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니 삶이니 그 안에 구속되지 말고
현재에 충실하며 자유롭게 사는 게 중요



하녀는 철학자 탈레스에게
한치 앞도 못 본다고 했지만
그에게 중요한 건 미래 보다
별을 보고 있는 지금 이 순간



“시간이라는 걸 분초로 나눠
자신을 가두는 건 지구상에
오직 인간밖에 없습니다

인간만이 ‘나이’ 약점을 공략
돈 쓰고 감정 소비하게 만들죠
그게 인간이 진화 대가로 얻은
은 신피질의 재앙이에요…”
- 드라마 ‘이번 생은 처음이라’에서

서양철학사와 관련된 책을 보면 항상 맨 앞에 등장하는 인물이 있는데, 그가 바로 탈레스(Thales, B.C625경~BC546경)다. ‘철학의 아버지’, ‘최초의 철학자’라는 닉네임으로 불리는 인물이다. 소크라테스를 제치고 그를 철학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단순히 그가 소크라테스보다 150여년 일찍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그를 철학의 아버지라고 부른 사람도 다름 아닌 소크라테스의 손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였다. 그 이유를 찾아 고대 그리스로 떠나보자.
 

‘철학의 아버지’, ‘최초의 철학자’로 불리는 탈레스. 그는 삶과 죽음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다고 생각했다.
‘철학의 아버지’, ‘최초의 철학자’로 불리는 탈레스. 그는 삶과 죽음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다고 생각했다.

➲ 한치 앞도 못 보는 최초 철학자?

탈레스는 소아시아 밀레투스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당시 그리스인들은 지금의 터키 서쪽 지역을 이오니아라고 불렀는데, 밀레투스는 그 남쪽에 위치한 항구 도시다. 이곳에서는 탈레스 이외에도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메네스, 헤라클레이토스 등의 철학자들이 활동하였다. 이들을 가리켜 흔히 ‘밀레투스학파’, 혹은 ‘이오니아학파’라고 부른다. 탈레스는 이 학파를 대표하는 철학자였다.

그리스 식민지였던 밀레투스가 주목받는 이유는 그곳이 바로 철학이 탄생한 지역이기 때문이다. 해양도시라는 특성상 사람들은 다양한 문화와 접촉을 할 수 있었고 경제적으로도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이는 곧 전통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사고를 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이러한 조건이 세계를 체계적으로 이해하려는 그리스 사람들의 성향과 만나 철학의 탄생을 이끈 것이다.

그들은 세계와 만물을 구성하고 있는 근원적인 물질이나 원리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를 ‘아르케(Arche)’라고 불렀다. 예컨대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을 물이라고 했으며, 아낙시메네스는 공기, 헤라클레이토스는 불이라고 보았다. 이처럼 물이나 불 등의 아르케를 통해 그들은 세계를 체계적으로 이해하려고 하였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는 물이 있어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고 물이 없으면 소멸하게 된다. 탈레스는 이러한 현상을 보고 만물의 근원을 물이라고 생각하였다. 오늘의 시선에서 보면 매우 소박하면서도 단순하다고 할 수 있지만, 이러한 생각이 중요한 것은 그가 자연현상을 초자연적인 원인으로 설명한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물질이나 원리로 파악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탈레스 이전의 사람들은 하늘에서 번개나 천둥이 일어나면 제우스신이 화가 난 것이며, 바다에 풍랑이 높게 일면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노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탈레스는 이러한 신화적인 세계관에서 벗어나 이성과 사유를 통해 자연현상을 이해하려고 하였다. 탈레스를 철학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유다. 실제로 그는 이집트의 나일강이 자주 범람하는 것은 북쪽에서 불어오는 계절풍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물론 옳은 설명은 아니지만, 당시로서는 매우 혁명적 사유라 할 수 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여러 나라를 여행하면서 수학과 기하학, 천문학 등을 공부하였다. 그는 그림자의 길이를 이용하여 피라미드의 높이를 측정하였으며, 일식을 예언하기도 하였다. 언젠가는 밤하늘의 별을 보면서 걷다가 우물에 빠진 일도 있었다. 이를 본 하녀가 “먼 하늘의 이치를 알려고 하면서 한치 앞도 못 보시네요”라고 말했다. 진리를 추구한다면서 눈앞의 현실도 모르는 철학자들을 비아냥할 때 자주 인용되는 일화다.

그는 운동경기를 관람하다가 갑자기 쓰러져 죽음을 맞이하였다고 알려졌다. 고령의 나이와 몸이 쇠약한 상태에서 심한 고열과 갈증을 일으켰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찌 보면 최초의 철학자라는 타이틀과 그리 어울리지 않는 죽음일지 모른다. <그리스 철학자 열전>에는 그의 마지막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탈레스가 운동 경기를 관람하던 날, 맹렬한 태양이 그를 물고 데려갔다……. 사실 그 노인은 이 지상에서 더 이상 별들을 볼 수 없었으니까.”
 

