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 선과 민주화 성지…어머니처럼 포근하고 넓은 불국토

의상 원효 지눌 진각 지공 선사 등
수많은 고승 수행했던 자취 남아
원효루에 서면 무등산이 한 눈에

2월3일 무등산 입구부터 사람들로 북적였다.
평일인데도 모처럼 화창하고
온화한 햇살을 즐기고 싶었는지
등산객과 운동하는 사람들로 붐볐다.
평일 산에는 나이든 사람들만 찾을 것이라는
선입견과 달리 레깅스로 멋을 부린 젊은이
20대 아들을 데리고 나온 가족
친구 사이로 보이는 중년의 여성 등 다양한 연령대가
무등산의 겨울을 즐겼다.
광주의 자랑이며 시민 휴식처, 무등산다운 광경이었다.

무등산 제일의 경치를 자랑하고 온갖 기암괴석이 황홀경을 자아내며 의상 지눌 지공 등 6명의 고승이 수도했다는 규봉암 인근 지공너덜 모습.
무등산 제일의 경치를 자랑하고 온갖 기암괴석이 황홀경을 자아내며 의상 지눌 지공 등 6명의 고승이 수도했다는 규봉암 인근 지공너덜 모습.

암벽에 붙어 매달린 증심사 산신각

비로전에는 보물 제131호 철조비로자나불이 눈길을 끈다. 광주 시내 폐사지에서 옮겨온 불상으로 통일신라시대 불상이다. 장흥 보림사, 철원 도피안사 등에서 보는 철조비로자불이다. 이 불상이 원래 있던 곳이 구 전남도청 부근에 있었던 대황사(大皇寺)라고 전한다. 시민군이 최후까지 남아 지금은 광주민주화운동의 성역인 옛 전남도청 일대는 신라시대 절이 있던 곳이다.

눈이 한 곳에 머문다. 전각이라고 하기에는 아주 작은 법당이 기둥에 매달려 있다. 산신각이다. 팔각 기둥 두 개를 세워 뒤를 암벽에 붙여 사각의 돌지붕을 올렸는데 아마 이런 모습의 산신각은 이곳이 유일할 것이다. 증심사는 불자들의 안식처며 문화공간 정법교육도량으로 광주 불교의 자랑이며 중심도량으로 자리매김했다.

증심사에서 다시 나와 새인봉 방향으로 올라가다 암자를 만난다. 약사사(藥師寺)다. 약사사 역시 증심사를 창건한 철감선사 도윤이 창건했다. 처음 이름은 인왕사(人王寺)였다. 중건 역시 혜조국사가 고려시대 증심사와 함께 중건했다. 세 번째 지을 때 현재 이름 약사암으로 불렀다. 19세기 철종 때 관찰사 주석면의 협조로 성암 학산 두 스님이 다시 지었는데 6·25 한국전쟁 때 전소됐다. 보물 제600호 석조여래좌상과 창건 당시 세웠다는 삼층석탑이 있다.

약사사를 둘러보는데 중년 부부가 20대로 보이는 아들에게 절에 얽힌 내력을 들려주며 대웅전에 들어가 함께 참배한다. 광주는 불심이 약하다는 선입관이 편견이었음을 깨달았다. 약사사는 그 이름답게 광주 약사불자회의 중심도량이기도 했다.

증심사와 약사사를 창건한 철감국사 도윤은 신라말 선종을 도입하여 구산선문을 연 고승이다. 중국으로 건너가 마조도일 제자인 남전보원 선사의 법을 이었다. 귀국 후 금강산 장담사(長潭寺)에 머물 때 스님의 법문을 듣기 위해 전국에서 수많은 사람이 구름처럼 몰려든 당대 최고의 선사다. 경문왕의 귀의를 받고 화순 쌍봉사에 머물고 입적할 때까지 이곳에 머물렀으니 무등산 인근이 바로 선사의 영향력 아래 있었던 셈이다.
 

원효사 전경
원효사 전경

서석대가 한눈에…원효사

발걸음을 무등산으로 옮겼다. 원효사를 찾아가는 길이다. 길은 평탄했다. 토끼등으로 올라갔다가 바람재를 지나 원효암을 찾아가는 길은 계곡으로 난 너덜길도 만나지만 대체로 평탄한 임도다. 원효사 앞에는 큰 주차장이 들어서 있다. 많은 사람들이 찾는 관광지며 광주시민의 휴식처다. 일주문으로 들어가는 길과 그 뒤를 돌아가는 길 등 접근로가 다양하다.

