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건 시 500명 스님 주석…3000명 제자 모였던 ‘대가람’

지자체와 관계당국의 무관심
경지정리로 많은 부분 파괴돼

사역 주변에서 발견되는
부석사 원래 규모는 엄청났다
금동불상, 귀면와 석불 석탑 등
부재는 다수 출토되었지만
제대로 된 발굴조사는 없었다

“권종이부(權宗異部)가 모여 반천(半千, 500)명이나 되었다. <송고승전> 의상스님이 3천명의 제자를 데리고 소백산 추동에 가서 초가를 짓고 90일 동안 화엄을 강의했다.“
- <삼국유사>

김태형
김태형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이며 한국의 화엄종이 시작된 부석사. 창건 직전에는 500명이 넘는 승려들이 머물렀으며, 의상스님의 화엄법문을 듣기위해 3000명이나 되는 제자들이 모여들었던 곳이였다. 고려시대에는 1203년 무신정권에 반발하여 난을 일으킬 정도로 많은 대중들이 모여 있었던 대가람 부석사. 

조선시대 영남 아니 해동 제일의 누각 취원루(聚遠樓), 심검당, 만월당, 서별실, 만세루, 약사전, 수비원(守碑院), 영산전 등 기록에만 남아 있는 전각과 은신암, 극락암과 같이 터만 남은 암자들, 또 천장방(天長房), 대장당(大藏堂), 봉황지원(鳳凰之院)과 같이 기와 명문(銘文)으로만 전하는 건물들.

부석사를 말하면서 앞서 언급한 전각과 암자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아마도 대부분 사람들은 현재 남아 있는 부석사의 전각들 일주문, 천왕문, 조계문(최근 중창), 범종루, 범종각, 안양루, 무량수전, 조사당, 단하각, 응진전, 자인당, 삼성각 등을 그나마 떠올릴 것이다.
 

부석사 전성기로 추정되는 옛 사역이다. 현재의 사역은 아주 일부분으로 많은 사역이 관계당국의 무관심으로 방치 혹은 파괴되고 있다.
부석사 전성기로 추정되는 옛 사역이다. 현재의 사역은 아주 일부분으로 많은 사역이 관계당국의 무관심으로 방치 혹은 파괴되고 있다.

필자가 현재까지 확인한 바로는 부석사는 창건이후 고려 후기까지 상당히 넓은 사역을 형성하고 있었음을 밝혀냈다. 14세기 후반 왜구의 침탈로 사역 전체가 불에 타기 전까지 사역은 크게 현재의 무량수전을 중심으로 한 사역과 동쪽으로 보물 제220호 석불이 있었던 금당과 천장방 구역, 원융국사비와 동부도전을 중심으로 한 대장당 구역, 그리고 서쪽으로 봉황산 기슭 골짜기에 위치한 암자 구역이 있다.

이외에 영주시와 봉화군의 경계인 부석면 북지리 산 24번지와 봉화군 물야면 오전리 산 139번지 일원의 6~7세기 고분군과 경북 봉화군 물야면 오전리 1144-3번지의 경북유형문화재 제154호 오전리 석불좌상이 있는 절터가 있다. 이들 옛 사역은 동서로 약 1.5㎞에 걸쳐 있으며 현재는 대부분 과수원 등 농경지로 경작되고 있다. 이처럼 창건 이전부터 현재까지의 유물과 유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부석사 옛 사역은 무시되고 현재의 시역만이 부석사의 전부라고 여기는 세태가 안타까울 따름이다.
 

조사당 마당에서 발견된 금동여래 입상.
조사당 마당에서 발견된 금동여래 입상.

한편 부석사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서 가장 우려했던 부분이 바로 부석사들 둘러싸고 있는 옛 터전들의 소외와 무량수전을 중심으로 한 현재 사역만이 부석사의 전부라는 인식이 고착될 것을 매우 염려했다.

이는 현실로 나타나 2017년부터 부석사 사역 주변으로 대대적인 조경공사가 시작되었고 이들 지역에 대한 문화재 조사를 관계기관에 요청한바 있다. 하지만 결과는 보물 제1636호 석조여래좌상이 있었던 옛 약사전 터 일부만 긴급 구제발굴이 일주일가량 진행된 게 전부였다. 이 조사에서 보물 제1636호 석조여래좌상이 있었던 원래의 자리를 확인했지만 지금은 복토가 되어 버린 상태다.

이 때의 조경공사 당시 통일신라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토기와 기와, 그리고 주춧돌과 축대와 같은 건물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임을 주장하며 공사 전 발굴조사의 필요성을 문화재청 등에 제기한바 있다. 이러한 민원 제기는 완전히 묵살 당하고 해당 구역에 다량의 흙을 덮어 소나무 등 조경수를 심어 버렸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2014년 이후 보물 제220호 석조여래좌상 등이 있었던 부석면 북지리 방동 일대 과수원의 계속되는 농지정리와 과수원 확장으로 인해 그나마 땅속에 남아 있던 유적들이 제대로 된 조사도 없이 마구 파헤쳐져 창건기부터 고려, 조선에 이르는 부석사의 옛 흔적이 모두 지워지고 있다. 이러한 유적 파괴의 현장을 지켜보면서 마을 주민들과의 갈등을 겪으면서 영주시나 문화재청에 민원을 제기하면 딱 거기까지 만이었다. 유적 전체에 대한 심도 있는 조사나 대책마련은 없었다.