철학의 탄생지로 알려진 터키 항구 도시 밀레투스 유적.
철학의 탄생지로 알려진 터키 항구 도시 밀레투스 유적.

➲ 삶과 죽음, 차이가 없다

<그리스 철학자 열전>에는 탈레스의 마지막을 단순하게 전하고 있지만, 이를 통해 그가 삶과 죽음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는지 조금은 엿볼 수 있다. 탈레스는 삶과 죽음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물었다. 

“그럼 당신은 왜 아직 죽지 않았소?” 

“죽으나 사나 아무런 차이가 없기 때문이오.” 

그에게 있어 삶과 죽음은 별다른 차이가 없다. 사는 것이 곧 죽는 것이며 죽는 것이 곧 사는 것이라면 그의 죽음 역시 큰 사건은 아닌 셈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그저 운동 경기를 관람하는 중에 맹렬하게 불타는 태양이 데려갔을 뿐이다. 혹여 만물의 근원은 물인데, 태양이 탈레스의 생명을 유지시킨 물을 모두 빨아들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 물을 아르케라고 생각했던 탈레스와 꽤나 잘 어울리는 해석이다.

요즘 20, 30대 젊은이들의 사랑과 결혼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이번 생은 처음이라’는 드라마가 있다. 여기에는 여자 주인공이 나이 스물도 아니고 서른이 되도록 사랑인지 아니면 단순한 호의인지조차 구별하지 못하는 자신을 한탄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남자 주인공이 이런 대사를 날린다.

“신피질의 재앙입니다. 스무 살, 서른 그런 시간개념을 담당하는 부위가 두뇌 바깥부분의 신피질입니다. 고양이는 인간과 다르게 신피질이 없죠. 그래서 매일 똑같은 사료를 먹고 똑같은 집에서 매일 똑같은 일상을 보내도 우울하거나 지루해하지 않아요. 그 친구한테 시간이라는 건, 현재밖에 없는 거니까. 스무 살이라서, 서른이니까, 곧 마흔이라서, 시간이라는 걸 그렇게 분초로 나누어서 자신을 가두는 건 지구상에 인간밖에 없습니다. 오직 인간만이 나이라는 약점을 공략해서 돈을 쓰고 감정을 소비하게 만들죠. 그게 인간이 진화의 대가로 얻은 신피질의 재앙이에요. 서른도, 마흔도 고양이에겐 똑같은 오늘일 뿐입니다.”

인상적인 대사라 전체를 인용했다. 신피질이 재앙이라면 인간이 고양이보다 나을 것이 별로 없는 셈이다. 삶과 죽음, 어제와 오늘, 젊음과 늙음, 서른과 예순 등 시간을 구분하면서 과거라는 기억 속에, 미래라는 기대 혹은 불안 속에 현재라는 시간을 가두고 있으니 말이다. 하녀는 탈레스에게 한치 앞도 못 본다고 했지만, 그에게 중요한 것은 미래가 아니라 별을 보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었다. 그러니까 탈레스가 우물에 빠진 일은 가까운 현실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에 충실했다는 의미가 된다. 그의 삶에게 한치 앞은 지금보다 큰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우리는 한치 앞, 그러니까 미래의 일을 알 수 있을까? 한치 앞도 모르는 게 인생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요즘엔 이를 ‘시계제로’라는 신조어를 사용하여 정치, 경제, 사회 등 모든 분야에서 한치 앞도 예측하기 힘든 상황을 설명하기도 한다. 소크라테스가 했다고 알려진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이 <그리스 철학자 열전>에는 탈레스가 말한 것으로 되어있다. 또한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라는 내용도 나온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우리에게 너 자신이 한치 앞도 모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미래의 죽음 역시 마찬가지다. 언젠가 죽는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시점을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이니 삶이니 구분해서 그 안에 구속되지 말고 현재에 충실하면서 자유롭게 사는 일이 중요하지 않을까. 탈레스는 성실하게 별을 관찰하면서 살다가 더 이상 ‘별 볼 일 없어서’ 태양 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과거나 미래라는 시간에 사로잡혀 현재를 사는 것이 신피질의 재앙이라면, 그 구속에서 벗어나는 길도 있기 마련이다. 그것이 바로 신피질이 재앙이라는 생각을 낯설게 만드는 일이다. 신피질은 논리적 사유나 판단 등의 지적 활동을 담당하는 부분이다.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다른 점도 바로 신피질이 발달했기 때문이다.

신피질을 재앙으로 만들 것인지, 아니면 축복으로 만들 것인지는 진부하게 들릴지 몰라도 각자의 마음에 달려있다. 재앙이라는 생각을 낯설게 함으로써 현재를 ‘있는 그대로’ 살 수 있는 지혜 또한 신피질에서 나오니까 말이다. 탈레스에게 신피질은 별 볼 일 없을 때까지 철학적으로 열심히 살다간 축복이었다. 오늘의 우리가 그를 주목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불교신문3648호/2021년1월2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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