절 이름에서 보듯 원효대사와 연관이 깊은 절이다. 조선시대 만든 기록에 따르면 신라 법흥왕과 지증왕 사이에 이미 있던 사찰에 원효대사가 수도한 인연으로 원효암으로 개명했다. 원효대사 인연설에 의문을 품다 1980년 5월 국립광주박물관에서 대웅전 복원 발굴조사 결과 신라 때 조성한 금동불과 기와조각 등 보물급 유물이 쏟아져 나와 신라 창건설은 정설로 자리잡았다.

현재 제21교구본사 송광사 말사다. 절 주변에 무명의 고려시대 묘탑을 비롯하여 조선 중기의 회운당부도(會雲堂浮屠) 등이 산재되어 있다. 절 입구에 여러 부도가 중창주 등을 기리는 비석과 함께 서 있다. 원효사 뒤 바위는 원효봉 그 아래 계곡을 원효계곡이라 한다. 원효사를 지나 바람재를 거치면 증심사 계곡에 닿고 위로 향하면 능선을 거쳐 정상으로 간다.

원효루 누각에 서면 무등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어떻게 보면 지척에 닿을 듯 가깝고 달리 보면 도저히 닿을 수 없을 정도로 멀리 있는 듯 무등산 정상 서석대가 서 있다. 서석(瑞石)은 무등산의 또 다른 이름이다. 원효루에서 서석대를 바라보는 이 한 장면 만으로도 원효사에 들를 이유가 충분하다.

원효사는 광주 전남 지역 생명나눔 운동이 일어난 발상지다. 주지를 지냈던 현지스님이 광주 전남 생명나눔운동실천본부를 결성하여 해마다 가을 원효사 앞 주차장에서 출발하여 바람재를 거쳐 증심사 계곡으로 내려가 문빈정사 앞에서 문화축제를 여는 걷기 운동을 펼치고 있다. 붉게 피어나는 무등산의 단풍과 생명나눔 실천이 어우러진 환희의 축제다.

원효사를 나와 어둠이 내려서는 무등산 길을 따라 내려가면 관음암이 나온다. 원효사 산내 암자다. 눈 여겨 보지 않으면 지나칠 정도로 꼭꼭 숨어 있다. 규모는 작지만 서석대와 무등산이 한 눈에 들어오는, 무등산 전부를 품은 ‘큰 암자’다.
 

문빈정사
문빈정사

지공선사 전설 어린 지공너덜

맑았던 무등산은 이튿날 돌변했다. 거센 바람이 불고 눈발이 날리기 시작하더니 산 정상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에 묻혔다. 같은 산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다른 산으로 변했다. 체감 온도가 영하 20도를 넘는 차가운 날에 강풍까지 겹친 최악의 환경에 놓였다. 눈보라를 뚫고 얼마나 갔을까?

규봉암(圭峰庵)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안내판이 나온다. 캄캄한 동굴 안에서 빛을 만난 기분이다. 날씨만큼이나 전날과는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절 앞에 한자로 쓴 수직 바위가 우뚝하다. 절 뒤에도 옆에도 병풍처럼 생긴 바위가 서있다. 신라 고려 시대부터 수많은 고승들이 수도했다는 은신대 삼존석 십이대 광석대 풍혈대 설법대 라는 이름이 붙은 기암괴석이다.

‘규봉암을 보지 않으면 무등산을 올랐다고 하지 말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규봉암은 무등산 자랑이며 중심이다. 6분의 고승이 수도하고 지금도 참선 도량으로 명성이 자자한 규봉암은 의상스님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의상대사가 금생에 이 곳에 와 바위 틈에서 흐르는 물이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음을 기이하게 여겨 절을 창건했다고 한다.

도선국사는 은신대에 앉아 조계산의 산세를 살펴 송광사 절터를 잡았다고 하며 보조국사 지눌 진각국사 혜심도 삼존석과 십이대에서 수도하여 득도했다는 유서 깊은 도량이다. 지눌이 지리산 상무주암에서 대오한 뒤 조계산 수선사로 들어가기 전 규봉암에 머물렀다. 지눌은 수선사 2대 사주를 제자 진각국사 혜심에게 물려주고 규봉암에서 쉬려고 했을 정도로 이 곳을 아끼고 좋아했다.

