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통해 삶의 의미 찾던 노력 무상
의미 있으면 숨겨놓을 이유 없을 터

혜인스님

‘행복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누군가 천일기도를 한 마디로 묻는다면 이 문장이 가장 적절할 것 같다. ‘가장 적절한’이라는 참으로 현실적인 수식어는 천일이 지나도록 스스로를 행복한 사람이라 단정 지을 수 없다는 참으로 현실적인 증거다.

‘싶었다’는 과거형은 더 이상 행복을 추구하거나 찾지 않겠다는 뜻이다. 우리가 진정 현재의 삶에 충실할 때는 삶의 이유나 의미를 찾는 일 같은 건 궁금하지도 중요하지도 않은 것처럼, 어딘가에서 찾아지는 행복이 있다면 금세 잊혀 질 뜬구름 같은 걸 테고, 그렇지 않은 행복이 있다 해도 지금을 사는 일만큼 중요하고 행복하랴.

그래서 ‘행복하고 싶었다’는 표현은 행복을 명목 삼아 세상과 싸우거나 희생을 감수하는, 뜬구름 같은 행복을 위해 고뇌하거나 누군가에게 설득하는 불행을 살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돌이켜보면 언제나 기도는 불행과 싸우거나 행복을 쟁취하는 수단이 아니었으며, 그저 지금 이 순간을 감싸고 보호하고 있는 친구와도 같았다.

‘사람’이 되고 싶었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머리를 깎던 날 드디어 내 자리로 돌아왔다는 안도감과 함께, 세속에서 만 날의 여정이 곧 스님이 되기 위한 길이이었었구나 하고 깨달았었다. 물론 그 확신에 찬 삭발의 순간까지 한 번도 스님이 되고 싶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지만. 반대로 기도의 천 날 여정을 돌이켜보면 스님보다 사람이 되기 위한 길이었음을 깨닫는다. 물론 다 이제 와서 억지로 든 생각이지만.

없다. 천일기도의 소회 같은 건 사실. 모든 표현들은 모두 ‘가장 적절한’ 글자들의 조합일 뿐 실은 사람이 되고 싶던 적도 행복하고 싶던 적도 없다. 현실에서나 ‘가장 적절한’ 답을 찾는 게 필요하지 지금 이 순간에 ‘가장 적절한’ 행복이나 답 같은 건 없으니까. 없으면 뭐가 있느냐는 둥 무엇도 구하고 원하지 않는 건 무기력이나 비관이 아니냐는 둥 개념 짓는 건 현실의 욕망들의 관심사지, 정말 원함이 없는 순간만큼 충만한 행복은 없다.

그동안 써온 연재 글과 지금 쓰고 있는 글도 역시 그냥 마치 그런 게 있는 것처럼 ‘가장 적절한’ 글을 써내려 했던 것뿐. 진짜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해도 언제나 글 이면에 숨어있었고, 일부러 숨긴 적도 그렇다고 일부러 드러낸 적도 없지만, 그건 원래 드러낼 수가 없어서 ‘가장 적절한’ 글로 칸을 채웠던 것뿐이다. 그래서 글 쓰고 책 내는 일이 작가로서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냐는 세간의 상식에 나는 공감할 수 없다. 상식의 선에서만 인정되는 세계를 벗어나는 일은 비상식이 아니라 분별의 선에서 자유로워지는 길이니까.

언제나 결국은 다 내 업이 썼던 글이었고, 혹시 가끔이나마 공감하셨다면 아마 그때 우리의 업 에너지가 서로 비슷해서였을 거다. 초현실적인 작품으로 근대문학을 대표했던 작가 이상의 역설적 방식으로도 진실은 ‘가장 적절한’ 방식으로 흉내 내질 뿐이다.

‘내가 왜 연재를 하고 있었지.’ 연재를 시작했던 이유가 어느새 잊혀졌는데 궁금하지가 않다. 이유 같은 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는 거다. 그래서 연재를 마치는 소회 같은 것도 사실 없다.

끝나고 나니 기도를 통해, 글을 통해 삶의 행복과 의미를 찾던 의식적인 노력들이 참 무상하다. 거기에 원래 의미나 행복이 있었다면 뭐 하러 숨겨놨겠는가. 뭐 하러 찾느라 애를 쓰겠는가. 그래서 더 이상은 이런 질문에도 ‘가장 적절한’ 답에도 별 흥미가 없다. 그럼 무슨 흥미가 있는지를 묻지 말길. 이후의 충만한 행복이 있다면 삶으로 드러날 테니.

[불교신문3651호/2021년2월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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