과거 1990년대 유적분포 지도를 기준으로 한 틀, 그 이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2015년 불교문화재연구소에서 폐사지 조사팀에서도 현장 조사를 실시한 바 있다. 그러나 결과는 보고서에 해당지역의 실태를 기록한 것 외에는 이후 시굴이나 발굴조사로는 이어지지 않았다.
 

부석사 조사당 서쪽에 있었던 은신암에서 출토된 석조신장입상. 이 암자는 1970년대까지 명맥을 유지하다 박정희 정권 당시 산중암자 철거령에 따라 훼철됐다.
부석사 조사당 서쪽에 있었던 은신암에서 출토된 석조신장입상. 이 암자는 1970년대까지 명맥을 유지하다 박정희 정권 당시 산중암자 철거령에 따라 훼철됐다.

일제강점기부터 최근까지 부석사 관련 조사들이 여러 번 있었지만 대대적인 전면 발굴조사는 없었다. 1916년부터 진행된 무량수전과 조사당 해체복원 당시 무량수전 앞마당을 일부 시굴했으며, 1960년대 신라오악조사단이 석룡(石龍) 확인을 위해 같은 장소를 파 보았을 뿐이다. 

또한 1958년 보물 제220호 석불좌상을 부석사로 이안하면서 불상이 있던 곳을 조사하여 정면3칸 측면 2칸의 건물이 있었음을 밝혀냈다. 이 과정에서 확인된 초석과 장대석 등 건물 기단부 석재는 무단 반출되어 부석사 경내 몇몇 건물들을 신축하면서 부재로 사용했다. 이와 함께 최근까지 현장에 남아 있던 초석 일부는 경지정리를 하면서 과수원 석축을 쌓는데 사용되어 지금은 그곳에 법당 터가 있었는지 조차 파악하기 힘들다. 특히 2014년 북지리 방동 과수원에 대한 긴급 구제발굴과정에서 석불의 팔부분에 해당하는 석재와 청자향로, 연화문 와당 등이 다수 출토되었지만 추가적인 보호대책이나 발굴 없이 유적을 복토해 버렸다.

필자가 부석사의 금당터로 지목하고 있는 이곳은 2013년 까지 나름대로 보존이 되고 있었다. 현재 무량수전을 떠받들고 있는 안양루 석축과 같은 구조로 7세기 산중 사찰의 가람배치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었다. 이들 사역에서 2013년부터 2017년 초까지 필자가 수습한 유물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2016년 10월 조사당 마당에서 통일신라시대 금동여래 입상 1점 ②부석사 천왕문 아래 계곡에서 발견된 ‘천왕(天王)’명 기와편 ③부석사 자인당 서쪽에 있었던 은신암터에서 석조여래좌상과 석조신장입상 ④원융국사비각 도로 절개지에서 수습한 통일신라시대의 토제 벼루편 ⑤부석면 북지리 165-3번지 일대에서 ‘대장당’과 ‘대봉지원’이라 새겨진 명문와편 ⑥부석면 북지리 방동일대에서 ‘천장방’명문 기와편과 통일신라시대 연화문와당과 귀면와 석불 불두 및 석탑재 등이 있다. 
 

부석사 동부도전 옆에서 확인된 보물 제1636호 석조여래좌상이 있었던 약사전터로 2017년 3월 시굴조사가 이루어졌으나 다시 복토됐다.
부석사 동부도전 옆에서 확인된 보물 제1636호 석조여래좌상이 있었던 약사전터로 2017년 3월 시굴조사가 이루어졌으나 다시 복토됐다.

또한 안양루 아래 축대 보수 공사과정에서는 14세기 무량수전과 16세기 안양루 화재로 생긴 폐기물로 보이는 연화문 전돌, 연화문 수막새, ‘강당(講堂)’명 명문와편, 치미편 등을 수습하기도 했다. 여기에 2013년 선묘각 증축 공사과정에서 고려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녹색과 적색 안료와 토기가 발견되기도 했다.

앞서 언급한 사역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가 이루어질 경우 경주 황룡사지 못지 않은 대규모 유구 확인은 물론 엄청난 양의 유물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특히 <삼국유사> 등에 기록만 남은 ‘부석본비(浮石本碑)’와 고려 숙종 때 건립된 ‘원교국사비(圓敎國師碑, 의상대사비)’ 등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최근 부석사 인근에 사는 한 스님으로부터 문자 한통을 받았다. “학예사님이 떠나신 이후 여기저기 밭정리 하느라 엔진톱 요란하고 포크레인 굉음 요란하니 옛 절터 깨진 기왓장마저 흔적 없이 사라지니 시끄러운 굉음보다도 더 심란하네요.”

이처럼 부석사 옛 사역에 대한 파괴는 지속되고 있지만 관계기관의 무관심과 안이한 행정으로 인해 처참하게 사라져가고 있다. 이제 옛 사역에 대한 전면적인 조사와 보전대책이 하루빨리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반쪽 아니 1/5쪽짜리 세계문화유산 부석사로 만족해야 한다. 

아울러 한국불교사의 위대한 서막을 열었던 역사의 현장을 파괴해버린 과오를 남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종단과 영주시, 문화재청 등 관계기관의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하다.

[불교신문3650호/2021년2월3일자]

김태형 ‘다시읽는 부석사’ 저자·송광사성보박물관 학예실장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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