보조국사가 좋아했던 규봉암

제대로 절의 모습을 갖추어 창건하기는 798년(신라 원성왕 14)에 당에서 귀국한 순응 대사였다고 전한다. 폐허가 된 절을 1729년 (영조 15) 이 지방 경산마을 출신 연경스님이 3년 동안 불사를 해 중건했지만 한국전쟁으로 다시 폐허가 됐다. 전쟁이 끝나고 10여년 뒤부터 불사를 시작해 1990년대 본격적으로 중창해 오늘에 이른다.

고려 명종대 김극기는 규봉암에 올라 이렇게 노래했다.

“괴상한 모양 무엇이라 이름 하기 어려운데
올라와 보니 모든 것이 눈 아래 있네
돌 모양은 비단을 잘라 만든 것 같고
산 형세는 옥을 깎아 이룬 것 같네
좋은 곳에 오니 세상 티끌 끊었고
그윽히 사니 도정(道情)이 더하네
어쩌면 세상일 다 버리고
여기 꿇어 앉아 무생불법을 배울까나”

김극기는 ‘비단을 잘라 만든 것 같다’고 했는데, 그보다는 거대한 책 같다. 바위에 글까지 새겼으니 딱 석책(石冊)이다. 그래서 일까 이름이 문바위다. 김덕령 장군이 활쏘기 등 무술을 연마한 곳이라고 하는데 국립 5·18 민주묘지 광주민주항쟁추모기념탑이 이 바위에서 영감을 얻었다. 바위에 새긴 글은 이 곳에 올라왔던 이들이 남긴 자취다. 굳이 돌에다 자신을 남기려는 그 욕심이 천년을 넘게 서 있는 사찰과 바위에 비하면 얼마나 하잘 것 없는 지, 되려 손가락질 대상으로 전락했다.

절 앞에 종각이 있고 그 아래 둥근 문이 나 있다. 고개를 숙여야 한 명이 통과하는 좁은 문이다. 그렇게 고개 숙여 절하며 들어간다. 둥근 문을 지나 돌계단을 올라가자 순백세상이 펼쳐진다. 하얗게 눈이 쌓였는데 아무도 지나간 흔적이 없다. 순간, 길을 잃었다. 발자국을 남기는 것이 불경스럽게 여겨졌다. 다행이 지나온 길을 뒤 따라 내리는 눈이 덮었다.

절은 밖에서 보는 것과 달리 컸다. 경내도 넓었다. 맑은 날이면 발 아래가 한 눈에 들어올 최고의 전망터다. 많은 등산객이 지나다니는 듯 경내 곳곳에 주의를 당부하는 글귀가 붙어있다. 북한산 중흥사에서 우연히 규봉암 스님을 친견했었는데, 차마 문을 두드리지 못했다. 코로나19 때문이기도 하고 동안거 정진 중일 스님을 방해해서는 안될 것 같은 생각이 앞섰다.

규봉 주상절리대라 하는 광석대는 눈에 갇혀 보이지 않는다. 서석대, 입석대와 함께 무등산을 대표하는 3대 주상절리대로 지공너덜과 함께 문화재 명승 제114호다. 규봉암을 중심으로 늘어선 주상절리대로 높이는 약 30~40m이며 최대 넓이는 7m에 이른다.
 

규봉암
규봉암

민주화 성지 문빈정사 

증심사(證心寺) 권역부터 들렀다. 가장 먼저 맞는 사찰은 문빈정사다. 불교 민주화 운동 태동지이다. 광주 민주화 운동이 벌어진 1980년 12월 지선스님(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이 주지로 오면서 문빈정사는 불교민주화 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1959년 평양출신 장문빈 여사가 광주 시내 금남로에서 사업을 하면서 평생 모은 재산을 들여 창건했다. 창건주 이름을 따 문빈정사로 했다.

그 전부터 절이 있었다는 흔적이 절에서 나온 기단석 기와조각 도자기 파편들이 말해준다. 무등산의 평범했던 암자는 광주 민주화 운동이 좌절되고 관음사 주지를 역임한 지선스님이 은사 석산스님의 뒤를 이어 부임하면서 불교민주화 운동 본산으로 변신했다.

