셨기 때문에 ‘더 없이 높고 바른 깨달음’이 현생에서 가능했다. 그러니 ‘부처님처럼’의 핵심은 깨달음 추구 이전에 보시가 먼저다. 베푸는 마음과 그 실천이 깨달음보다 중요한 것이다. 보라. 보시 없는 지계는 허망하며, 보시 없는 인욕은 허탈하며, 보시 없는 정진은 허허롭고, 보시 없는 선정은 헛짓이면서, 보시 없는 지혜는 헛되고 또 헛되다. 깨닫지 못하면 어떠랴. 지금 이 자리에서 착한 일 하나라도 더 하는 게 중요하다. 옆에 있는 이웃부터 돕는 실천행이 정답이다.

[불교신문3653호/2021년2월1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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