인법당과 요사채가 전부였던 문빈정사는 지금은 큰 사찰로 변모했다. 절 앞에는 ‘노무현등산로길’, 광주에서 재가법사로 활약했던 정의행 선생을 추모하는 비, 민족통일을 발원하는 장승 등이 이 곳이 민주화 운동 성지임을 말해준다.

문빈정사를 나와 무등산 새인봉 방향으로 걸어가면 증심사 계곡이다. 이 곳은 예로부터 ‘절골', ‘무당골' 등으로 불리며 수많은 불교 유산과 전설을 품은 불교성지다. 증심사는 남쪽으로 흐르는 계곡 방향을 따라 경사진 땅에 석축을 쌓아 평지를 만들고 건물을 배치했다. 계곡을 따라 올라가다 다시 방향을 틀어 산으로 올라가는 식이다. 무등산에서 내려오는 등산객이 무릎을 보호하기 위해 뒷걸음으로 내려가는 모습이 보인다. 그만큼 일주문에서 올라오는 길이 가파르다.

무등산 서쪽 기슭에 자리한 증심사는 조계종 제21교구 송광사 말사로 신라시대인 860년(헌앙왕4)에 철감국사가 창건하고 고려시대 1094년(선종11) 혜조국사가 중창했다. 이 때 광주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석조보살입상을 조성했다. 조선시대인 1443년(세종25)에 김방(金倣)이 중창했다. 500나한과 16 제자상을 조성하여 오백전에 봉안하고 국태민안을 기원했다.

정유재란으로 불탄 뒤 1609년(광해군1)에 석경(釋經), 수장(修裝), 도광(道光) 세 선사가 중창해 법등을 이어오다 1951년 전화(戰禍)로 오백전과 노전만 남겨 놓고 모두 불탔다. 대웅전 명부전 극락전 회승당 취백루 등 조선 중기 건축물이 안타깝게도 사라졌다.

마애불 모시는 석불암

규봉암을 나와 아래로 내려오다 장불재 방향으로 가면 낯선 풍경을 만난다. 산 정상에서부터 아래로 돌 무더기가 늘어서 있다. 너덜지대다. 무등산에는 증심사 뒤편과 이곳 규봉암 주변에 너덜지대가 형성돼 있다. 너덜이란 급경사의 암석에서 오랜 세월 동안 돌이 떨어져 나와 마치 강처럼 생긴 지대를 말한다. 순우리말이다. 등산객들은 너덜지대를 걷고 나면 온몸에 힘이 빠지고 지쳐 ‘너덜너덜해진다’고 표현한다.

규봉암 일대의 너덜지대를 지공너덜이라고 한다. 규봉 주상절리와 함께 문화재 명승 114호로 지정된 지공너덜은 간화선사 지공대사에게 설법을 듣던 나옹 선사가 이곳에서 수도하면서 지공너덜이라고 명명했다. 지공대사가 여기에 석실을 만들고 좌선수도하면서 그 법력으로 억만 개의 돌을 깔았다는 전설이 전해 온다. 해발 1000m가 넘는 곳에 들어선 규봉암과 지공너덜 주변 정상은 세계에서도 흔치않아 세계 지질공원으로 지정됐다.

지공너덜 끝에 또 하나의 작은 암자가 나온다. 석불암이다. 일제시대 담양의 국영현 일가가 발원하여 석공 이삼채가 조성했다고 하며 1935년 소림정사를 창건했다. 6·25 전쟁 때 불탄 절을 다시 지어 지금은 관묵스님이 돌탑 등을 쌓아 기도객들이 찾는 기도도량이다.

천년고찰이 즐비하고 봉우리 마다 불보살 가피가 서렸으며 선사들이 수도 정진하는 무등산은  부처님 땅이었다. 산을 오르면 저절로 깨치리라.

 

원효사에서 바라본 무등산 정상 서석대 일원
원효사에서 바라본 무등산 정상 서석대 일원

■ 무등산과 불교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최상 ‘무등’
증심사 원효사 약사사…곳곳 천년고찰

남북으로 길게 흘러 한반도의 등을 이루는 태백산맥에서 소백산맥이 뻗어 나와 경상도와 전라도를 나누고, 추풍령에서 다시 한 갈래가 뻗어 노령산맥을 이뤄 전라남북도를 경계 짓는다. 한반도 남쪽의 큰 고을이 이처럼 세 산맥을 따라 나뉜다. 큰 산맥은 다시 작은 맥을 이뤄 더 작은 마을을 형성하는데 이 땅 최고의 곡창지대 호남을 주로 지나는 호남 정맥도 그 중 하나다.

내장산 백암산 조계산 백운산 등 호남의 숱한 명산으로 연결되는 호남정맥의 중심 산줄기이자 광주와 전남의 진산이 무등산이다. 현대사에서 무등산은 특별한 의미로 쓰인다. 5·18 민주영령이 잠든 망월동국립묘지를 품은 무등산은 한국 민주화의 상징이니 산이 사회와 문화를 대표하는 것은 무등산이 유일한 지 모른다.

“한 몸이 되기도 전에/ 두 팔 벌려 어깨를 꼈다/ 흩어졌는가 하면/ 다시 모이고/ 모였다간 다시 흩어진다/ 높지도 얕지도 않게/  그러나 모두는 평등하게/ 이 하늘 아래 뿌리박고 서서/ 아 이것을 지키기 위해/ 그처럼 오랜 세월 견디었구나”라는 시인 김규동의 노래처럼 ‘무등산은 평등하게 하늘 아래 뿌리박고 선’ 호남의 어머니다.

무등(無等)이라는 이름이 참 오묘하다. 김규동 시인은 “평등하다”고 했고 누군가는 차별이 없다고도 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비할 데 없이 높은 산 또는 등급을 매길 수 없는 산이라는 뜻”이라고 했다. 한자 뜻 그대로 옮기면 ‘평등’이 맞다. 그러나 이 정도의 해석도 관공서 홈페이지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무등’이 무슨 뜻인지 말하지 않는다. 아마 불교에서 나온 이름이라 기독교 세가 강한 지역에서 대놓고 뜻을 드러내기를 꺼리는 것은 아닐까?

무등(無等)은 불교의 무등등(無等等), 무유등등(無有等等)에서 유래됐다. ‘비할 데 없이 높고, 등급을 매길 수 없다’는 뜻이니 가장 높아 견줄 이가 없는 분, 부처님을 지칭한다. 그래서 무등은 부처님을 뜻하는 또 다른 명칭이기도 하다. ‘무등등’은 경전 곳곳에 등장한다.

조석예불 때 읊는 <천수경> ‘준제게’ ‘천상급인간수복여불등(天上及人間受福如佛等)’, 우차여의주정획무등등(遇此如意珠定獲無等等) ‘하늘이나 사람이나 한량 없는 복 받으며, 이 여의주 얻는 이는최고의 법 얻으리라’는 구절에서 확인된다.

<반야심경> ‘고지반야바라밀다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故知般若波羅密多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반야바라밀다는 가장 신비한 주문이며, 가장 밝은 주문이며, 가장 높은 주문이며, 무엇에도 견줄 수 없는 주문이다”는 구절도 최고의 경지,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최상의 뜻으로 ‘무등등’이 쓰인다.

이처럼 ‘무등’은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최상의 경지’를 일컫는 불교 용어다. ‘부처님의 산’ 답게 산 곳곳에 암자와 사찰이 있으며, 불보살의 명칭이 바위와 암벽에 서려 있다. 고려 때까지만 해도 200여 사찰이 있었으며 지금도 증심사, 원효사, 관음암, 약사암, 규봉암 등의 사암과 비로봉, 반야봉, 장불재, 삼존석(관음, 여래, 미륵)과 의상봉, 윤필봉, 규봉의 법화, 설법, 능엄 등 대(臺)가 있으며, 지공화상과 연관된 너덜이 있다.

무등산을 진산으로 삼은 광주(光州)도 불교 용어다. 빛과 영원한 삶을 상징하는 아미타불에서 나왔다. 서방정토 극락세계를 주관하는 아미타불은 무량광(無量光), 무량수(無量壽)로 불린다. 빛은 탐진치 삼독심에서 벗어난, 본래 청정한 본원(本原)을 상징한다. 그 반대 무명은 어둠으로 표현한다. 그래서 ‘광주’는 ‘무등’과 더불어 궁극의 경지, 영원한 노스텔지어, 밝은 빛으로 장엄하는 안락(安樂)국이다.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안락국으로 가려면 강을 건너야 한다. 그래서 광주 앞에는 극락강이 흐른다. 극락강을 건너 광주에 들어서면 무등산이 감싸니 어머니처럼 포근하고 편안하며 밝다. 

[불교신문3652호/2021년2월1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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